<15화>
그의 손끝이 눈물에 젖은 재경의 입술을 천천히 쓸었다.
그녀의 눈은 어느새 도결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그동안 주혁을 위로해 주기만 했지, 그녀가 위로를 받아 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이 상황이 낯설었다. 그러면서도 은근한 떨림이 기분 좋았다.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마요. 난 괜찮으니까.”
“…….”
“부담 주려던 건 아니었는데. 미안해요.”
“그게 아니라, 그냥… 아무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서 그래요.”
재경의 말에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가 아는 대부분 사람은 위기에 처할 때면 모두 그를 찾아오곤 했다. 그가 가진 재력이라든가 명예라든가 하는 것들이 그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확신하는 태도들이었다.
어쩌면 그도 내심 자신에게 그런 힘이 있을 거라 여겼는지도 몰랐다. 재경은 그런 도결의 오만함을 쉽게 깨뜨렸다.
“그렇군요.”
그는 태연하게 재경의 말에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경은 순간 자신이 그에게 조금 무례했단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눈물이 고여 있는 눈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말했다.
“무안을 주려던 건 아니었어요. 감정은 감염병처럼 쉽게 옮잖아요. 슬픔을 옮긴 것도 미안한데, 괜히 걱정까지 끼치고 싶지 않았어요.”
그녀의 변명에 그가 고개를 한 번 더 끄덕였다.
“친한 사이에는 콩 한 쪽도 나눈다는 말이 있던데. 별것 아니면 저랑 반씩 나눠요. 슬픔이든 기쁨이든 괜찮으니까.”
재경은 그렇게 반응하는 도결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콩 한 쪽은 먹으려고 나누잖아요. 근데 감정은 못 먹어요. 슬픔이 두 배가 되는 셈인데 나눌 필요가 있을까요?”
그러자 도결이 씩 웃으며 재경을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그깟 콩 반쪽 먹고 배불렀겠어요? 정 나누려고 먹었겠지. 그렇게 나눠 주기 싫으면 하나만 약속해요.”
“뭘요?”
“아무것도 묻지 않을 테니까 내 앞에서만 울어요.”
그의 말에 재경의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가 재경을 안으면서 했던 말과 겹친 탓이었다. 그땐 땀이라고 벅벅 우겼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말했잖아요. 우는 건 내 맘대로 못하는 거라고.”
“차재경 씨가 누구 때문에 우는 건지, 궁금해서 미칠 것 같은데.”
순식간에 굳은 그의 얼굴을 보면서 재경이 입술을 깨물었다.
“참고 있는 중이에요, 나. 그러니까 우는 것만큼은.”
그가 상처받은 눈으로 재경을 바라보자 그녀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재경은 이 순간만큼은 도결이 이상한 오해를 하도록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때도 지금도 그녀를 위로해 준 건 도결뿐이었다.
“나 지금 다른 사람 때문에 우는 거 아니에요!”
“…….”
당황한 도결이 입을 닫자, 어색해진 재경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겨우 대답했다.
“실은 사진 때문에….”
익명 게시판에 올라온 사진 때문에 힘들다는 사실을 전부 알리자, 도결은 구겨진 표정을 풀지 못했다.
“미안합니다.”
“고도결 씨가 나한테 왜 미안해요?”
“전부 저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까, 제가 다 처리할게요.”
그의 말에 재경이 고개를 저었다.
“알아보니까 철저하게 계획한 모양이에요. 법으로 처벌하긴 힘들 것 같아요.”
“우리 부부니까, 함께 해결해 보는 건 어때요?”
다정한 목소리로 묻는 도결을 올려다보면서 재경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는 운전기사가 들을까 봐, 따지고 보면 진짜 부부 사이는 아니지 않냐는 말을 눈빛으로 보내고 있었다.
그러자 그가 재경의 뺨에 얼룩진 눈물 자국을 손수건을 꺼내 닦아 주면서 답했다.
“전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해 볼게요. 재경 씨는 재경 씨가 할 수 있는 일을 해 봐요.”
* * *
다음 날 아침 재경은 도결의 말에 힘을 얻어 게시글을 작성한 사람을 도발하기로 했다. 일부러 악의적으로 사진을 올린 게시글 밑에 재경과 도결이 3년 전부터 연애를 해 왔다는 거짓 정보를 댓글로 달았다.
“이 방법이 진짜 통할까?”
다른 신문사 기자가 재경을 측은하게 보면서 물었다. 그러자 다른 기자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끼어들었다.
“통하긴 힘들 거예요. 게시글 작성자가 댓글 다는 일 많지 않잖아요.”
모두 소용없을 거라 믿는 말투였다. 재경은 혹시 이들 중에 게시글 작성자를 아는 사람이 있진 않을까 하고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있었다면, 진즉에 눈에 띄었겠지.
“아마 통할 거예요. 일부러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던졌으니까.”
재경은 차분하게 대꾸했다. 마치 아무런 타격도 없다는 듯이 굴었다. 만약 이들 중 범인이 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작성자는 반드시 이번 미끼를 물게 되어 있었다.
“에이, 어떤 바보가 이런 미끼를 덥석 물겠어? 뻔히 아이피가 남을 건데.”
“네, 남겠죠. 게시글은 우회해서 올렸어도. 댓글은 욱해서 달 테니까. 반드시 대한민국으로 뜰 거예요.”
예리하게 번뜩이는 재경의 눈을 보면서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차라리 디지털 장의사? 그런 걸 알아보는 건 어때?”
“싫어요.”
재경은 확고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어째서?”
“오늘 안에 댓글 달릴 겁니다. 기자로 산 짬밥이 몇 년인데. 이 감은 정확해요.”
