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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12/60)

<12화>

같이 자자는 말이 진짜 ‘잠’만 자겠다는 뜻일 줄이야. 머쓱해지는 건 재경의 몫이었다. 

서로에게 끌려 첫 만남에 원나잇까지 한 사이인데, 결혼 후에 건전하게 한 침대에 누워만 있으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재경은 옆에 있는 도결에게 온 신경이 쏠렸다.

“저기….”

크림색 실크 슬립을 입고 누워 있던 재경이 슬쩍 그를 불렀다. 정적만이 흐르는 침실 안에서 재경이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푸른색 조명이 은은하게 깔린 방 안은 야릇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사용인들이 여기저기 힘을 준 게 보였다. 매혹적인 향초부터 붉은색 장미꽃이 담긴 화병 따위를 보면 그랬다. 정작 침대 주인은 스님처럼 누워 있는데.

“혹시 자요?”

그렇게 물은 재경의 눈꺼풀이 아래로 힘없이 내려갔다. 그의 체취가 풍기는 침대 위에 누워 꿀잠을 자려고 노력했으나 도무지 심장이 진정할 틈을 안 줬다. 재경은 도저히 그와 한 침대에서 잘 수 없을 것 같았다.

‘베개 들고 소파에 가서 잘까?’

재경이 몸을 뒤척이며 옆으로 눕자, 반듯하게 누워서 눈을 감고 있는 도결의 옆모습이 보였다. 언제 봐도 감탄하게 만드는 콧대였다. 잠깐만 보려던 건데, 그녀의 시선이 어느새 그의 붉은 입술에서 멈췄다. 

“언제까지 훔쳐볼 겁니까?”

잠든 줄 알았던 그가 눈을 감은 채로 조용히 물어 왔다. 순간 부끄러워진 재경이 서둘러 몸을 정면으로 돌리며 헛기침을 해 댔다.

“크흠, 침대가 좀 좁아서 그래요. 딱히 훔쳐보려던 건 아니고요.”

“아, 공간이 좁으면 대놓고 훔쳐봐도 되는 겁니까?”

도결의 도발적인 목소리에 움찔한 재경이 이불을 코끝까지 올렸다. 괜히 콩닥콩닥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아직 안 자고 있었어요? 대답이 없어서 자는 줄 알았더니.”

“잠이 오겠습니까?”

그러면서 그가 몸을 뒤척이더니 재경을 향해 몸을 돌렸다. 당황한 재경이 몸을 슬쩍 반대로 옮기면서 투덜거렸다.

“뭐 하는 거예요?”

“We're not doing anything.”

그윽한 눈빛이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그의 말에 재경이 눈을 꽉 감았다. 

분명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의 시선이 닿는 피부가 따끔거리면서 신경이 쓰였다.

“부담스러워요. 그만 봐요.”

재경의 말에 그가 픽 웃는 소리가 들렸다. 슬쩍 눈을 떠 그를 바라본 재경은 도결이 사냥감을 지켜보는 맹수처럼 보였다. 여차하면 목덜미를 물기 위해 조용히 숨을 죽인 듯한 모습이었다. 

얼떨결에 그와 다시 눈이 마주친 재경은 맥없이 목이 물린 사슴처럼 느릿하게 행동했다.

“첫날밤, 기대하는 줄 알았는데. 계속 잘 거예요?”

허락이 떨어지자, 순식간에 그의 단단한 몸이 재경의 위로 올라왔다. 야릇한 그의 입술이 곧 그녀의 마른 입술을 삼켰다. 그의 품에서 부드럽게 적셔지는 순간 그녀의 마른 꽃잎이 활짝 만개했다.

*   *   *

아침부터 본가에 도착한 재경의 얼굴이 초췌했다. 밤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냐며 놀리는 시모 덕에 재경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사이 고 회장은 한마디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재경을 대놓고 투명 인간 취급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결혼하자마자 아침부터 이렇게 오는 건 좀 그렇다. 새아기도 어제 힘들었을 텐데.”

