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이윽고 호텔 벨이 울렸다. 그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벌컥 문을 열었다. 벨을 누른 사람이 백 비서라고 착각한 탓이었다.
그가 샤워 가운을 걸치고 문을 열었을 때, 눈앞에 보이는 건 백 비서가 아니었다. 몇 개의 카메라와 휴대전화가 먼저 눈에 띄었다.
“뭡니까?”
도결은 싸늘한 시선으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타인 앞에서 표정 관리를 못 한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카메라와 휴대전화를 들고 나타난 사람들은 스위트룸 안까지 침범했다. 그가 손을 뻗는 사이에 재경의 잠든 모습까지 찰칵거리며 찍어 댔다.
이토록 화가 나기는 또 처음이었다.
“무단 침입죄, 처벌이 생각보다 높을 텐데.”
읊조리는 그의 목소리에 그들이 하던 행위를 멈췄다. 도결은 사람들 틈을 비집고 재경의 앞에 섰다. 그러고는 카메라와 휴대전화를 차례로 빼앗았다.
“한서일보 사회부 기자입니다. 잠시 인터뷰 좀 하고 싶습니다.”
도결은 한서일보라는 말에 미간을 구겼다. 어제부터 계속 한서일보와 엮여서 엉망이 되는 기분이었다.
“진성그룹 고도결 부회장님이 술에 취한 여자를 끌고 호텔에 들어왔다는 제보가 있어서요.”
그가 사진을 지우다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변명이 허술하단 생각은 안 듭니까?”
다시 사진을 지우던 그는 재경의 얼굴이 보이는 사진에서 잠시 멈칫했으나, 그 사진도 빠르게 지웠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올바른 기업이었던 진성그룹의 고도결 부회장 맞으시죠?”
고의가 느껴지는 질문이었다.
“…….”
“술에 취한 여성을 끌고 오는 장면이 CCTV에 녹화되었을 것 같은데, 공개할 수 있으십니까?”
그는 마지막 사진까지 전부 지운 뒤 그들에게 기계를 돌려주었다. 불편한 기색으로 카메라를 받은 기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고도결 부회장님, 요즘 세상을 너무 만만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방금 지운 사진들은 얼마든지 복구할 수 있습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기자들의 질문에 그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 제보가 진실이라면 기자가 아니라 대한민국 경찰이 저 벨을 먼저 눌러야 옳지 않나?”
“그게 무슨 뜻이죠?”
“이 방에서 범죄가 일어났다면 제보가 아니라 신고가 들어갔어야 옳다는 겁니다.”
곧 경호원들이 달려와 기자들을 방에서 끌고 나갔다. 이 시끄러운 상황에서도 여자는 깨지 않았다.
“하.”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지만, 정적 속에서 ‘코로롱’ 코를 고는 소리가 들리자 믿을 수밖에 없었다.
‘마음에 든 여자가 하필 맞선 상대가 아니다?’
사진을 지웠다고 해도 별로 달라지는 건 없는 상황이었다. 그들 말처럼 전부 복구가 가능했다.
그때 또다시 벨이 울렸다.
살면서 오늘처럼 되는 일이 없는 건 처음이었다. 그가 문을 활짝 열자마자, 커다란 손바닥이 도결의 뺨 위로 퍽 날아왔다.
‘짜악.’
순식간에 그의 뺨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번에는 그의 부친인 고 회장이었다.
“하, 오셨어요.”
지금까지 도결의 일상에서 그가 예상한 오차 범위를 넘어가는 일은 몇 번 없었다. 그런데 벌써 오늘 하루에만 세 번째였다.
제 옆에 누워 있는 여자가 맞선 상대가 아니라는 것과 처음 그를 찾아온 사람이 백 비서가 아니라 기자라는 것, 두 번째 방문한 사람이 고 회장이라는 것.
전부 예상과 달랐다.
“깨워.”
고 회장의 말이 끝나자, 뒤에 서 있던 정장을 입은 경호원들이 여자를 향해 다가갔다.
평소의 도결은 고 회장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인형처럼 시키는 일을 묵묵히 해내던 그가 경호원들을 몸으로 막았다.
“아직 옷도 제대로 못 갖춰 입었습니다. 3분만 기다려 주십시오.”
“허. 지금 나더러 이 방을 나가라는 거냐?”
더는 말싸움하기 싫은 고 회장이 소파에 앉으려는데 그가 미간을 구겼다.
“설마 저 여자 옷 입는 것까지 전부 지켜보실 생각이셨습니까, 회장님?”
그의 질문에 고 회장의 눈썹이 매섭게 올라갔다.
“허튼수작 부리면 가만 안 둬.”
고 회장이 일부러 ‘쾅’ 소리를 내며 문을 닫는 바람에 자고 있던 여자가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그러자 밤새 자신이 탐했던 그녀의 둥근 가슴이 이불 사이로 힐끗 보였다. 그가 일부러 여자의 가슴을 가려 주려는 듯 휙 옷을 던졌다.
“흐업.”
옷으로 몸을 가린 재경이 부끄러웠는지 머뭇거렸다.
“2분 줄게요.”
“네?”
“옷 입는 시간, 2분 준다고 말했습니다.”
서늘한 그의 목소리에 재경이 눈을 비볐다. 자다 일어나서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도결이 손가락으로 왼쪽에 찬 손목시계를 툭툭 두드렸다.
“못 하겠습니까? 그럼 내가 2분 안에 속옷부터 블라우스까지 직접 입혀 주고.”
그의 차가운 목소리에 재경이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곧 그녀도 도결이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브래지어를 쥔 그가 다가오는 순간 그녀가 손을 번쩍 들었다.
“알, 알아서 입을게요!”
“잘됐네요. 옷 입으면서 몇 가지 질문 좀 합시다.”
