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사진으로만 보았던 고도결 부회장의 집에 직접 들어왔다는 게 잘 믿기지 않았다.
호텔에서는 고 회장 비서의 도움으로 무사히 호텔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가 인터뷰에서 말했던 헬리콥터를 타고 함께 이동했다.
‘진짜 헬리콥터를 타고 다닐 줄이야.’
밖에 기자들이 너무 많아서 옥상으로 탈출한 셈이었다.
오전 11시.
백 비서라는 남자가 그의 집에 나타났다. 집 앞에 기자들이 깔려서 뒷문으로 겨우 들어왔다고 했다.
“결혼 발표 때문에 출시될 신제품이 관심 밖으로 밀려났습니다.”
“그래서 내부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제품 발표를 정해진 날짜보다 몇 개월 더 미뤄야 하지 않냐는 말이 돕니다.”
백 비서의 말에 고도결 부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생각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꼴이네요.”
신제품 발표가 늦어지면 좋을 게 없었다. 경쟁 업체에서도 곧 비슷한 제품을 내놓을 게 뻔하니 먼저 선두를 달리는 게 유리했다.
“네, 참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회장님께서 세안그룹보다 먼저 발표하라고 지시하셨었는데 말이죠.”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백 비서를 향해 재경이 얼굴을 내밀었다.
“글쎄요. 지금 곤란한 게 과연 진성그룹 신제품 문제뿐일까요?”
재경이 불쑥 끼어들자, 백 비서가 당황스러운 눈길로 재경을 보았다.
오전에 고 회장 비서 팀이 가져온 명품 원피스를 얻어 입은 재경은 한눈에 봐도 미인이었다. 그간 고도결 부회장 옆에서 한 번도 여자를 본 적 없던 백 비서였기에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 버벅거렸다.
“아, 어. 음. 안녕하세요? 사모님.”
“예? 사모님이요?”
경악하는 재경을 보면서 백 비서가 얼떨떨한 눈빛으로 도결을 보았다. 도움을 청한 것이지만, 도결은 무심하게 서류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제가 막 말씀을 많이 들을 만큼 고 부회장님과 친한 사이가 아니라서요.”
재경이 딱 잘라서 말하자 백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정정하겠습니다. 오늘 오전 기사에서 많이 봤습니다.”
“업무 시간에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백 비서님.”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하던 백 비서가 도결의 목소리에 천천히 입을 다물고 눈을 끔뻑였다. 재경은 한숨을 길게 쉬고는 도결을 쳐다보았다.
“저 부회장님, 이쪽도 중요한 할 말이 좀 있거든요?”
“미안하지만 지금은 제가 업무 중입니다.”
그가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무심하게 툭 뱉은 말에 재경이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재경도 직접 눈으로 보고 있어서 그가 일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요. 저도 무척 급한 일이라서요. 더는 양보할 수가 없어요. 딱 1분만 시간을 좀 내주시겠어요?”
재경이 지지 않고 그를 쏘아보며 물었다. 백 비서는 이 분위기가 낯설다 못해 두려워졌다.
고도결 부회장만 있어도 싸늘한 서재였는데. 그의 약혼자가 함께 있는 서재는 금이 간 유리 바닥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방해되니까. 1분 안에 말하고 나가 줘요. 부탁합니다.”
서늘한 그의 태도에 자존심이 상한 재경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대꾸했다.
“저기요. 나도 더 있으라고 해도 못 있어요. 지금 막 출근하겠다고 말하려던 참이거든요.”
“지금, 출근이라고 했습니까?”
도결이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다.
“예. 저도 직장인이라서 출근이 필수거든요. 게다가 지금 이상한 일에 휘말려서 굉장히 일이 밀린 상태랄까요.”
“출근이라니요? 설마 사모님 지금 출근하시겠다는 건 아니시죠?”
백 비서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 왔다. 재경은 당연한 질문을 하는 백 비서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비서님도 지금 출근하셨잖아요? 오늘이 휴일도 아닌데 당연히 출근해야죠. 저 잘리면 비서님이 책임지실 거예요?”
재경이 따져 묻자 고도결이 이마를 짚었다.
“백 비서가 차재경 씨를 왜 책임집니까?”
재경은 이 어이없는 상황을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었다.
“난 그런 뜻이 아니라.”
“책임은 내가 집니다. 결혼이란 건 그런 제도니까.”
“하, 회장님만 아니었어도 일어날 일 없던 그 결혼이요?”
퉁명스럽게 받아치는 재경을 보던 백 비서가 돌연 제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질문을 했다.
“그런데 어떻게 고 회장님께서 저보다 먼저 도착하신 걸까요?”
백 비서의 질문에 재경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는 전혀 모르는 이야기였다. 도결은 힐끗 재경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런 도결의 반응에 재경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부부 사이에는 비밀이 없는 거 몰라요? 책임만 아시고 매너는 없으시네.”
투덜대는 재경을 보면서 도결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호텔 직원이 새벽에 기자들을 먼저 발견했다고 하더군요.”
“아, 그럼 김 대표님께서 먼저 아시고 고 회장님한테까지 보고가 되었겠군요.”
“저기요. 여러분? 저도 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 주시겠어요?”
재경의 질문에 백 비서가 빠르게 설명했다. Blue blood 호텔은 도결의 모친이 운영하는 호텔이었다는 내용이었다. 워낙 조용하게 운영하고 있어서 기사화된 적이 별로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럼, 좀 이상하지 않아요?”