시모의 말에 반응한 건 고 회장이었다. 성난 목소리로 제 아내를 쏘아보는 고 회장의 눈초리는 매섭다 못해 지독했다.

“크흠. 잘 왔다. 할 도리는 하고 살아야지.”

“신경 쓰지 마. 내일부턴 이렇게 들를 필요 없어. 신혼인데.”

시모가 고 회장의 목소리를 못 들은 사람처럼 시치미를 뚝 떼자, 당황한 재경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실은 알려 드려야 할 소식이 있어서 찾아뵙자고 했습니다.”

그가 꺼낸 한마디에 시조모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임신 소식이니?”

“쿨럭.”

깜짝 놀란 재경이 사레가 걸려 얼굴이 더욱 벌겋게 익자 도결이 어쩔 줄 모르겠단 표정으로 허둥댔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는 고 회장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쯧. 가정 교육은 도대체 어떻게 받은 거야?”

“그런 말씀 하는 고 회장님의 인성도 참 좋아 보이네요. 그렇죠?”

제 아내가 날카롭게 꼬집자, 고 회장의 미간에 주름이 세 개나 잡혔다. 고 회장은 못마땅한 눈빛으로 아내를 쏘아보면서 도결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서 할 말이 뭔데?”

“차재경 씨가 앞으로도 기자 생활에 집중하고 싶다네요.”

날카로운 칼날처럼 위협적인 고 회장의 시선에 재경이 겨우 물을 삼켰다. 

“난 그 누구도 진성에 먹칠하는 꼴은 못 본다.”

당황한 재경이 눈을 끔뻑이면서 고 회장의 입술을 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고 회장의 말은 자신이 진성에 먹칠할까 봐 출근을 허락 못 한다는 뜻이었다.

“죄송합니다만, 아버님. 저도 누가 제 이름에 먹칠하는 꼴은 못 봐요.” 

고준혁 회장을 똑바로 바라본 그녀가 주먹을 꽉 쥔 채로 할 말을 야무지게 해내자, 도결이 애정 어린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지금 누가 누구의 이름에 먹칠을 한다는 거야?”

진성그룹이 얼마나 명예로운 기업인지 재경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재경의 인생을 진성그룹을 위해 포기할 이유는 없었다. 비록 주혁을 위해 허드렛일을 많이 해 오긴 했지만, 전부 기자 생활에 피와 살이 된 경험들이었다. 결코, 헛된 세월을 보낸 게 아니었다.

“저도 기자 생활 쉽게 지켜 온 거 아닙니다. 제 이름 석 자 걸고 열심히 살았어요. 아버님 때문에 그만둘 수는 없어요.”

“그깟 연봉 얼마나 받는다고. 허, 참. 얼마야? 얼마면 되겠어?”

“됐습니다. 제가 불로 소득은 한 번도 얻어 본 적이 없어서요.”

단호한 재경의 대답에 정화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얼마 전 그녀 자신도 재경에게 한번 당한 적 있었다. 그래서 그런가, 남편이 재경의 대답에 당혹스러워하는 이 상황이 퍽 재미있었다. 

“뭐?”

“회장님, 언론 플레이 좋아하시잖아요? 그래서 제가 회장님과 이 집에서 아침 식사까지 함께 할 수 있게 된 거 아닌가요?”

말이라면 재경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단호한 재경의 눈빛을 보면서 고 회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서 계속 기자 생활을 하겠단 거야?”

“네. 그러니까, 회장님께서도 제게 잘 보이세요. 그럼, 혹시 알아요? 제가 진성그룹 기사 잘 써 드릴지.”

재경의 맑은 눈동자를 보면서 고 회장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화가 난 고 회장의 얼굴을 본 정화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하하하. 난 찬성. 요즘 세상에 맞벌이가 뭐 그렇게 흉이라고. 안 그래요, 어머님?”

