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더니 부자간의 생각이 매우 유사했다. 재경은 멀뚱멀뚱 고준혁 회장을 바라보다가 이내 입술을 뗐다.
“오해하셨습니다. 저 산업 스파이 아니에요.”
대범한 태도로 나서는 재경을 보면서 도결이 손을 뻗었다. 처음에는 그가 자신을 말리려는 줄 알았지만, 다시 보니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도리어 고 회장의 시선에 그녀가 드러나지 않도록 가리고 선 느낌이랄까.
어쨌든 고 회장은 문을 열었을 때보다 더 떨떠름한 표정으로 지팡이를 쥐고 서서 재경을 노려보았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런 곳에 왔으면 뻔하지.”
“죄송하지만, 여기 오성급 호텔이에요. 제가 미성년자도 아니고 못 올 곳을 온 건 아닌 것 같은데요. 고 회장님.”
“나 참 기가 막혀서. 말대답을 누가 그렇게 꼬박꼬박하는 거지?”
“그거 너무 고리타분한 발상이세요. 유대인은 어릴 때부터 토론을 가르친다고 하더라고요. 참 이상하죠. 똑같은 말인데 누군 말대답이고, 누군 토론이고.”
재경의 뻔뻔함에 고 회장이 혀를 찼다. 고 회장은 억지로 밀고 들어와서 호텔 안을 살폈다. 그러고는 시트 위의 자국을 보며 입을 벌렸다.
“지금 보니 산업 스파이가 아니라 꽃뱀인 모양이고만.”
“아니요. 꽃뱀 아니고 원나잇이요. 보시다시피 제 첫 상대는 고준혁 회장님 아들분이신 고도결 부회장님인가 보네요.”
재경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도결을 보자 그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재경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고는 고 회장에게 말했다.
“너무 그렇게 저 미워하지 마세요. 어차피 이대로 사라지면 영원히 볼 일 없는 사람인데.”
고 회장은 발칙한 재경의 말에 피가 거꾸로 솟은 것처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허. 고 부회장, 설마 저딴 여자 말을 믿는 건 아니겠지?”
힐끗 재경을 내려다보는 도결의 시선이 차가웠다. 애초에 그에게 별다른 기대가 없던 재경은 손바닥이나 툭툭 털었다. 그러자 그가 살짝 몸을 틀어 재경을 제 등 뒤에 더욱 단단히 숨겼다.
“믿어요, 이 여자. 전 제가 경험한 것만 믿잖습니까.”
“뭐?”
당황한 회장이 더는 큰 소리를 내지 못했다. 도결은 자신의 샤워 가운을 움켜쥔 재경의 손을 부드럽게 잡고 고 회장을 보았다.
“생각해 보니까, 어제 제가 먼저 이 사람을 유혹했더라고요. 싫다는 사람 잡고 한 번만 해 보자고 애걸복걸했습니다. 취할 만큼 마시지 않아서 정확하게 기억합니다.”
일그러진 고 회장의 표정을 보고도 그는 무심하게 제 할 말을 끝까지 해냈다.
“하아, 미쳤군.”
“책임질 일이 있으면, 제가 지겠습니다.”
얼떨결에 그의 보호를 받게 된 재경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일어나자마자 꽃뱀 취급할 땐 언제고 지금 와서 자신의 편을 드는 그가 의심스러웠다.
“당장 밖에 깔린 기자들은 어떻게 처리할 거야? 지금 호텔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생겼어.”
그러자 스위트룸에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고 회장은 007 가방을 노려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요즘 소비자가 얼마나 똑똑한 줄 알아?”
갑자기 튀어나온 소비자 이야기에 재경이 고개를 기울였다. 항상 언론에는 관심 없는 척 굴던 진성그룹이 이토록 이미지를 신경 쓰고 있을 줄은 몰랐다.
‘관심 없는 척하는 쪽이 컨셉이려나.’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압니다.”
“아는 사람이 이래? 신제품 출시 앞두고 문제 만들면 어쩌자는 거야?”
