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도결이 보낸 여비서가 드레스 숍으로 안내했다. 의상을 바꿔 입고 메이크업과 헤어를 손보자 특유의 기자 이미지에서 곧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재벌 사모님으로 바뀌었다.
“부회장님께선 KGR 비공식 파티장으로 바로 오실 겁니다.”
“따로 가는 건가요?”
“네. 일정 때문에 따로 가셔야 할 것 같아요.”
비서의 말에 재경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KGR 자료를 준비했는데, 보시겠습니까?”
자동차에 타자마자, 비서가 물어 왔다. 재경은 복잡한 머리를 정리할 겸 읽어 보겠다고 대답했다. 파티장으로 향하는 동안 차 안은 조용했다.
KGR은 소란스러운 일이 많은 회사였다. 최근 가장 이슈 된 건 후계 문제였다. 후계자들이 각각 마약과 음주 운전으로 한차례씩 조사를 받은 터라 경영권 문제가 복잡한 상황이었다.
“흥미롭네요.”
재경은 찌라시에서도 보기 힘든 자료를 쉽게 받아 볼 수 있단 사실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비서도 그 부분이 신경이 쓰였는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지금 보시는 자료들은 전부 기사화하시면 안 되십니다.”
“…저도 상도덕은 있는 사람이에요.”
“예?”
“다들 출입처가 있단 뜻이에요. 갑자기 다른 기자 출입증을 빼앗지 않고서는 기사 쓰고 싶어도 못 쓴다고요. KGR 출입증은 저한테 없거든요.”
딱히 비서가 궁금해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재경은 자신이 이 자료를 기사화할 이유가 없다는 걸 명확하게 밝히고 싶었다.
“죄송합니다, 작은 사모님. 의심해서 드린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곧바로 사과하는 비서를 보면서 재경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비서였다고 해도 비슷한 말을 전했을 것 같았기에 더 몰아세우고 싶진 않았다. 그녀는 서류로 시선을 내리면서 작게 대답했다.
“이해해요. 각자 자기 역할이 있는 거잖아요.”
* * *
KGR에서 주최한 비공개 파티에서는 의외의 인물들이 많이 보였다. 몇 명의 유명 정치인들과 연예인을 포함해 잘 알려지지 않은 경영인들까지 대거 참석했다. 생각보다 화려한 자리에 재경의 눈이 커졌다.
“사모님께선 최대한 말씀을 아끼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비서는 혹여나 재경이 이곳에서 실수라도 할까 봐 노심초사하는 모습이었다. 어째서 여비서를 붙여 주었나 했더니, 감시 차원이었던 모양이었다.
“네. 전 그럼 저쪽 구석에 있을게요. 비서님도 볼일 있으시면, 편하게 보세요.”
그렇게 재경이 쉽게 자리를 비키자, 비서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재경을 바라보았다. 좀 더 욕심을 부리며 나설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1년 뒤에 이혼을 생각하는 재경의 입장에선 나서 봐야 좋을 게 없는 상황이었다.
“사모님께선 처음 오시는 자리인데, 그래도 될까요?”
“괜찮아요.”
경제부 기자인 재경도 대외적으로 활동하는 경영인들은 전부 알아볼 수 있었다. 어쩌면 이 분야는 비서보다 더 빠삭할지도 몰랐다. 그녀는 조용히 구석에서 샴페인 잔을 들었다.
지난번 술에 취해서 인터뷰를 망친 걸 떠올리면 술을 마시지 말아야겠지만, 낯선 분위기라 술을 안 마시고는 견디기 힘들었다.
“전 할 말 없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재경이 다 마신 샴페인 잔을 내려놓는 사이, 담벼락 아래에서 여자 목소리가 났다. 곧 거칠어진 남자의 숨소리와 퍽 소리가 함께 들렸다. 재경은 위험한 상황이라고 판단해 담벼락으로 방향을 틀어 천천히 다가갔다.
“김윤성 이사님, 내가 지난번에 경고했죠? 회사에 욕심부리면 재미없을 거라고.”
재경은 주황색 은은한 불빛에 반사되어 보이는 남자의 얼굴을 천천히 살폈다. 얼마 전 연예인 B 모 양과 함께 마약으로 문제를 일으켰던 KGR그룹의 장남이 분명했다.
그에게 멱살이 잡힌 여자는 중년으로 보였다. 저보다 10살은 더 젊은 사내에게 멱살을 잡혔음에도 당황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때도 지금도 전 회사에 욕심 없습니다. 오해세요.”
중년의 여자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더 화가 났는지, 남자는 멱살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며 조용히 읊조렸다.
“그렇게 억울하면, 회장님께 잘 빌어 봐요. 욕심 없으니까, 그만해 달라. 나 무서울 것 없는 놈입니다. 김 이사님 한 사람 대한민국에서 치우는 거 일도 아니에요.”
재경은 섬뜩한 말에 미간을 구겼다. KGR그룹 장남이 인성에 문제가 있는 건 기사를 통해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저 정도로 개차반인 줄은 몰랐다. 그렇다고 차남이 더 낫다는 건 아니었다. 도토리 키재기니까.
“크흠.”
일부러 인기척을 내자, 중년 여자의 멱살을 잡고 있던 KGR그룹 장남이 서둘러 손을 치웠다. 평소라면 버럭 소리를 질렀을 테지만 지금은 비공식 파티 중이었다. 괜한 소란을 피워서 좋을 것이 없다 판단했는지 빠르게 사라졌다.
