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방금 기자님이 차인 게 거슬리지 않는다고 하면.”
떨떠름한 목소리였다. 처음부터 그는 연애 따위에 관심이 없었다. 아니, 지겨운 감정 소모에 관심이 없다고 해야 옳았다. 어차피 정략 결혼을 할 생각이었으니 연애는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거짓말입니다.”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살면서 이토록 관심이 가는 여잔 처음이었다. 하필이면 다른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가 마음에 든다니. 아주 솔직한 마음으로는 이 모든 것이 불편했다.
진성그룹 후계자로 태어나서 자라 온 그에게는 사랑 없는 결혼이 너무 뻔하고 당연했다. 마치 대한민국에서 한글을 사용하는 데 이유를 대지 않는 것처럼 뻔하단 소리였다.
그에게 있어서 결혼은 비즈니스였다. 잘 맞는 파트너를 구하는 방식일 뿐이었고. 그래서 도결은 지금 이런 감정이 전부 처음이었다.
“역시 껄끄러울 것 같아서 물어봤어요. 저 같아도 껄끄러울 것 같았거든요.”
방금까지 울던 여자가 곶감 앞에 놓인 아이처럼 울음을 그치고선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재경의 표정이 전부 사랑스럽게 보였다. 그의 머릿속은 이대로 재경을 온전히 갖고 싶다는 생각들로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난 지금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요. 기자님이 마음에 듭니다.”
그가 낮게 읊조렸다. 와인 몇 잔에 얼굴이 붉어진 여자는 큰 눈을 끔뻑이다가 고개를 휙휙 저었다. 두 시간이나 지났는데도 술이 덜 깬 모양이었다.
“예?”
“혹시 아직도.”
오늘 처음 만난 이 여자가 마음에 들었다. 그에게도 그간 많은 유혹이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유혹에 대응해 준 적 없었다.
“그 남자가 생각나서 그래요?”
그랬던 그가 지금 눈앞에 있는 여자를 격렬하게 탐하고 싶었다.
“아뇨! 그렇다기보단….”
백 비서가 며칠 전 맞선 상대의 자료라면서 가져온 서류를 한 번이라도 제대로 펴 볼 것을 그랬다. 그때 읽어 보았다면, 여자에 대해 더 자세하게 알 수 있었을 텐데.
물론 고작 사진 몇 장과 여자의 성격 및 취향 따위가 의무적으로 적혀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런 정보들이라도 아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터뷰 중에 이러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싶어서요.”
도결은 그녀가 취했다고 생각했다. 크리스마스 아침, 느닷없이 일정이 바뀌었다는 백 비서의 문자에 그가 몇 년 만에 맞선을 나왔다.
시간이 곧 돈인 그는 크리스마스에 꽉 막힌 도로를 하늘 위에서 구경하며 호텔까지 헬리콥터를 타고 날아왔다.
“난 그쪽이랑 처음부터 인터뷰할 생각 없었는데.”
그의 차가운 반응에 여자가 당황한 듯 눈을 끔뻑였다. 이런 순진한 모습도 전부 그의 주변에 있는 여자들과 달라서 자꾸 눈길이 간다.
“말이 너무 심하잖아요. 그럼 오늘은 왜 나오셨어요?”
황당해하는 재경을 보면서 그가 미간을 구겼다.
호텔 레스토랑에서 본 여자는 베이지색 정장 차림이었다. 얼마 전 백 비서가 그에게 맞선 상대가 한서일보 사장의 여식이라고 브리핑하던 것이 떠올랐다. 이름은 한은화 차장. 그래서 명함을 구겼다.
누가 봐도 기자처럼 입고 나타난 모습이 의외여서 재미있었다.
“그쪽이랑 이러려고 나왔나 봅니다.”
“네?”
그가 여자의 도톰한 입술을 엄지로 꾹 누르다가 부드럽게 천천히 밀었다. 탱탱한 입술의 감촉이 그의 시선을 강탈했다.
“그러는 기자님은 왜 나왔어요?”
