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60)

<8화>

재경은 언제나 예리했다. 그건 기자로서 그녀의 재능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늘 사랑에는 헛발질했지만 일할 때만큼은 능력 있는 기자였다.

“오늘 오후 1시에 맞춰서 자극적인 기사를 내보낸다는 정보를 받고 급하게 내린 결정인 모양입니다.”

재경이 못 미더워하자, 도결은 고 회장 비서 팀에게서 팩스로 받은 기사를 재경에게 내밀었다. 재경은 제 손으로 한서일보에서 쓴 기사를 확인하다가 눈이 커졌다.

“술 취한 여자 강간한 재벌 4세 A모 씨라니. 이건 노출이 안 될 텐데요?”

자극적이라는 그의 말은 조금도 거짓이 없었다. ‘JS 그룹 부회장 신제품 홍보를 위해 HS일보 기자와 호텔 방에서 뒹굴다’라는 제목의 기사도 함께 있었다. 진성그룹 경쟁사가 준비한 기사로 보였다. 물론 진성에서 겨우 막은 듯했지만.

“그래서 의아하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이 방법 말고는 딱히 다른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아, 그러니까. 고 회장님은 진성그룹이 잘 쌓아 놓은 이미지가 한순간에 추락할까 봐, 날 협박하신 거네요?”

그녀의 질문에 도결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차가운 깡통 로봇이 되기로 한 모양인지 다문 입술은 좀처럼 열릴 기미가 안 보였다. 

“어쨌든 미안해요. 같이 있자고 한 건 난데. 일이 이렇게 된 데는 내 탓도 있어요.”

인터뷰하러 나온 기자와 하룻밤을 보낸 가벼운 재벌 4세인 줄 알았는데. 맞선 상대로 오해를 하고 나온 거라면 약간은 말이 달라졌다. 

맞선남, 맞선녀가 서로 눈이 맞아서 하룻밤을 보내는 게 뭐 그렇게 큰일이라고. 도리어 진짜 맞선녀와 이런 일이 있었다면, 축복으로 끝날 일이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결혼 계약서를 작성할 필요도 없었겠지.’

그가 조용해진 그녀에게 다가왔다.

“비록 기한이 정해진 인연이지만, 부부로 지내는 동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딱히 그럴 필요 없는데요.”

재경이 철벽을 치며 거부하자, 그가 미간을 구겼다.

“3조 1항. 부부의 의무에 충실할 것. 전 부부 사이에 의무는 밤에 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차재경 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예?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그냥 겉으로만 부부 연기를 하는 거 아니었어요? 계약서 쓰면서 얘기했잖아요.”

“대부분 정략 결혼을 할 때 방금 본 계약서에 똑같이 서명해요. 다른 부부도 예외 없단 뜻입니다. 쇼윈도 부부로 지내면서 불안한 거겠죠.”

도결의 말에 재경이 눈을 끔뻑였다. 너무 자세하게 알고 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의심이 절로 생겼다.

“혹시 재혼이세요?”

“초혼입니다.”

“아, 그냥 난 고도결 씨가 이 계약서를 너무 디테일하게 아는 것 같아서요.”

그는 입을 닫았고, 재경은 슬쩍 몸을 뒤로 뺐다.

“어쨌든 전 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가끔은 다 끝낸 뒤에 생각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고작 몇 시간의 쾌락으로 일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어요. 조금 더 고민해 볼게요.”

재경의 말에 그가 고개를 숙였다. 

유년 시절부터 그에게는 유난히 가혹한 세상이었다. 의미 없는 작은 한숨에도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소문에 늘 휩쓸렸던 그였다. 

이번 일은 그에게도 작은 사건이 아니었지만 감당 못 할 정도도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색안경을 낀 사람들의 시선을 견뎌온 그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의 입방아에 오르는 일을 처음 겪는 재경을 깊이 헤아리지 못했다.

“나 때문에 그런 사진이 찍혀서, 미안합니다.”