다들 가능하겠냐는 표정이었지만, 이는 곧 사실이 되었다. 띠링 소리와 함께 재경의 댓글에 누군가 댓글을 달았다.
“달렸다!”
재경의 말에 다들 옹기종기 그녀의 노트북 앞으로 모였다. 게시글과 댓글을 비교하는 기자들의 눈빛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이놈이네.”
“제가 봐도 확실한 것 같아요.”
댓글을 단 사람은 게시글을 쓴 작성자가 확실해 보였다. 사용하는 말투나, 반복적인 오타가 그를 한사람이라 말하고 있었다.
“차 기자, 대단하다. 어떻게 알았어? 범인이 댓글을 달 거라는 거?”
“우쭐하는 모습이 좀 드러나는 글이었잖아요. 자신의 말에 반박하는 댓글이 올라오면 욱할 것 같았어요.”
재경의 말에 놀란 듯 기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일단 계속 인기를 얻으려면 사람들이 자기 말을 믿어 줘야 하니까.”
“근데 아이피로 추적을 어디까지 할 수 있으려나?”
걱정하는 목소리에 재경이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가 도와줄 수 있다고 했으니까 이 정도는 부탁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근데 댓글이 좀 특이하다. 한서일보 한은화 차장이랑 고 부회장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니. 미친 거 아냐?”
뜬금없이 튀어나온 한은화 차장의 이름에 재경 역시 의아한 시선으로 캡처를 했다. 그렇게 몇 초 뒤 빛의 속도로 사라진 댓글을 보면서 손끝이 떨려 왔다.
* * *
의자에서 막 일어서려던 도결은 재경의 전화를 받자마자, 빠르게 백 비서를 불렀다. 다급하게 들어온 백 비서는 휴대 전화를 붙들고 있는 도결의 눈치를 살피며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부회장님?”
“지금 당장 이 아이피부터 추적해야 할 것 같은데. 가능합니까?”
그가 대충 갈겨쓴 메모를 내밀자, 백 비서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받았다.
“아이피요?”
갑작스러운 지시에 당황한 백 비서가 가만히 그의 얼굴을 보았다.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태도였다. 도결은 마이크 부분을 손으로 가리고선 백 비서에게 이 일을 짧게 설명했다.
“차재경 씨 사진이 불법 사이트에 게시되었습니다. 사진이 더 퍼지기 전에 찾아서 처리해야 합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죠?”
그의 말에 백 비서가 허둥지둥 밖으로 나갔다. 그는 곧 마이크 부분에서 손을 치우며 재경에게 말했다.
“진짜 제가 도울 일은 이게 답니까?”
아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재경과 조금 더 통화하고 싶었다.
-아직까지는요.
선을 긋는 재경의 목소리에 그의 얼굴에도 미소가 천천히 사라졌다. 곧 아이피를 찾은 재경이 무엇을 할지 예상되었다. 경찰에 넘기기엔 정보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을 테고.
“범인 찾으면, 같이 가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돼요. 내 일이니까.”
“그게 아니라 재경 씨가 혼자 위험한 일에 휩쓸리는 게 싫어서 하는 말입니다.”
그의 말에 재경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궁금한데. 알 수가 없어서 답답해졌다.
“대외적으로 우리 부부잖아요.”
그는 한 번 더 재경을 설득하기 위해 부부라는 말을 강조했다. 그러자 재경의 옅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맞는 말 같아요. 진성그룹에 문제가 될 수도 있으니까. 위험한 일은 하지 않을게요.”
“고마워요.”
곧 백 비서가 창백한 얼굴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평소 그답지 않은 행동에 도결도 상당히 당혹스러운 눈빛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아이피 추적했는데. 아무래도 좀 심각해 보입니다.”
다급한 백 비서를 보면서 도결이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백 비서는 얼른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말해 봐요. 뭐가 그렇게 심각한지.”
“정확한 위치는 한서일보 본사입니다.”
“그게 그렇게 큰일인 겁니까?”
그가 껄끄럽게 묻자, 백 비서가 이마에 땀을 닦으면서 다시 대답했다.
“회사원 개인이 올린 게 아닐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화이트 해커를 통해서 접근해 보았는데. 완전히 막혀 있었어요.”
“그럼, 그 사진은 못 지운단 겁니까?”
짜증스러운 그의 물음에 백 비서가 망설이며 답했다.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문제가 될 가능성이 좀 있긴 하지만….”
도결은 어쩐지 말끝을 흐리는 백 비서를 보면서 미간을 구겼다.
* * *
“그 방법이 이런 방법인 줄 알았다면, 안 왔을 겁니다.”
도결이 서늘한 표정으로 백 비서를 노려보았다. 한서일보에 이런 식으로 방문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도 한은화 차장님이 기억하고 계셔서 다행이지 않습니까?”
“그사이에 이름까지 외운 겁니까?”
“아니요. 그전부터 외웠습니다. 부회장님 맞선 상대분이시니까. 잘 알고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눈치 없는 백 비서 때문에 그가 관자놀이를 눌렀다.
“회장님 도움은 싫으시다면서요.”
“그렇다고 한서일보 본사에 오겠단 말은 안 했습니다.”
그가 비스듬히 백 비서를 내려다보았다. 백 비서는 꿋꿋하게 지지 않고 대꾸했다.
“혹시 사모님 때문에 그러세요? 한은화 차장님 만나는 거 아시게 될까 봐?”
백 비서의 말에 도결이 인상을 썼다. 재경이 신경 쓰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오해는 무슨.”
평소처럼 딱 잘라서 아니라고 말하던 도결이 이내 넥타이를 만지작거리며 백 비서를 다시 보았다.
“오늘 일은 재경 씨한테 비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