“저요?”
재경은 이 자리에 주혁 때문에 나온 사람이었다. 주혁을 빼면 더는 할 말이 없었다.
“모르겠네요. 제가 왜 여기 있는지.”
눈을 깜빡이는 여자는 진심으로 혼란스러워 보였다. 확신이 없는 눈빛을 보면서 그의 투쟁심이 불타고 있었다.
“여기 온 건, 그 남자랑 끝내려고 온 거 아닙니까?”
도결은 오늘로 이 지긋지긋한 맞선도 마지막이 될 거란 확신이 들었다.
“…….”
다시 또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재경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프러포즈하는 거 보고 울던데. 아닙니까?”
그가 싱긋 웃으며 재경을 보았다. 놀란 그녀가 눈을 끔뻑이다가 고개를 휙 돌려 도결의 시선을 피했다.
“윽.”
그가 재경의 턱을 부드럽게 감싸더니 이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도록 힘을 실었다.
“자, 피하지 말고 똑바로 봐요.”
그의 빨래판 복근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재경이 머뭇거렸다.
“나랑 할래요?”
스위트룸에 따라 들어왔을 때부터 그와 긴 밤을 함께 보낼 것이란 건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막상 짐작처럼 흘러가는 분위기가 조성되자 가슴이 떨렸다.
“……!”
“난 지금 그게 가장 궁금해서.”
그는 얄궂었다. 놀란 재경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정지된 영상처럼 멈췄다. 도결은 그 모습을 태연한 얼굴로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답해요.”
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하듯 여유로운 눈빛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따라온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온 것도 아니라….”
변명하는 입술에 꽂혀 있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빨리 원하는 대답을 해 달라는 재촉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날카로운 그의 눈빛에 재경이 입을 벙긋거렸다. 침을 꼴깍 삼키는 것마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그가 천천히 그녀의 귓가로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댔다. 뜨거운 입김이 닿자 재경의 온몸이 파르르 떨렸다.
“기회 줄 때 잡아요. 나 그렇게 쉬운 사람 아니니까.”
자신 있는 그의 목소리에 재경이 머뭇거렸다. 그때, 그의 입술이 재경의 귓바퀴를 부드럽게 핥았다.
“아아.”
저도 모르게 나오는 신음에 그가 웃음을 참았다. 그녀의 하얀 목덜미를 타고 그의 검지가 부드럽게 쇄골을 향해 내려왔다. 자꾸만 별것도 아닌 그의 손길에 신음이 흘러나왔다.
“한 번만 더 소리 내면 내 제안에 승인하는 겁니다.”
놀란 재경이 서둘러 그의 품 안에서 벗어나려고 손을 뻗었으나, 도결의 입술이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먼저 닿았다.
‘쵸옵’
재경이 어쩔 줄 몰라서 몸을 버둥거렸다.
“그런 게… 흣.”
도결은 기회를 놓치는 법이 없었다. 사업이란 원래 그런 것이라 배웠다.
맹수가 사냥하는 것과 같았다. 목표물이 약점을 보이면 그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고 숨죽였다가 단번에 달려들어 약점을 물고 흔들어야 한다. 그렇게 살점을 뜯어내는 것이 그들의 본능이었다.
“지금부터는 전부 승인받은 겁니다.”
다정한 그의 손은 거침없이 그녀의 블라우스 단추를 풀었다. 살짝 벌어진 크림색 블라우스 사이로 그녀의 여린 살갗과 하얀 브래지어가 보였다.
그가 못 참겠다는 듯 재경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파서 신음하며 벌어진 재경의 입술 사이를 그의 혀가 비집고 들어갔다.
상상도 못 한 상황에 재경의 사고는 이미 오래전에 멈췄다. 한서일보에 첫 출근을 하던 날 전철이 고장 났었는데, 지금 그때보다 더 난감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재경은 지금 그의 모든 것에 흔들리고 있었다.
“잠깐만요.”