정화의 물음에 시조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재벌가의 여식으로 태어난 두 사람도 예외 없이 경영을 해 왔다. 맞벌이하는 게 딱히 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고 회장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도결이 무심하게 손을 올렸다.

“저도 이미 재경 씨 의견에 동의했습니다. 맞는 말 같아서요. 저도 지금까지 진성만 보고 살았고, 재경 씨도 기자 생활만 보고 사는 사람이라. 제법 통하는 구석이 있습니다.”

그의 말에 정화가 활짝 웃었다.

“다수결 좋네. 새아기는 당연히 찬성일 테고. 어머님은요?”

정화의 물음에 할머님이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재경을 빤히 바라보았다.

“오늘 보니까, 이 늙은이가 오래 살길 잘했단 생각이 들어.” 

긴장감이 맴도는 순간이었다. 다들 은근히 할머님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눈치라 재경도 집중하고 있었다.

“집안에서 민주화 투표도 다 해 보고 말이야. 이번 건 찬성이야. 김 대표도 나도 다 바깥일 하면서 살았잖니. 여자가 일하는 게 뭐 그렇게 대수라고.”

그러자 고 회장이 표정을 애써 온화하게 풀고는 제 모친을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어머님, 미술관 관장도 아니고, 호텔 경영도 아닌… 일개 기자잖아요? 이런 걸 허락하는 건 반대입니다.”

“고 회장, 내가 지는 쪽에 표 던지는 것 봤어? 이번 일은 고 회장 편을 들지 못해서 아쉽게 되었네. 마저 식사하지.”

대리석 식탁에는 정갈하게 담긴 반찬들이 놓여 있었다. 

“편히 들어요. 직장 생활 열심히 하고.”

도결의 모친이 웃으며 재경에게 말을 걸었다. 고 회장은 그 모습이 신경 쓰였는지 괜히 ‘흠흠.’하고 인기척을 냈다. 그러든가 말든가 도결의 조모인 하춘마저 웃으며 재경의 얼굴을 한 번 더 보았다.

“아이고, 참 곱다.”

대놓고 재경을 예뻐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자, 고준혁 회장은 기분이 더욱 언짢아졌다. 대충 1년만 데리고 있다 내보낼 사람이었다. 외부인과 다름없는 재경을 편드느라 저를 홀대하는 어머니와 부인을 보니 속이 끓었다.

“요즘 저 정도 곱지 않은 애들이 어디 있습니까?”

고 회장이 시큰둥하게 대답하자, 정화가 자신의 남편을 힐끗 보며 조소했다. 사랑 없는 결혼은 저 하나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도결이 여우 같은 여자의 꾀에 넘어간 게 아닐까 염려했었다. 그러다 재경의 태도를 보고 확신했다. 두 사람은 인연이 분명해 보였다.

“요즘 애들을 알긴 알고요? 워낙 일만 하셔서 모르는 줄 알았더니.”

정화가 툭툭 시비를 걸자, 고 회장이 일부러 대화 주제를 바꿔 버렸다.

“크흠. 이 일은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지. 며칠 뒤에 KGR에서 비공개 파티를 연다더군. 아무래도 난 나이가 있으니, 부회장이 대신 좀 나서서 다녀와.”

“네.”

도결이 고개를 끄덕이자, 하춘이 고개를 들었다.

“손자며느리도 같이 다녀오면 좋겠구나.”

“거긴 중요한 자리예요. 어머님. 일개 기자가 낄 자리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더욱 같이 다녀와야지. 새신랑이 혼자 가면 보기 좋지 않잖아. 안 그러니?”

하춘이 고개를 들어 제 며느리를 보았다. 정화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은근히 말이 많은 사교계라, 금방 안 좋은 소문이 돌 것이 분명했다.

“괜한 트집 잡힐 필요는 없을 것 같긴 하네요. 현명하세요.”

정화는 재경을 바라보면서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제 모친의 따뜻한 미소를 처음 보는 도결은 생소함에 조용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럼, 함께 다녀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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