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고도결 부회장의 결혼식은 뉴스와 인터넷 기사를 통해 실시간 중계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이목을 끌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사랑하는 진성그룹이었기에 이번 결혼식 역시 좋은 반응으로 가득했다.
“팬클럽 있는 재벌은 역시 다르구나 싶네요. 어떻게 톱스타 결혼식보다 더 떠들썩하죠?”
고준혁 회장의 유일한 자식인 고도결 부회장은 언제나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존재였다. 형제들과 경영권을 다툴 일이 없는 온전한 후계자라는 점이 그를 더 특별하게 만들었다.
그런 고도결 부회장이 일반인과 결혼한다고 하니, 이번 결혼식을 남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게. 유난들이다 정말. 하기야 아나운서나 여배우가 재벌가 입성하는 경우는 종종 봤지만, 기자가 재벌가 입성하는 건 처음이긴 하지.”
“하기야, 기레기라고 욕먹는 시대에 놀라운 일이긴 하죠.”
“아무리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는 하지만, 결혼을 비즈니스로 여기는 재벌가 사람들이 기자랑 결혼까지 하는 게 좀 이상하긴 해. 찌라시가 괜히 돌겠어?”
기자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에 주혁이 넥타이를 매만졌다. 불편한 기색으로 서 있는 주혁을 보면서 윤서희 기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동기인 재경의 결혼이 마음에 들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다들 이번 일이 안 믿기는 모양이에요.”
윤 기자의 말에도 주혁은 반응이 없었다. 마치 아무 소리도 못 들은 사람처럼 태연하게 태블릿 PC만 바라볼 뿐이었다.
“부장님?”
오늘은 보통의 새해와는 달랐다. 호텔 영빈관에서 치러질 결혼식을 위해 수많은 사람이 모였고, 몇십 명의 경호원들이 배치되었다. 심지어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재벌부터 유명 인사들까지 한데 모여들었다. 그중 가장 놀라운 사실은 진성그룹이 직접 기자들을 초대했다는 것이었다. 조용히 식을 올리는 다른 재벌들의 결혼식과 반대로 화려하고 시끄러운 결혼식이었다.
“말해. 듣고 있어.”
“솔직히 이번 결혼식 좀 미심쩍은 부분이 있는 것 같지 않아요?”
한서일보 명찰을 목에 건 윤 기자가 의심스럽단 표정으로 떠들어 댔다. 가만히 듣던 주혁이 고개를 들어 윤 기자를 바라보았다.
“윤 기자는 차 기자랑 같이 입사하지 않았어? 동료애가 없어 보이네.”
“자고로 빈 수레가 요란하단 말이 있잖아요. 너무 결혼식이 요란해 보여서. 그리고 입사 동기인 걸로 묶이는 거 싫어요. 오늘의 적은 내일의 아군이고, 내일의 적은 또 오늘의 아군이라잖아요. 다 그런 거죠. 지금은 아군으로 생각하기 싫고요.”
“그냥 이 결혼식이 빈 수레이길 바라는 건 아니고?”
주혁의 단호한 물음에 윤 기자가 입을 다물었다. 질투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그렇지만 순순히 인정하고 싶진 않았다.
“솔직히 그냥 하는 말 아녜요. 암암리에 사진 돌고 있다던데. 부장은 아직 못 보셨어요?”
“윤 기자, 기자 생활 몇 년 했지?”
“예?”
어쩐지 평소의 주혁과 달랐다. 윤 기자는 날카롭게 곤두선 주혁을 의아하게 바라봤다. 김 부장과 차 기자가 가까운 사이였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문득 차 기자가 김 부장을 버리고 재벌과 결혼을 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 정도 짬이면 알 때도 되지 않았나?”
“그게 무슨 뜻이에요?”
“입에 떠먹여 줘야 하는 스타일인 모양이네. 자 봐, 여기 모인 사람들이 몇 명인지.”
쌀통에 담긴 쌀알들처럼 빼곡하게 찬 사람들을 보면서 윤 기자가 눈을 깜빡였다. 인파가 많은 게 뭐 그리 대수냐는 듯 윤 기자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주혁이 사나운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많이 왔네요. 재벌이랑 결혼하는데. 이 정도는 오겠죠. 당연히.”