*   *   *

도결은 본가에 와 혼자 앉아 있었다. 결재를 기다리는 직원들 기분을 온전히 느끼는 중이었다. 재경은 오전에 조금 더 생각해 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출근을 해 버렸고, 그는 혼자 남겨졌다.

“결혼식은 1월 1일에 해.”

고 회장의 말에 도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그간 고 회장이 시킨 일은 전부 그가 혼자서 독단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들뿐이었는데 결혼식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왜 대답이 없어?”

“새해부터 결혼식에 참석하는 하객들이 있을까요?”

“그래서 골랐어. 가장 묻히기 쉬운 날이잖아.”

흔적도 없이 식을 올렸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이혼하란 뜻이었다. 도결도 딱히 부친의 뜻을 거스를 마음이 없었다. 애초에 그에게 결혼에 대한 선택권이 있었던 적도 없었고.

“따로 더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무심한 대답에 고 회장이 인상을 찌푸리며 기침을 해 댔다.

“쿨럭, 한 차장은 어떻게 된 거래? 그날 호텔에 다녀갔다고 하던데.”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 한은화 차장과 대면한 적 없습니다.”

“그러게 쿨럭, 진즉에 만나 봤으면, 이런 일이 있었겠어? 사진도 안 본 거야?”

“바빠서 볼 시간이 없었습니다.”

결혼을 비즈니스로 생각하던 고 회장은 많이 분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아끼고 아끼던 결혼을 이렇게 서두르는 것을 보면 회사 이미지를 포기하기 싫은 거겠지.

“아무리 바빠도 결혼할 여자 사진 정도는 봤어야지!”

“네, 차 기자 증명사진 한 장 정도는 받아 두겠습니다.”

“내가 지금 차재경이 말한 거겠어?”

고 회장이 윽박지르는 찰나에 노크 소리가 들리고 사용인이 나타났다. 어색한 정적이 흐르고 사용인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뭡니까, 아줌마?”

“아, 작은 사모님께서 지금 서재에 들어오신다고 하셔서요.”

“그럼 전 그만 가 보겠습니다.”

도결이 꾸벅 인사를 하는데 문이 활짝 열리고 그의 어머니가 나타났다. 화려한 이목구비가 도결과 굉장히 닮아 있었다.

“어디 가? 너 때문에 들어왔는데. 잠깐 앉았다 가. 아줌마, 여기 국화차 한 잔만 가져와요.”

사용인이 나가고 서재는 다시 긴 침묵이 이어졌다.

“바쁜 사람 불러 놓고 무슨 짓이야?”

“어이가 없네. 바쁜 애는 당신이 불렀잖아요?”

“뭐? 어이? 쿨럭, 고 부회장, 지금 자네 모친이 나한테 어이없다고 한 거냐?”

“네. 그렇게 들리네요.”

도결이 마지못해 대답하자, 도결의 모친이 싸늘하게 미소를 지었다.

“누가 먼저 선을 넘었는지, 생각이라는 걸 좀 해요.”

“뭐라는 거냐, 네 모친이? 쿨럭.”

“저는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집에 차 기자 혼자 있어서요.”

그의 말에 고 회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진짜 살 비비며 살 여자도 아닌데, 너무 지나치다 싶은 표정이었다. 반면 모친은 눈빛이 달라졌다.

“부회장. 나 궁금한 거 있으니까, 일어나지 말고 좀 기다려. 재경 씨는 본가에 언제 데려올 생각이니?”

재경은 결혼식을 못 올리겠다고 버티는데, 그의 집에선 결혼식 날짜를 잡는 부친과 벌써 며느리 인사를 받겠다는 모친이 있었다.

“아직 상의 못 했습니다.”

“이왕이면 그 아가씨 집부터 먼저 다녀와. 기사 보고 많이 놀라셨을 거야.”

전혀 생각도 못 한 모친의 말에 그의 미간이 구겨졌다.

“쿨럭, 인사를 하려면 우리 집 먼저 해야지. 그 집구석에 뭐 볼 게 있다고 거길 먼저 가래?”

