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대표님, 부회장님 오셨습니다.”
재경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압박감에 얼굴이 창백해졌다. 사실 고도결 부회장의 집도 드라마 세트장 저리 가라 할 만큼 거대하고 웅장했는데, 그의 본가는 정말 화려함의 극치였다.
하기야 이곳에는 도결의 집에 세 개쯤 있던 헬리콥터 착륙장이 무려 다섯 개는 더 있었다. 착륙장에서부터 거대하고 아름다운 정원이 있었는데, 저택까지 걷는 동안에도 현실성이 전혀 없었다.
‘누가 본가를 가는데, 헬리콥터를 타느냐고.’
낯선 기분은 그때가 마지막이 될 줄 알았는데. 그 지점을 시작으로 정정해야겠다. 그의 본가는 정말 새로운 차원의 문이 열린 듯 낯설고 어색한 것뿐이었다.
“왔니?”
차가운 인상의 중장년의 여인과 노년의 여인이 그들을 맞이했다. 확실하진 않으나, 추측하기로는 그의 모친과 조모 같았다.
“안녕하세요. 할머님, 어머님.”
도결은 마치 상사를 모시듯이 깍듯하게 몸을 숙여 인사했다. 그가 인사하는 것을 확인한 재경이 서둘러 얼렁뚱땅 고개를 푹 숙였다.
“안녕하세요!”
재경을 유심히 바라보던 조모가 피식 웃었다.
“흐음. 어서 와요. 재미있는 아가씨가 왔네.”
“네. 그런 것 같아요. 편하게 들어와요.”
마치 면접장에서 인사를 한 기분이었다. 저를 빤히 바라보는 두 여인을 보면서 재경이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도결의 조모는 흰머리를 반듯하게 올려 묶었고, 그의 모친은 단 한 올의 흰머리도 없는 고동색 머리카락을 풍성하게 드라이한 상태였다.
물론 재경도 도결의 집에서 그의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단정한 상태였으나 그들에 비교할 것은 아니었다.
“우린 국화차로 할 건데, 아가씨는 뭐 마실래요?”
도결의 모친 정화의 물음에 재경이 배시시 웃으며 같은 것으로 부탁한다고 대답했다.
“들었죠? 같은 것으로 세 잔 부탁해요.”
그의 모친은 함께 있는 도결에게는 무엇을 마실 건지 묻지도 않았다. 다른 사용인에게도 자신들 것과 재경의 것만 부탁할 뿐, 도결의 것은 따로 부탁하지 않았다. 그러나 도결은 상관없다는 듯 그녀들을 따라 응접실까지 함께했다.
“안 본 사이에 고 부회장은 많이 눈치가 없어졌네.”
그만 빠지라는 뜻이었으나, 그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눈치가 없는 편입니다.”
힐끗 어른들의 눈치를 살피던 재경이 도결을 보았다. 어서 가 보라는 그녀의 눈빛에도 그는 꿋꿋하게 재경의 옆에 앉았다.
그러자 도결의 모친은 예사롭지 않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화의 카리스마가 얼마나 대단했냐면, 아무 죄도 안 지은 재경의 몸이 절로 쪼그라들었다.
“그럼, 딱 잘라서 말해야겠네. 부회장은 그만 가 봐도 괜찮아.”
“딱히 갈 곳이 없습니다. 같이 있겠습니다.”
그가 절대 이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는 의사를 보이자 도결의 모친은 검지로 턱을 만지더니 이내 미소를 지었다.
“회장님이 찾으시던데?”
도결은 그 말을 듣고서는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재경 씨, 불편하게 하지 마세요.”
“그래, 그러마.”
지켜지지 않을 약속을 하고 떠나는 그를 보면서 재경의 눈이 갈 곳을 잃었다. 그래도 그가 곁에 있을 때는 긴장이 조금 덜 되었는데, 도결이 훅 빠지고 나니 다시 긴장감이 돌았다.
“이름이 차재경이라고 했던가요?”
“네. 어머님.”
재경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자 정화가 손을 들었다. 섬섬옥수에 흰색 봉투가 놓이는 데 든 시간은 고작 몇 초였다. 정화가 손을 내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용인 하나가 봉투를 테이블 위로 올렸다. 두툼한 돈 봉투를 보면서 재경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두 분은 비슷하십니다.”
그가 함께 오면서 재경에게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맴돌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돈 가방이나 돈 봉투나 크게 다를 것 없으니, 그의 말이 반은 맞는 듯했다.
원래 재벌들은 다 이런 건가? 재경은 서둘러 고개를 저으며 양손도 함께 흔들었다.
“죄송하지만, 전 이런 거 받을 수 없습니다.”
재경이 빠르게 선수를 치며, 흰 봉투를 받기도 전에 거부했다. 정화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재경을 바라보았다. 누가 보아도 기분이 나쁜 얼굴이었다.
“지금 나한테 이런 거라고 했어요?”
“죄송합니다.”
“내가 차재경 씨한테 뭘 주려고 한 건 맞지만, 받아 보지도 않고 이런 거라고 표현하는 건 나한테 예의가 아닌 것 같은데. 재경 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사람이 어떻게 저런 우아한 표정으로 화를 낼 수 있을까? 재경은 침을 꼴깍 넘기고는 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는 어머님께서 아버님처럼 제게 돈을 주시는 줄 알았습니다. 제가 실수를….”
아니다. 실수는 지금부터 하는 것들이 진짜 실수였다.
“오호라. 고 회장님한테 돈은 충분히 받았으니까, 내 돈은 필요 없다. 이런 건가요? 그래요?”