그를 겨우 밀어낸 재경이 숨을 헐떡였다. 진성그룹 신제품 개발에 관한 인터뷰를 목적으로 이 호텔에 방문했다. 한서일보 이름으로 호텔 레스토랑도 예약했고, 계산도 개인 카드로 미리 했다.
재경은 완벽하게 마무리하고 싶었던 이번 인터뷰를 제대로 끝마치지 못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승인받은 건 원래 쉽게 되돌리지 못하는데.”
그녀의 허리를 꽉 끌어안은 그가 낮게 읊조렸다.
“그렇지만 전 기자고….”
“크리스마스에 누가 일을 한다고. 그만 나한테 집중해요, 기자님.”
하필 오늘처럼 구질구질한 날에 도결을 만난 건 행운이었다. 늘 그렇듯 초라하게 끝날 뻔했던 재경의 크리스마스가 그의 다정한 손길로 화려하게 바뀌었다. 그래서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도결을 밀어낼 수 없었다.
재경은 끝내 자신의 몸을 그에게 맡겼다.
* * *
스위트룸 창문 안으로 주황색 햇살이 가득 쏟아지는 아침이었다.
지이잉, 지이잉.
휴대전화 진동 소리에 깬 도결이 길쭉한 팔을 쭉 뻗었다.
[백 비서.]
어제는 그렇게 연락을 해도 받지 않던 백 비서가 뒤늦게 전화를 해 댔다. 오전 7시. 평소라면 벌써 출근했을 시간이었다.
“여보세요.”
[부회장님, 어제 외박하셨습니까? 계속 안 나오셔서 침실에 들어갔다 나오는 참입니다.]
백 비서의 멍청한 소리에 그가 미간을 구겼다.
“지금 호텔입니다.”
[네? 아니, 어쩐 일로 호텔에 다 계십니까? 어느 호텔로 모시러 가면 될까요?]
도결은 황당한 시선으로 제 휴대전화를 다시 확인했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백 비서 번호가 분명했다.
“어제 나한테 백 비서가 문자 보낸 거 잊었습니까?”
그의 시선은 자연스레 제 옆에 잠들어 있는 재경을 향했다. 이불 속에서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다시 한번 그의 욕구를 자극했다.
[예? 저는 어제 부회장님께 따로 연락드린 적 없는데요.]
그 순간 도결이 인상을 쓰며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프레임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나한테 급하게 맞선 장소와 시간 보낸 거, 생각 안 나요?”
[아니요. 전 어제 부회장님께서 푹 쉬라고 하셔서 전원 끄고 푹 쉬었습니다. 그런 업무 본 적 없습니다.]
도결이 휴대전화를 귀에서 떼고 문자 메시지를 다시 확인했다.
“어제 백 비서가 한서일보 한 차장과 맞선 일정이 바뀌었다고 문자 보냈었습니다. 당장 확인해 봐요.”
그러자 백 비서가 당황한 듯 조용해졌다. 잠시 긴 침묵이 이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떨리는 백 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회장님, 제가 혹시나 해서 확인했습니다만. 어제 부회장님께 따로 문자 메시지를 보낸 기록이 없습니다.]
백 비서의 말에 도결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확실합니까?”
[네. 오늘 중에 문자 기록 전부 뽑아서 올리겠습니다. 저는 제 이름 석 자를 걸고 절대 부회장님께 문자를 보낸 적 없습니다.]
백 비서의 말에 그가 길게 숨을 뱉었다. 도대체 누가 자신에게 문자로 이런 장난을 쳤는지 궁금했다. 덩달아 한서일보 기자라고 나타난 여자의 정체도 알고 싶었다.
“문자 기록은 나중에 확인하고 지금 당장 호텔로 와요. 나한테 좀 문제가 생겼습니다.”
[네? 문제요? 어디 다치셨습니까?]
그에게도 백 비서에게도 처음 생긴 일이었다. 그는 지끈거리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누르며 낮게 중얼거렸다.
“아니요. 지금 내 침대에 낯선 여자가 같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