기자로 산 감이 있어서 알았다. 이건 좀 의문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기자들이 어떻게 스위트룸에 들어올 수 있었는지 의심스러웠다.
아무것도 모르고선 이렇게 적극적일 수는 없었다. 누군가 정보를 흘렸다는 것인데. 그럼 도대체 누가, 왜 이런 짓을 꾸몄냐는 것이 가장 핵심으로 보였다.
“어디가 이상한 거죠?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사모님.”
말끝마다 사모님이라고 말하는 백 비서에게 호감이 가지 않는 재경이었다.
“타이밍이 이상해요. 평소 흠이 없는 진성그룹으로 유명한데. 하필 기자들이 고도결 씨가 방을 잡은 날을 딱 맞춰서 나타난 점이 좀 자연스럽지 않잖아요?”
“듣고 보니 맞는 말씀이네요.”
“이건 분명히 누군가 원나잇 정보를 흘렸을 거예요.”
재경의 말에 도결이 달아오른 얼굴로 기침을 해 댔다. 백 비서는 도결과 재경의 사이에서 눈치를 보다가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고는 재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김 대표님의 깊은 뜻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깊은 뜻이라니요?”
재경이 되묻자, 백 비서가 빠르게 발을 빼며 달아났다.
재경과 눈이 마주친 도결이 눈을 깜빡였다. 목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모습을 보니 조금 더 골려 주고 싶었다.
“고 회장님은 어젯밤 일에 대해 서로 책임을 지라고 하셨는데. 전 좀 의아해요. 책임을 꼭 져야 하나.”
재경의 눈빛은 도전적이었다.
“아마 조용히 결혼하지 않으면 진성그룹 법무팀과 법정에서 만나게 될 겁니다. 사람들은 당신 말을 믿지 않을 테고.”
“안 믿으면 어때요? 내가 꽃뱀이 아니라는데.”
재경이 어이없다는 눈길로 그를 보았다.
“본인 명예에 흠이 간다는 생각은 안 하십니까?”
“요즘 원나잇이 판을 치는 세상이에요. 내가 아니면 아닌 거죠. 너무 조선 시대 마인드 아닌가요?”
“조선 시대 마인드?”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재경은 뻔뻔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근사한 남자랑 하룻밤 보낸 것으로 퉁 치면 되죠. 생각해 보면 그렇게 망신도 아니에요.”
“외국에서 자랐습니까?”
재경이 그의 고지식한 태도를 보며 혀를 찼다.
“아니요. 한국에서 태어나서 토종 한국인으로 자랐어요. 뭐, 한국에서 자라면 다 유교걸인가?”
정작 이렇게 말하는 재경도 실은 유교걸이었다. 오랜 짝사랑을 잊고 싶어서 몸을 내던진 것이지만, 후회는 없었다.
“도발하지 말아요. 지는 건 자신 없으니까.”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거예요. 내가 고도결 부회장이랑 잤다고 하면 다들 부러워서 비결 좀 알려 달라고 모일걸요? 에세이로 쓰면 돈도 좀 만지겠네요.”
그가 코웃음을 쳤다.
“그사이에 에세이까지 계획했습니까?”
“아니요, 요즘 세상에 내가 못 할 일은 없단 거죠.”
재경의 말처럼 요즘 세상에 안 되는 게 어디 있겠는가. 컴퓨터만 손에 있으면 안 되는 게 없는 세상인데. 그러나 도결에게는 안 되는 것들이 많았다.
“아까 최 비서가 준 계약서에 서명한 건 기억 안 나요?”
“아, 고 회장님이 지장까지 찍으라고 한 거요? 어떻게 기억을 못 해요. 여기 이렇게 흔적이 남았는데.”
그녀가 벌겋게 인주 흔적이 남은 엄지손가락을 들었다. 도결이 한숨을 쉬고는 재경을 보았다.
“아마 진성그룹을 상대로 승소하시려면 꽤 오래 걸릴 겁니다.”
“승소? 그게 여기서 왜 나와요?”
그가 방금 백 비서를 통해 받은 계약서 복사본을 재경에게 내밀었다. 글씨가 깨알 같아서 다 읽지 못하고 서명했는데, 그 계약서를 자세히 읽어 보니 문제 될 일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이건 완전 사기 계약서 아닌가요? 계약 해지를 하려면 10억을 내라니! 글씨로만 진성그룹이 을이지, 이건 그냥 내가 을인 계약서잖아요! 당신만 해지할 수 있단 소리 아니에요? 나한테 10억이 어디 있어.”
재경이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보았다.
“일이 이렇게 된 점은 나도 유감입니다.”
“당신이 정치인이에요? 유감은 무슨.”
“따지고 보면 어제 차재경 씨가 호텔 레스토랑에 있는 것 그 자체가 사기였습니다.”
단순히 인터뷰하러 나간 재경은 그의 말이 황당했다.
“지금 인터뷰한 게 아까워서 그래요?”
“난 어제 인터뷰하러 나간 게 아닙니다. 한서일보 한은화 차장과 맞선을 보기로 했는데, 그 자리인 줄 알았어요.”
재경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 모습은 마치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을 피하기 위해 찡그린 표정을 닮아 있었다.
“그러면 고 회장님은 왜 이 말도 안 되는 계약 결혼을 시키는 거죠? 원하는 며느리는 한 차장님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