“큰 문제 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다 불매 운동이라도 시작하면? 고작 매출만 반 토막 나오겠어?”
고 회장의 질문에 도결은 대답하지 않았다. 성미 급한 고 회장이 재경에게 두꺼운 손바닥을 척 하고 내밀었다. 재경이 가만히 서 있자 고 회장이 눈썹을 무섭게 올렸다.
“멀뚱멀뚱 서서 뭐 하는 거야? 산업 스파이도 아니고, 꽃뱀도 아니라며! 당장 명함 가져와.”
“아, 여기요.”
재경이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고 회장의 손에 올렸다. 한서일보 차재경 기자를 눈으로 훑은 고 회장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한서일보 사장 딸과 맞선을 보랬더니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여자랑 호텔 방에서 뒹굴다니. 한심해서 욕도 안 나왔다.
“차재경 기자?”
“네. 한서일보 경제부 차재경입니다. 산업 스파이 같은 건 절대 아닙니다, 절대.”
그녀가 손을 흔들며 단호하게 말하자, 고 회장이 미간을 구겼다.
“됐고. 당신이 저지른 일은 앞으로 꼭 책임져야 할 겁니다.”
“책임이라니요?”
“지금 내 아들과 이 호텔에서 결혼한다고 발표해 줘야겠어요.”
고 회장의 고집스러운 표정에 놀란 재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에? 제가 왜요?”
요즘 시대에 순결을 줬다고 결혼하는 머저리는 없었다. 재경이 도결의 등 뒤에서 벗어나 고 회장을 보았다. 고 회장은 싸늘한 표정으로 웃으며 그녀를 협박했다.
“전국에 꽃뱀으로 매장되기 싫으면, 조용히 결혼하는 게 좋을 텐데.”
“그렇게 따지면 회장님 아드님은 방울뱀이네요.”
“뭐? 무슨 뱀?”
충격을 받은 고 회장이 눈만 끔뻑이자, 재경이 허리에 손을 얹고 할 말을 끝까지 이어 갔다.
“마음이 맞아서 하룻밤 보낸 것뿐이에요. 그런데 이런 억지가 어디 있어요? 제가 왜 이번 일을 결혼으로 책임져야 하죠?”
“나 고준혁이야. 뒷일이 두렵지 않아?”
별꼴이다 정말. 재경은 그렇게 생각했다. 도결을 선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절대 이뤄질 리 없는 상대고, 원나잇을 했다고 떠들어도 세상 사람들이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을 상대였으니까.
“두려워도 할 수 없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걸 두고 협박하셔야죠. 돈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기사를 써 달라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결혼을 가지고 협박하세요?”
고 회장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재경이 조용히 제 목소리를 냈다. 그러자 도결의 고개가 절로 그녀를 향했다.
“왜요?”
“차 기자님이 마음에 들어서요.”
담백한 대답인데, 마음이 끌렸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대답이었다. 이렇게 거칠고 드센 여자를 보고서 마음에 든다니.
“부회장님도 취향 한번 고약하네요.”
그러자 고 회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시끄럽고! 일단 밑에 내려가서 결혼식 날 잡으러 왔다고 기자 회견부터 해. 기자들이 득실득실 몰려와서 그냥은 못 나가니까.”
고집스러운 고 회장의 말에 재경이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제가 하룻밤 함께 보내는 걸 동의했다고 기자들 앞에서 말할게요.”
그러자 고 회장이 황당하다는 듯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대한민국에 부모님이 안 계셔?”
“계시는데요?”
“그럼, 자네 사진 보면 좋아하지 않을 텐데. 감당할 수 있나?”
“사진이라니요?”
고 회장이 오른손을 들어 손짓하자, 최 비서가 슬쩍 휴대전화를 들고 나와 아까 기자들에게 찍힌 사진을 보여 주었다. 나체로 잠든 자신의 모습을 본 재경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 사진들 다 뭐예요?”
재경이 놀라자 도결의 안색이 나빠졌다. 눈치 빠른 재경이 도결을 쏘아보며 물었다.
