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60)

<9화>

지나치게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재경은 심장이 벌렁거렸다. 이런 걸 플러팅이라고 하는 건가 싶었다.

“나는… 뭐 고도결 씨가 잘생기기도 했고.”

“그럼, 나랑 결혼해서 내 얼굴 뜯어먹고 사는 건 어때요?”

“풉.”

물을 삼키려던 재경이 입 밖으로 물을 뿜어내며 그를 보았다. 물에 젖은 그가 천천히 손수건을 꺼내 자신의 얼굴을 닦았다.

“진짜 나랑 결혼해도 괜찮겠어요?”

재경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그에게 묻자, 도결이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말했잖아요. 마음에 든다고.”

“고도결 씨, 진짜 이상하네요. 얼마나 봤다고 결혼까지 생각하는 건지. 후. 그래요. 까짓것 해 봅시다. 결혼 생활.”

호탕하게 말하는 재경을 보면서 도결이 불쑥 자신의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이건 무슨 카드예요?”

“결혼하면 한서일보는 퇴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어차피 이상한 사진이 찍혀 오래 못 다닐 겁니다.”

그의 말에 재경은 자존심이 상했다. 맨날 퇴사하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회사였지만, 분명 꿈을 이루어 준 회사였다. 이젠 그녀의 삶의 일부가 된 회사였으므로 쉽게 포기하는 건 싫었다. 

게다가 재경은 결혼한다고 회사를 그만둘 마음도 없었다. 요즘 누가 외벌이를 하나? 전부 맞벌이하지. 

단 한 번도 기자를 그만두겠다고 생각한 적 없었다. 재경이 손에 들고 있던 그의 카드를 콱 두 동강 냈다.

“고작 이 카드 한 장으로 내 인생 포기하라는 건가요?”

재경의 날카로운 시선에 도결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도 못 한 상황이라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 감이 안 왔다.

“한서일보가 차재경 씨의 인생입니까?”

“당연하죠. 저 같은 평범한 사람은 도통 이해할 수가 없네요. 평생을 열심히 공부해서 들어간 직장이 여기 한서일보거든요.”

도결은 자신과 생각이 같은 사람은 처음이라서 놀랐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직업에 걸지 않았다. 지금까지 진성그룹이 자신의 인생이었던 도결은 그런 재경의 생각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해요.” 

“네?”

반대가 심할 줄 알았는데. 그가 순순히 그녀의 편에 섰다.

“내가 지켜 줄게요. 차 기자님 인생.”

언젠가 재경이 주혁에게 했던 말과 비슷했다. 주혁을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았던 그녀에게 돌아온 건 배신인데. 도결이 재경이 했던 그 말을 고스란히 뱉고 있었다. 그간 주혁이 이런 기분이었겠다 싶었다. 고작 말 한마디인데 든든했다. 

*   *   *

며칠 뒤. 

재경은 뜨거워지는 스마트폰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한번 통화를 시작하면 도통 끊지 않는 엄마의 전화에 재경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네가 그러고도 내 딸이니? 동네 창피해서 내가 뒷산도 못 나가! 내 딸 결혼식을 나만 몰랐다는 게 말이 되니?]

“아까 미안하다고 했잖아….”

[이게 미안하다는 말로 끝날 일이야? 길 가는 사람 있으면 가서 잡고 물어봐! 자기 딸 결혼을 뉴스로 아는 사람이 어디 있나?]

“일부러 그런 거 아니라니까. 아까 말했잖아. 극비라고!”

[극비? 극비 같은 소리 하네. 너 어제 고 서방 올 때 왜 안 왔어?]

“고 서방? 하아.”

재경은 고도결이 얼마나 고집스러운 사람인지 몸소 깨닫고 있었다. 죽어도 집에 인사하러 가는 것은 싫다고 했더니. 혼자 재경의 본가에 인사를 다녀온 모양이었다.

“엄마, 나 좀 바쁘거든. 나중에 전화해요.”

전화를 끊고 스마트폰을 손에 꽉 쥔 재경이 고도결의 침실을 ‘쾅쾅’ 소리 나게 두들겼다. 안에서 반응이 없자 약이 바짝 오른 재경이 문고리를 잡고 멋대로 돌렸다. 

“안 나오면, 내가 포기할 줄 알고요!”