이후에도 중년의 여자는 그 자리에서 한참 서 있었다. 재경은 괜히 걱정되어 슬쩍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아, 네.”
목을 슬쩍 가리는 여자의 손을 따라 재경의 시선이 머물렀다. 아무리 봐도 목에 붉은 자국이 그대로 남은 듯했다. 재경은 서둘러 자신의 가방 손잡이에 묶어 두었던 스카프를 풀어 그녀에게 건넸다.
“목에 차면 가려질 거예요.”
정장을 입고 있던 김 이사는 천천히 재경이 건넨 스카프를 잡았다.
“고맙습니다. 스카프는 일정 끝나고 돌려드려도 될까요?”
“아, 네.”
재경이 가방에서 명함을 꺼내자, 김윤성 이사가 몸을 움찔했다. 경계하는 모습을 보면서 재경이 머쓱하게 웃었다.
“안심하세요. 오늘은 기자가 아니라, 진성그룹 고도결 부회장님 부인으로 참석했어요. 드릴 명함은 그것뿐이라서.”
“아, 네. 실례했습니다. 사모님.”
몸을 숙이는 김윤성을 보면서 재경이 손을 저었다.
“아녜요. 제가 눈치 없이 낀 건데요. 뭘.”
김 이사가 자리를 피하자, 도결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인파 속에서도 가장 눈에 띄었다.
그를 중심으로 쉴 틈 없이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이렇게 눈으로 목격하고 보니 도결과 결혼했단 사실이 더욱 비현실적이게 느껴졌다. 집 안에서 이야기할 땐 제법 대화가 통하는 느낌이었는데. 애초에 대화가 통할 수 있는 사이가 아니었단 생각이 밀려들었다.
재경이 샴페인 잔을 다시 잡았을 때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막았다. 놀란 재경이 고개를 들자, 도결이 굳은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디 있었어요?”
뜻밖의 질문에 재경이 눈을 끔뻑였다.
“계속 여기 있었어요.”
“한참 찾았습니다.”
묘하게 걱정스러운 듯한 목소리였다. 말도 없이 사라진 건 재경의 잘못이 분명했으나, 방금 전 비밀을 약속했기 때문에 전부 다 말하기는 곤란했다. 재경은 시치미를 뚝 떼며 대답했다.
“잠깐 걸었어요. 샴페인을 마셔서 좀 졸리길래.”
“그럼, 들어갈까요?”
“중요한 자리라면서요. 저 때문에 폐를 끼칠 순 없죠.”
재경이 슬쩍 그의 손아귀에서 자신의 손을 빼며 선을 그었다.
“중요한 자리라서 하는 말이에요. 술 취한 차재경 씨는 내가 제일 잘 아니까.”
* * *
그가 진짜 이대로 돌아갈 줄은 몰랐다. 함께 차를 탄 재경은 어색하게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진짜 이렇게 돌아가도 괜찮은 거예요?”
민폐를 끼치는 기분이라 찝찝해졌다. 그러자 도결이 시큰둥하게 창문으로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KGR그룹은 이미 후계 문제만으로도 벅차 보이던데, 이 자리를 통해 뭘 보여 주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더군요. 차재경 씨는 장남과 차남 중 누가 경영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갑작스러운 질문이라, 당황스러워요. 으음. 꼭 두 사람만 놓고 봐야 하나요?”
재경이 정말 곤란하다는 눈으로 도결을 보았다.
“전문 경영인이 옳다는 말입니까?”
“뭐, 외부에 있는 전문 경영인은 회사에서도 부담이 될 테니까. 회사 내에 있는 사람이 올라가도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워낙 논란이 많았던 사건이라 쉽게 묻히진 않을 것 같거든요.”
인터넷 세상 속은 그랬다. 한 번 기록이 되면 절대 지워지지 않는다. 기사를 막을 수 있는 것도 타이밍이 있었다. 한 번 노출이 되면, 그다음은 손쓸 수 없었다.
재경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앞으로 그 사진은 재경이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그녀를 괴롭힐 게 분명했다.
“표정이 계속 안 좋은데. 혹시 무슨 일 있었어요?”
도결의 질문에 재경은 눈을 끔뻑였다. 참 이상했다. 지금까지 꿋꿋하게 잘 버틴 것 같은데 그의 걱정 어린 질문에 눈물이 핑 돌았다.
억지로 참으려고 했지만, 끝내 눈물방울이 치마 위로 떨어졌다.
“차 좀 세워요.”
그 순간 도결이 낮은 목소리로 차를 세웠다. 안전벨트를 푼 그가 조심스레 재경을 안았다. 당황할 틈이 없었다. 재경은 무너져 내렸고, 그는 그런 그녀를 꽉 붙들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줘요.”
그의 체취가 재경을 안도하게 했다. 처음부터 그랬다. 그의 품은 재경의 폭풍같이 휘몰아치는 감정을 전부 막아 내는 방패 같았다. 방패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걸 빤히 알면서도 잠시만 그의 품에 숨어서 편히 울고 싶었다.
“…잠시 이대로 있어 줘요. 아주 잠깐이면 돼요.”
재경은 그의 옷자락을 꽉 잡고 엉엉 울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