“우린 대중이 원하는 걸 기사로 쓰면 돼. 찌라시든 사진이든. 우리랑 상관없어. 조회수 잘 나올 법한 기사나 준비하란 말이야.”
소설이나 만화만 인기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노출된 기사도 결국 클릭된 횟수가 중요했다.
“사진이 도는 걸 알면서도 그냥 참으란 거예요?”
“허튼짓하지 말라는 거야. 차 기자 잘 포장해서 현대판 신데렐라로 기사 뽑아 봐. 지금은 그것만이 진실이니까.”
“그렇지만, 이번 결혼식 판을 뒤집어 버릴 사진을 찍었다고 하던데요.”
“윤 기자, 업계에서 일 안 할 거야? 남의 가정 파탄 낸 기자 딱지 얻어서, 윤 기자가 얻는 게 뭐야?”
놀란 윤 기자가 주혁을 바라보자, 그가 미간을 구겼다.
“솔직히 난 윤 기자한테 크게 바라는 거 없어. 대중이 원하는 기사를 가장 빨리 써 올 것. 그 정도는 윤 기자도 할 수 있잖아?”
서희는 입사 이후 계속 차재경과 비교당했다. 그런데 지금 김주혁 부장이 또다시 윤 기자를 재경과 비교하고 있었다. 서희는 할 수만 있다면, 차재경을 완전히 나락으로 끌어내고 싶었다.
* * *
재경은 결혼식에 참석한 수많은 하객을 보다가 도결을 힐끗 올려다보았다. 카메라 앞에서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모습은 진짜 새신랑처럼 보였다.
“가업을 이어가지 말고 배우를 하지 그랬어요? 연기자가 따로 없네요.”
재경이 그의 귓가에 작게 속삭이자, 도결이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재경의 뺨 위에 묻은 속눈썹을 다정하게 떼어 주며 대답했다.
“그러는 차재경 씨는 너무 표정이 굳은 거 아닙니까? 누가 보면 억지로 나한테 팔려 오는 줄 알겠어요.”
“계약서에 쓰여 있는 대로, 딱 1년이에요.”
“그럼, 더더욱 이 연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겠네요.”
그가 부드럽게 재경의 턱을 잡고 입술을 포갰다. 옅은 숨이 서로의 입술을 통해서 전해지고 있었다. 놀란 재경은 살포시 눈을 감고 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은은하게 풍기는 그의 체취가 재경을 자극하고 있었다.
“스탑!”
갑자기 들려오는 남자 목소리에 놀란 재경이 고개를 돌렸다. 그 바람에 그와 붙어 있던 입술이 떨어졌다. 재경의 분홍색 립스틱 자국이 묻은 입술로 도결이 픽 웃었다. 립스틱이 살짝 번진 것뿐인데, 그는 그 자체로 야릇한 분위기를 풍겼다.
“정말 잘 어울립니다! 각도 좋고! 한 번 더 가 볼게요!”
결혼식 사진을 찍던 사진 기자의 말에 그가 픽 웃었다.
“연기가 너무 서툰 거 아닙니까? 방금 되게 통나무 같았어요.”
그의 핀잔에 재경이 헛기침했다. 뺨이 붉어진 그녀를 보면서 도결이 실실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보자 이상하게 약이 올랐다. 그녀는 그 순간 당당하게 손을 뻗어 도결의 목에 둘렀다. 그러고는 거칠게 입을 맞췄다. 신부의 박력 있는 태도에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자! 다 찍었습니다.”
찰칵이는 소리가 끝나자, 재경이 곧바로 그를 놓아주었다. 자신 있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건 덤이었다.
반짝이는 입술을 만들기 위해 발랐던 립글로스 때문에 입술이 떨어지면서 끈적이는 느낌이 들었다. 살짝 놀라서 커진 그의 눈이 재경의 얼굴을 집요하게 바라봤다.
“됐죠?”
도결의 시선에 멋쩍어진 재경이 물었다. 그러자 도결의 뺨이 붉어졌다.
“새 신부가 이렇게 적극적이면.”
웅성거리며 빠지는 사람들은 모두 이 결혼식은 특별한 것 같다며 떠들고 있었다. 그가 슬쩍 몸을 숙여 재경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속삭였다.
“곤란합니다.”