문이 활짝 열리자, 이제 막 샤워를 마친 그가 하체에 커다란 수건을 두르고 머리를 털며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오, 옷차림이 그게 뭐예요? 혼자 사는 집도 아니면서!”

재경은 손으로 눈을 가리는 시늉을 했으나 큰 의미는 없었다. 벌어진 열 손가락 사이로 그녀는 그의 몸을 훔쳐보고 있었다.

매끈한 피부와 굴곡진 복근, 탄탄하고 빵빵한 가슴 근육과 태평양만큼 넓은 어깨. 신이 그를 만들 때 조각을 한 게 아니었다. 이건 분명 예술을 한 것이다.

“침실은 혼자 쓰는 개인적인 공간으로 알고 있습니다. 멋대로 문을 연 건 차재경 씨고.” 

“알겠으니까, 그 오, 옷이나 빨리 입어요.”

“눈은 왜 가립니까? 처음 보는 것도 아니면서.”

그가 언제 다가왔는지, 비누 향을 풍기며 그녀의 손가락을 부드럽게 내렸다. 그 순간 재경은 정신이 혼미해졌다. 원나잇을 한 날이라고 변명하려던 것이 무색하게 온몸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재경의 손이 자석에 끌려가는 클립처럼 그의 뺨에 닿았다. 그의 촉촉한 입술이 조용히 그녀의 입술을 덮쳐 왔다.

*   *   *

귀가 터질 것 같은 소리를 내는 헬리콥터에서 내린 재경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뱉었다. 도결의 본가에 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재경은 어마어마한 크기의 저택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후. 긴장되는데.”

운동선수처럼 스트레칭하는 재경을 빤히 바라보던 도결이 고개를 돌렸다. 그도 가끔 숨이 턱하고 막히는 본가라서 재경에게 차마 긴장하지 말란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재경은 달리기를 준비하는 선수처럼 제자리에서 폴짝거리며 뛰고 있었다.

“그렇게 뛰면 발목에 발이 잘 붙어 있겠습니까?”

당황한 재경이 고개를 들어 도결을 보았다. 칼처럼 날카로운 슈트 차림의 그가 삐딱하게 재경의 발목을 바라보고 있었다.

“구두 신고 뛰면 발 아플 것 같은데. 괜찮습니까?”

평범한 말도 그가 하면 굉장히 특별하게 느껴졌다. 살짝 구겨진 도결의 표정을 보면서 그녀의 뺨이 붉어졌다.

“습관이 나왔달까요. 하하. 평소에 운동화를 즐겨 신거든요. 적응이 잘 안 되네요.”

어째 그에게 변명하는 꼴이 되어 가는 분위기였다. 재경은 말을 하면 할수록 늪에 빠지는 것 같아서 입을 꾹 닫았다. 은근히 그에게 말려드는 기분이었다.

“구두 신고 걸을 수 있어요?” 

“네?”

“여기서부터 좀 걸어야 하는데. 아까 차재경 씨가 발목을 함부로 썼잖습니까? 이렇게.”

그가 재경을 따라 흉내 내며 제자리에서 ‘탁탁’ 뛰었다. 부끄러워진 재경이 그의 팔을 잡으며 말렸다.

“그만, 그만해요! 좀 걷는 건 괜찮아요.”

그러자 그가 조용히 휴대전화를 들어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조금 뒤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검은색 차량이 보였다. 

당황한 재경이 눈을 끔뻑거렸다.

“뭘 이렇게까지 해요?”

그의 단단한 품에 안기자 부끄러워지는 건 재경의 몫이었다. 그런 재경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안아 올린 그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러게요. 이렇게까지 하게 만드네요. 차재경 씨가.”

민망한 재경이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   *   *

뒷자리에 탄 두 사람은 살짝 떨어져서 앉았다. 조금 걸어야 한다고 표현한 것과 달리 차는 꽤 오랫동안 달렸다.

“아, 어머님은 어떤 분이세요? 검색해도 그런 건 안 나오길래.”

재경은 자신이 질문해 놓고 너무 바보 같아서 눈을 질끈 감았다. 애초에 부모님 정보가 인터넷에 나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됐다. 누가 그런 것을 검색하겠는가? 

생각해 보면 너무 당연한 것들이 그와 함께 있으면 전혀 당연하지 않았다. 