어젠 재경이 질문을 하느라 바빴고, 오늘은 반대로 그가 질문할 것들이 많았다.
도결은 침대에서 등을 돌렸다. 재경이 옷을 입는 데 방해될까 봐 배려하는 모습이었다. 재경은 머뭇거리다가 급하게 속옷부터 입었다.
“…이름이 뭡니까?”
어제는 그녀가 한서일보 한 사장의 딸 한은화 차장인 줄 알았다. 보지도 않고 구겼던 여자의 명함이 뒤늦게 생각났다.
“차재경입니다. 한서일보 경제부 기자고요. 어제 명함을 드렸더니 구겼잖아요. 이렇게.”
재경은 그가 했던 것처럼 손을 우악스럽게 접었다. 그가 슬쩍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고는 미간을 구겼다.
“한서일보 기자, 차재경.”
재경이 그의 목소리를 못 듣고 자신의 블라우스 단추를 잠그려고 할 때였다.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온 그가 재경의 손목을 꽉 움켜잡았다.
“아, 왜 이러세요?”
놀란 재경의 눈이 커졌다. 빛에 반사된 재경의 눈동자가 유난히 밝은 갈색으로 보였다. 그가 집요하게 그녀를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산업 스파이입니까?”
너무 태연한 표정으로 질문을 해서 재경의 입이 절로 떡하고 벌어졌다.
“스파이요? 제가 어딜 봐서 스파이예요? 딱 보면 몰라요? 기자잖아요, 기자.”
“식사할 때 신제품 관련된 질문을 많이 했었던 것 같은데.”
“그건, 그냥 인터뷰였거든요?”
눈을 부릅뜬 재경은 결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만약 저런 표정이 연기라면, 전문 배우인 것이 틀림없었다.
“그럼, 왜 스위트룸까지 날 유인했습니까?”
“저기요.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라는 말이 있거든요? 어제 여기 끌고 온 사람은 내가 아니라 부회장님이잖아요. 난 이렇게 비싼 방 못 써요. 손 떨려서.”
말을 마친 재경이 빠르게 블라우스 단추를 잠갔다. 그녀가 막 치마를 입는데 도결이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근데 아침부터 왜 이렇게 급해요? 비싼 호텔 잡아 놓고서.”
“남자랑 침대에 있다가 부모님께 들켜 본 적 있습니까?”
고작 하룻밤을 보낸 사이에 묻기엔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었다. 재경이 고개를 저으며 침대를 가리켰다.
“어제 말했잖아요. 처음이라고.”
매트리스에는 그녀가 처음이었다는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화난 재경의 얼굴을 보면서 그가 골치 아프다는 듯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미안해요. 난 그런 뜻인 줄 몰랐습니다.”
곧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힌 재경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설마, 문밖에 부모님이 서 계신 건 아니죠?”
장난스러운 질문에 그가 코웃음을 쳤다.
“어떨 것 같아요?”
“하하하. 아까부터 진지해서 진짜 고준혁 회장님이라도 서 계신 건 아닐까 걱정스럽네요.”
그의 심각한 표정을 보던 재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농담했다. 그러나 도결은 여전히 싸늘한 시선으로 재경을 보았다.
“계시면 어떨 것 같습니까?”
재경은 벌겋게 부어오른 그의 뺨을 보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글쎄요. 원나잇이니까 딱히 상관없지 않을까요?”
대수롭지 않은 농담처럼 생각한 재경이 무심하게 대꾸했다.
“상관없다고 하니 다행이네.”
그가 미소를 짓자 재경이 몸을 움찔했다. 슬쩍 뒷걸음질 치던 그녀는 돌연 고개를 기울였다.
“근데 뺨은 왜 그래요? 누구한테 맞았어요?”
“별일 아닙니다.”
놀란 재경이 토끼 눈을 하고선 눈을 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 큰 남자가 뺨을 맞을 일이 많진 않을 듯한데.
“혹시 약혼녀… 있으세요?”
“기자가 확실하긴 합니까? 나 약혼녀 같은 거 없습니다.”
그가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재경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경제부 기자라고 해서 재벌 4세의 사생활까지 전부 알고 있는 건 아니거든요? 약혼녀가 없으시면 됐어요. 문 열기 무서우면 제가 열어 드릴게요.”
“됐습니다. 그냥 내 뒤에 가만히 서 있어요.”
그가 재경의 옷을 한번 눈으로 훑더니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열었다.
끼익.
재경은 문 앞에 도대체 뭐가 있길래 천하의 고도결 부회장이 저렇게 경직된 건가 싶었다. 곧이어 문이 열리자 언론에서나 보던 고준혁 회장이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진짜 아버지한테 들킨 거였어?’
고준혁 회장의 등장에 놀랄 대로 놀란 재경의 입이 쩍하고 벌어졌다. 넋을 놓고 선 재경을 보면서 고 회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돈은 얼마나 받았어?”
고 회장은 애초에 재경의 대답이 필요 없는 사람처럼 007 가방을 침대로 내던졌다. 겁에 질린 재경이 도결의 샤워 가운을 꽉 잡고 뒤로 숨자 고 회장이 더욱더 인상을 썼다.
“나랑 어디 한번 해보자는 거야?”
재경은 지난밤을 완전히 후회하고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더라면 절대 그를 붙잡진 않았을 텐데.
“저한테 묻는 것 같아서 말씀드리자면 전 누구한테 돈 받은 거 없습니다, 회장님.”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하는 재경을 보면서 고 회장의 미간이 보기 싫게 구겨졌다.
“돈이 목적이 아니면 더 위험하지. 어느 쪽에서 보낸 거야?”
“네? 어느 쪽이라니요?”
“뻔하지 않나? 산업 스파이쯤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