“어째서요? 고도결 씨도 엄청 적극적이었는데.”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따지듯 묻자, 그의 귀가 붉어졌다.
“첫날밤을 기대하게 되거든요.”
그렇게 스치듯 한마디를 던진 그가 성큼성큼 사라져 버렸다. 재경은 황당한 표정으로 그가 사라지는 자리를 끝까지 노려보았다.
‘기대는 무슨. 진짜 결혼도 아니면서.’
* * *
어떻게 식을 올렸는지도 모르게 순식간에 끝이 났다. 면사포는 생각보다 훨씬 무거웠고, 드레스는 잡아 주는 사람들이 있어도 질질 끌려서 불편했다.
오랜만에 본 부모님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셨고, 고준혁 회장님은 눈물을 닦느라 바빴다. 가짜 눈물일 게 뻔했지만, 고 회장의 눈물은 여러 사람의 마음을 울렸다고 했다. 좀 우습게 보였다. 진실도 모르고 거짓에 열광하는 세상이라니.
결혼식이 끝나고 기자회견을 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질문은 도결이 대답했다. 재경은 일반인이었으므로 딱히 질문을 받을 게 없었다. 그를 사랑하느냐, 어떻게 만났느냐 하는 뻔한 질문들만 몇 개 있을 뿐이었다.
기자회견 이후 재경은 쇼윈도 부부가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미리 준비해도 갑작스러운 질문을 받으면 말문이 막히고는 했다. 진실을 밝히는 기자가 거짓말을 한다는 게, 참 그랬다.
결혼식이 끝난 두 사람은 나란히 그의 집으로 돌아왔다.
“내일은 본가에 들러야 합니다. 재경 씨가 원하면 처가댁에도 다녀오고 싶은데. 어때요?”
거대한 서류를 보면서 그가 조용히 물어 왔다. 그의 곁에 나란히 앉아서 기사를 작성하던 재경이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해요. 시한부 결혼이라고는 하지만, 결혼을 한 건 한 거니까. 고도결 씨도 제 부모님께 사위 역할을 제대로 잘해 주길 바랄게요.”
“그렇게 할게요.”
간결하게 대답하는 도결을 보면서 재경이 머뭇거렸다. 문득 제 부모님이 걱정된 탓이었다. 그의 부모님은 계약 결혼이란 걸 전부 알고 계시지만, 재경은 부모님께 차마 말씀드리지 못했다. 혹 재벌 사위가 너무 잘해서 마음을 다 주시면 어쩌나 하고 불안해졌다.
“1년 후면 헤어질 사이니까. 너무 정들지는 말고요.”
적당히 선을 긋는 재경을 보면서 도결이 살짝 미간을 구겼다. 재경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이 이야기를 서둘러 끊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다른 말로 시선을 끌었다.
“그래서 고도결 씨는 갑자기 왜 본가에 같이 가자는 거예요?”
그는 하고 싶었던 말을 하는 대신 재경의 질문에 착실히 대답했다.
“기자 생활 계속하고 싶다면서요. 미리 가서 해결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의 말에 재경이 눈을 끔뻑였다. 본래 재벌들은 매사 막무가내인 경우가 많았다. 무례하기도 하고 자신들의 의견을 강요할 줄만 알았달까. 당장 보도 기사만 해도 그렇지 않나. 그런 재벌들과 같은 부류일 줄 알았던 그가 먼저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자 당혹스러웠다.
“진짜 일해도 괜찮아요, 나?”
회사에 피해가 될까 봐 웃는 것도 마음대로 못 한다던 남자가 아니었던가? 재경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도결이 쥐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웃었다.
“지금 내가 반대하면, 그 일 포기할 수 있어요?”
“미쳤어요? 제가 왜 포기해요?”
“나 역시 무슨 일이 생겨도 진성을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차 기자님도 계속해요, 기자 생활. 잘 어울려.”
그의 말을 듣고 나니 조금 마음이 편안해지는 재경이었다. 혹 자신의 고집 때문에 피해가 될까 걱정했으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자신이 이 거대한 기업에 해를 주면 얼마나 줄까 싶었다.
“진짜 그래도 돼요?”
“네, 됩니다. 늦었는데 그만 잘까요?”
잔잔한 그의 목소리에 놀란 재경이 침을 삼켰다.
“설마, 같이 자자고요? 싫어요! 절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