“아, 아니요! 그럴 리가요! 그러니까, 돈은 거래가 끝나면 받아도 늦지 않을 것 같단 거죠. 네.”
미간을 구긴 정화가 돈 봉투를 테이블 위로 툭 내려놓고 재경을 보았다.
“거래? 차재경 씨 지금 나한테 거래라고 했어요? 차재경 씨가 부회장을 두고 거래할 수 있을 만큼 능력 있는 사람인 줄은 몰랐네.”
정화의 말에 재경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갔다. 그냥 숨이 막히는 정도가 아니라 질식할 것 같았다. 도결이 제게 했던 말은 분명 사실에 가까웠다. 고 회장이나 김 대표나 전부 자신들의 선택을 강요하는 사람들이었다.
재경은 일단 돈을 받는 게 옳다고 급히 판단을 바꿨다. 돈을 받은 뒤에 도결에게 다시 돌려주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냉큼 흰 봉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생각해 보니까 제가 너무 건방졌던 것 같아요. 받겠습니다, 주세요. 제가 이 돈을 꼭 받아야죠. 네. 감사히 잘 쓰겠습니다.”
재경이 급하게 흰 봉투를 챙기자, 정화가 씩 웃었다.
“그 녀석이 힘들게 할 때마다 그 돈으로 쇼핑을 좀 해요. 스트레스는 풀고 살아야지.”
“네?”
“내가 아들을 잘못 키워서 차재경 씨가 앞으로 좀 힘들 거예요. 많이.”
세상에. 재경은 자신의 귀로 듣고도 놀라워서 눈을 끔뻑였다. 정화는 슬쩍 제 시어머니를 보면서 웃었다.
“어머님도 한 말씀 하세요. 기대하셨잖아요, 손자며느리.”
그러자 도결의 조모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만지작거리다가 재경을 보았다.
“크흠. 아까 얼핏 들어 보니 거래라는 말을 하던데. 어떻게 된 일인지 좀 설명할 수 있겠어요?”
재경은 빠르게 정화의 눈치를 보았다. 이 거래를 누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알 수가 없는 탓이었다. 그러나 정화는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재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황한 재경이 고개를 빠르게 돌렸다. 일단 말을 아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 그게. 제가 말이 헛나왔습니다, 할머님.”
그러자 정화가 피식 웃었다.
“우리 어머님 앞에서 농담도 하고. 제법이네. 첫날부터.”
정화의 말에 재경이 눈을 끔뻑였다. 도결에게 말려드는 것은 정말 보통의 맛이었다. 그의 모친과 조모는 그녀를 매운맛으로 강하게 압박하고 있었다.
“제가 고도결 씨와 함께 밤을 보냈습니다. 우연히 사진이 찍혀서 아버님이 1년간 혼인신고를 하라고 하셨어요. 돈도 많이 제안해 주셨습니다. 분에 넘치는 제안이라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요? 솔직해서 보기 좋네요. 난 솔직한 사람이 참 좋더라.”
그의 모친은 정말이지 너무나 차분했다. 반면 조모는 부들부들 떨었다. 곧 얼굴이 가을 단풍처럼 울긋불긋해지더니 이내 재경에게 손을 뻗었다. 놀란 재경이 몸을 움츠렸으나, 예상과는 다르게 조모는 따뜻한 손길로 재경의 손을 잡았다.
“내가 아들을 잘못 키워서. 우리 손자며느리한테까지 상처를 줬네. 대신 사과하고 싶은데.”
“네?”
“우리 때는 첫날밤을 보내면, 아무 조건도 따지지 않고 결혼하던 시대였지.”
조모의 말에 의하면 재경의 첫날밤은 무척이나 귀한 것이었다. 도결의 조모는 어쩔 수 없이 결혼하게 만든 것은 미안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마음 편히 먹고 결혼 생활을 즐겨 보라는 식의 이야기도 덧붙였다.
“그렇지만 고 회장님께서….”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해요. 차재경 씨는 그냥 그 녀석이랑 진짜 결혼 생활을 좀 즐겼으면 좋겠어.”
그의 모친이 이 모든 것을 아주 간단하게 정리했다.
“1년 안에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면, 계약은 무효로 하는 게 어때요?”
“네?”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요? 혹시 두 사람 마음이 변할지도 모르고.”
재경은 절대 마음이 바뀔 일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결혼을 앞둔 예비신부들은 스드메를 알아본다고 난리라던데, 자신의 결혼식에서 그녀가 준비한 건 한 개도 없었다. 백 비서의 총괄로 모든 것은 빠르게 준비되었다. 드레스부터 티아라, 귀걸이나 목걸이, 반지도 전부 재경이 선택한 게 없었다.
재경은 거울 앞에 앉아서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평소 다크서클만 가리던 화장과는 완전히 달랐다. 피부에서 광이 나는 걸 보던 재경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돈이 좋긴 좋구나.”
“아이, 행복한 날엔 유난히 더 예뻐 보인다잖아요. 신부님은 제가 본 신부님 중에서 가장 예쁘세요.”
“아이, 부끄럽게 뭐 그런 과찬을 하세요.”
그녀가 메이크업을 담당한 직원에게 너스레를 떠는데, 도결의 목소리가 등 뒤로 들려왔다.
“드디어 결혼하네요. 우리가.”
재경이 놀라 앞을 보자, 거울 속으로 도결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마치 화보를 찢고 나온 모델처럼 완벽했는데 어째 분위기가 신랑이 아니라, 영화를 찍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