“아는 눈빛이네요? 고도결 씨가 내 사진 찍었어요?”
“아닙니다.”
“그럼, 이 방에 누가 왔다 가기라도 한 거예요?”
불쾌한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재경을 보면서 고 회장이 혀를 찼다. 버럭버럭 우길 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고 부회장이 말 안 한 모양인데. 잘난 기자들이 와서 찍어간 거야. 이 휴대전화도 내가 돈 쥐여 주고 구해 온 거라고.”
화를 억누르는 고 회장을 보면서 재경이 도톰한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피가 통하지 않아서 하얗게 보이더니 곧 새빨갛게 피가 모였다.
“왜 그런 말을 이제 하세요? 전 당사자인데.”
재경이 고 회장을 쏘아보자, 고 회장의 눈매가 부드러워졌다. 이젠 제법 말이 통할 거라고 느낀 모양이었다.
“내가 아까부터 말했잖아. 기자들 깔렸다고.”
“제 일에 대해선 말씀 안 하셨어요. 특히 이 사진에 대해서는 더욱더 아무 말도 안 하셨죠.”
“이럴 줄 알고 사 왔어. 인간은 다 이기적이잖아. 자네도 이제 결혼 발표를 하고 싶어지겠지. 안 그래?”
고 회장의 말에 재경이 코웃음을 쳤다.
“제가 결혼한다고 발표하면 저 사진들을 전부 지울 수 있는 게 확실한가요?”
“내가 무슨 수로 지워? 대한민국이 언제부터 그렇게 독재할 수 있는 곳이었다고.”
재경이 그럴 줄 알았다는 눈빛으로 고 회장을 보자, 고 회장은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사진을 다 지우지도 못하는데. 제가 왜 그런 약속을 해야 해요?”
“자네는 기자라는 사람이 머리가 그것밖에 안 돌아가나? 쯧쯧. 결혼 앞둔 예비부부라고 발표하면 그 사진들은 그냥 범죄 사진이 되는 거야. 쓸모가 없단 뜻이지.”
고 회장이 몸을 돌리며, 최 비서를 향해 턱을 올렸다.
“딱 1년. 조용히 결혼 생활 유지하다 이혼해. 서로 나쁘지 않은 거래가 될 거야. 최 비서가 책임지고 계약서 가져다 줘.”
* * *
연예인도 아닌데 기자들이 그녀를 취재하겠다고 바글바글 몰려왔다. 심지어 사진을 찍겠다며 서로 난리라니. 긴장감에 몸을 떠는 재경과 달리 고도결 부회장은 미소를 띤 얼굴이었다.
몇 년 전 세금을 정직하게 내는 것을 시작으로 사회적 약자를 돕는 봉사 사진까지 찍혀 착한 기업으로 통하는 진성그룹의 후계자 고도결. 그가 자신의 결혼 상대라니 말도 안 될 소리였다.
최근에는 도결이 독립군 후손이라는 사실까지 밝혀지면서 그룹의 주가가 미친 듯이 올랐다. 흠이라고는 찾기 힘든 진성그룹의 유일한 후계자인 고도결 부회장과 자신이 결혼이라니. 도저히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때 그와 눈이 마주쳤다. 도결은 슬쩍 몸을 숙여 재경의 귓가에 입을 댔다.
“차재경 씨도 웃어요. 활짝.”
그가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에 재경이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분명 어제는 재경이 먼저 그에게 웃어도 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오늘은 입장이 정반대였다. 그는 재경에게 미소를 지으라고 은근한 협박을 하고 있었고, 재경은 억지로 미소를 만들고 있었다.
“읏고 이자나여. 그마내요. (웃고 있잖아요. 그만해요.)”
재경이 이를 악물고 활짝 치아를 보이며 도결을 팔꿈치로 살짝 쳤다. 그러자 그는 복수라도 하듯이 재경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며 다시 바짝 다가왔다.
“들키면 차 기자님이나 저나 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