그의 이름을 딱 한 번만 검색해도 셀 수 없이 많은 정보가 흘러나왔다. 사소한 것부터 사적인 부분까지 예외는 없었다. 

간혹 그가 나온 학교라든가, 입사 시기, 그가 가지고 있는 일화 같은 것들이 기사로 작성되기도 했다. 무려 이백 페이지가 넘도록 가득 차 있었으니, 그의 인기는 실로 대단했다.

‘그래도 실수한 거겠지?’

슬슬 눈치를 보는 재경을 빤히 내려다보며 그가 입을 벌렸다.

“김 대표님은 본업을 좋아하세요.”

“예?”

그의 눈썹이 잠시 일렁거렸다. 

“아, 회장님, 대표님 하는 게 더 익숙해서요.”

도결에게 ‘고 회장님’과 ‘김 대표님’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은 많았는데, 그의 부모님에 대해서 질문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런 호칭이 익숙하시구나. 역시 재벌가는 좀 특별하게 부르네요.”

“평범하세요.”

그의 가족들은 언론에 노출이 많이 되어 사소한 것들까지 낱낱이 공개된 상태였다. 다만, 그의 모친에 대해선 정보가 많지 않았다.

“호텔이 되게 근사하던데. 어머님도 엄청 아름다우시겠죠?”

재경의 질문을 들은 도결은 미간을 검지로 만지작거렸다. 

“꼭 어떤 분들인지 알아야 합니까?”

재경이 자신의 가족에 대해 궁금해할수록 도결은 불편해졌다. 얼마 전, 그녀의 본가에서 본 재경의 모친이 떠오른 탓이었다. 

밝고 유쾌한 성품으로 붙임성 있는 재경의 모친은 따스한 봄처럼 사람을 녹이는 분이셨다. 반면, 그의 모친은 가정보단 일이 더 먼저인 분이셨다.

그가 재경과의 결혼을 허락받기 위해 찾아왔다고 인사를 하자, 새빨간 눈으로 그를 한참 바라보던 재경의 모친이었다. 

큰 눈을 얼마나 오랫동안 부릅뜨고 계셨는지 모른다. 울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그 모습이 참 애처롭게 느껴져 저도 모르게 절절맸다.

두 사람이 혹시 결혼 전 속도위반을 한 게 아니냐고 물으시는 재경의 모친은 손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도결이 절대 그런 일은 없으니 안심하라며 달래자, 안도한 재경의 모친이 돌연 그를 와락 끌어안고는 고맙다고 말했다. 

살면서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라 고맙단 소리는 귀에 딱지가 생길 만큼 많이 들었다. 그런데도 그 많은 인사 중에 재경의 모친이 한 인사는 그의 가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의 손을 양손으로 잡고는 제 딸을 잘 부탁한다는 재경의 모친은 정이 가득해 보였는데…. 유감스럽게도 그의 모친은 재경의 모친과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제가 보기에 두 분은 비슷합니다. 딱히 다른 점을 설명할 게 없을 만큼.”

회사만 아는 고 회장님이나, 호텔 경영에 진심인 김 대표님이나 서로 다를 게 없었다. 오히려 너무 닮아서 동족 혐오를 하시는 모양이랄까. 

그래서 부친과 모친에 대해서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가면을 쓴 모습으로 쇼윈도 부부 행세를 하거나, 평소처럼 서로 이를 갈며 냉대하거나.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었다. 

다만, 재경이 그분들을 뵙고 어떻게 생각할지 그게 조금 신경 쓰였다.

“오. 금실 좋은 부부는 닮아 간다고 하던데. 되게 사이가 좋으신가 봐요?”

헛다리를 짚은 재경이 환상을 품자 그가 머뭇거렸다. 

처음 재경의 부친은 그를 경계하셨지만, 식사가 끝난 뒤에는 재경의 단점을 술술 털어놓으시면서 AS나 반품은 안 받아 줄 거니까 이 결혼을 꼭 신중하게 결정하라고 말씀해 주셨다. 

도결이 볼 때 금실 좋은 건 그의 부모님이 아니라, 재경의 부모님이었다. 

“그런 건 본인이 직접 겪어 보면 알 텐데요.”

차가운 그의 목소리에 재경이 머뭇거렸다.

‘사적인 걸 물어서, 화가 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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