“하여간 배려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지. 너는 결혼해서 저렇게 살지 마라. 아, 그 아가씨 기자라며? 일은 계속하는 거니?”

도결은 대답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는 상황에 난감해졌다. 

“모르겠습니다.”

“직장 생활하고 싶어 하면 하라고 해. 요즘 시대는 맞벌이 많이 하잖니.”

고 회장이 눈을 번뜩이면서 제 아내를 보자, 모친도 질 수 없다는 듯이 고 회장을 노려보았다.

“무슨 소리야? 당연히 그만둬야지! 회사 이미지 생각 안 해?”

“그 고리타분한 사상은 아직도 못 깼나 보네.”

“진성의 명예만 아니면 당신이랑은 벌써 이혼했어.”

“미안하지만, 나도 어머님만 아니면 진즉에 고집불통인 당신과 이혼했을 거예요.”

“하아. 어머님만 아니면?”

“고 부회장. 지금 이거 잘 기억해 둬. 나중에 네 아버지가 그 아가씨랑 이혼하라고 하시거든, 진성의 명예 때문에 절대 못 하겠노라고 되돌려드려라.”

고 회장이 열 받아서 부들부들 떨자, 때마침 사용인이 국화차를 들고 나타났다. 그의 모친은 유쾌한 얼굴로 국화차를 받아 고 회장 앞으로 내밀었다.

“뭐야? 당신, 쿨럭. 지금 병 주고 약 주는 거야?”

“알잖아요? 내가 존경하는 우리 어머님이 당신을 끔찍하게 아끼시는 거. 기침에 효과가 있대요. 싫어도 마셔요. 당신 기침할 때마다 어머님이 눈치 보시니까 내 마음이 불편하잖아요?”

고 회장의 기분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도결의 모친이 서재를 나갔다. 도결은 가만히 국화차를 노려보고 앉아 있는 고 회장을 기다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재경 씨 부모님께 허락부터 받고 본가에 함께 인사 오겠습니다.”

“거참, 고작 일 년 같이 살 건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

“대표님 말씀이 맞는 것 같아서요.”

그가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 서재에서 나갔다. 남은 고 회장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기침을 해 대다가 찻잔을 들었다. 국화차 향이 은은한 것이 마음에 들기는 했다.

*   *   *

한 시간 뒤 도결은 본가에서 모친에게 들은 말을 재경에게 전했다. 

“허락은 무슨. 싫어요! 우리 집에 허락받으러 가는 거. 진짜 사위라고 생각할 것 아녜요.”

그러나 황당하게도 재경은 자신의 부모님께 인사 가는 것을 결사반대했다. 결혼을 혼자 몰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괜히 부모님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기분이라 싫었다.

“아직도 나랑 결혼하는 게 싫습니까?”

“고도결 씨가 싫은 게 아니에요.” 

주혁을 잊으려고 원나잇을 한 것이지, 결혼하려고 그런 일을 한 게 아니었다. 꼭 결혼해야만 하는 분위기가 부담스러웠다.

“헤어지는 날을 정해 두는 게 싫은 거예요. 난 그렇게 이별을 생각하고 시작하는 건 딱 싫다고요. 부모님도 상처받으실 거예요.”

“그럼, 진짜 결혼이라고 생각할게요.”

그의 단호한 목소리에 재경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둘 다 억지로 떠밀려서 하는 거잖아요, 이 결혼.”

“난 그날도 말했지만, 차재경 씨가 마음에 들어요.”

“내 이름도 몰랐으면서.”

코웃음 치는 재경을 보면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애초에 명함을 제대로 봤으면, 이런 일이 일어날 리 없었다.

“인연이라고 생각합니다. 닿을 인연이었으니까 만난 거 아니겠습니까?”

“악연이겠죠. 서로 곤란한 상황을 가져다준 것 같은데.”

“난 그날 우리가 잘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차재경 씨도 그래서 날 잡은 줄 알았는데.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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