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60)

<3화>

“인터뷰 중이잖아요. 그냥 갈 수는 없죠.”

프로페셔널한 대답과는 반대로 그녀의 눈빛은 당장 주혁을 따라나서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었다. 멍한 재경의 목소리에 그가 고개를 돌렸다.

“다음에는 크리스마스는 피합시다.”

“네?”

당황한 재경이 그를 돌아보자, 도결이 여기저기에서 프러포즈하는 모습을 둘러보며 혀를 찼다.

“주변이 소란스러운 건 딱 질색이라서요.”

태연한 목소리에 놀란 재경이 눈을 깜빡였다. 

‘다음 인터뷰가 또 있을까?’

그녀가 오른팔을 들어 눈물을 훔쳤다. 다음은 없었다.

이젠 주혁에게 이용당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일대일로 인터뷰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울고 있는 재경의 모습을 다 보고도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 시치미를 뚝 뗐다.

“메인 음식 나왔습니다. 식기 전에 돌아가죠.”

자리에 돌아온 두 사람은 와인 잔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도결은 잔을 비우지 않았지만, 재경은 하이패스를 지나가는 차량처럼 빠르게 와인을 들이켰다. 어느 순간부터 재경의 발음이 전부 뭉개지고 있었다.

“부회장님, 후… 술 좋아하세요?”

얼굴이 와인처럼 붉어진 재경이 그에게 물었다. 도결은 아파서 죽을 것 같은 표정을 하고도 용케 자신의 이야기는 한 번도 꺼내지 않는 그녀가 신기했다.

“술은 나보다 기자님이 더 좋아하는 것 같은데. 아닙니까?”

눈이 벌겋게 충혈된 재경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았지만, 도결은 굳이 제 입으로 피곤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일부러 귀찮은 말을 들을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오? 좀 이상하네요. 일이 힘들면 원래 술을 좋아하지 않나요? 왜 나만 마시지….”

재경은 혼자 술을 마시는 게 미안한지, 계속해서 술 이야기를 이어 갔다. 도결은 그런 재경의 뻔뻔함이 우습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했다.

“그런 경우는 좋아한다고 표현하면 안 되지 않나? 애초에 마셔야만 하는 상황이니까.”

AI 로봇처럼 표정 변화가 없는 도결을 보면서 재경이 고개를 기울였다. 와인 몇 잔에 몸이 점점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아. 그럼 저도 술을 별로 안 좋아하는 거네요. 그런데 원래 그렇게 잘 안 웃으세요?”

그는 재경을 집요하게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전 처음 들어 보는 말이었다. 다들 그의 표정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그가 자신들의 부탁을 들어주는가에만 관심이 있었지.

“회사에 피해가 될까 봐, 잘 안 웃습니다.”

이렇게 솔직하게 대답을 하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아니, 애초에 그가 누군가의 눈물을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다들 그의 앞에선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이거나 긴장한 얼굴이었다. 반면 재경은 슬퍼서 곧 쓰러질 것 같은 표정으로 그의 앞에서 위태롭게 버텨 내고 있었다.

“진성그룹 때문에 못 웃으신다고요?”

못 웃는다고는 안 했는데. 

도결은 눈을 동그랗게 뜨는 여자의 모습이 재미있어서 따로 변명하지 않았다.

“아닌데. 흐음… 고도결 부회장님이 활짝 웃는 사진이 신문에 실리잖아요? 그럼 진성그룹 이미지에 거대한 영향력을 끼칠 게 분명하거든요? 근데 왜 안 웃지?” 

“그런 말은 처음 들어 보는데. 사실은 기자님 사심이 들어간 말 아닙니까?”

“처음이요? 하. 세상 사람들이 전부 이상하네. 부회장님은 잘생겨서 웃는 게 더 예쁠 텐데, 분명!”

곧 ‘쿵’ 소리 내며 재경이 테이블 위로 쓰러졌다. 

놀란 도결이 주춤했다. 테이블에 머리를 박은 재경이 취해서 중얼거렸다.

“저 절대 취하지 않았어요. 절대 마음 아프지도 않고요. 짝사랑이었거든요. 이런 사랑은 사랑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절대 아프지 않아요.”

곧 재경이 흐느적거리며 팔을 올리는 모습에 뒤늦게 그도 재경이 취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자님?”

“…….”

그제야 도결은 재경의 와인 잔을 빼앗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가 손을 들어 직원을 부르고는 카드부터 빠르게 내밀었다.

“계산은 이 카드로 할게요.”

“저, 죄송하지만. 일행분께서 전부 계산하셨습니다.”

생각도 못 한 상황에 도결의 눈이 커졌다. 제 앞에 쓰러진 여자가 점점 더 마음에 들어서 곤란해지는 참이었다. 진성그룹 고도결이라고 하면 다들 밥을 사 달라거나, 커피를 사 달라 요구했다.

사실은 그도 그런 상황들이 더 익숙했다. 그러니까 그가 부모가 아닌 타인에게 밥을 얻어먹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호기심이 들끓었다. 처음 자신에게 밥을 사 준 사람이 술 취한 맞선녀라니.

“하.”

당황한 도결의 표정을 보면서 직원이 천천히 고개를 숙인 뒤 사라졌다. 도결은 제 앞에 쓰러진 재경을 노려보다가 이내 피식 웃고 말았다. 

“이렇게 취할 거면서 계산은 왜 먼저 한 겁니까? 속을 모르겠네.”

잘 보이려는 건지, 잘 보이기가 싫은 건지. 알 수 없는 태도가 그의 신경을 미묘하게 건드렸다. 그는 자리에서 고아하게 일어나 재경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고는 재경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아? 아뇨. 쓰읍. 저는 취한다는 말이 뭔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암요. 그렇고, 말고요.”

생각보다 더 따듯하고 여린 그녀의 몸이 그에게 닿자 도결은 작은 새를 품에 안은 것처럼 조심스러워졌다.

“그럼, 오늘부터 취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주 잘 알게 되겠네요.”

“흑흑. 절대 취하지 않았어요. 제가 실은 아파서 그래요. 많이 아파요, 제가.” 

놀란 그가 몸을 숙여 낮추자, 재경이 벌떡 일어나서 가슴을 쾅쾅 치며 울먹였다.

“여기가 너무 아파서 죽을 것 같아요. 흐어엉.”

미간이 절로 구겨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심장이 아프다?”

재경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삼키며 끅끅거리다가 이내 몸을 돌려 도결의 품에 와락 안겼다. 

“뭡니까?”

울고 있는 타인을 안아서 위로해 본 적 없던 그는 허공에서 손을 허우적거렸다. 이런 낯선 감정은 처음이었다. 

“으어엉.”

달콤한 향기가 나는 작은 여자가 품에 안겨 우는 것을 보자, 몸이 긴장으로 바짝 굳었다. 도결은 로봇처럼 삐걱거리면서 그녀의 등을 겨우 두드렸다.

“훌쩍, 부회장님.”

타인의 감정에 조금도 관심 없던 그가 난생처음으로 누군가를 진심으로 위로하고 싶단 생각을 하고 있었다. 

“네. 여기 있습니다. 말하세요.”

도결의 정장 조끼가 젖을 만큼 그의 품에 안겨 울던 재경이 돌연 머리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오늘, 저랑 같이 있어 주실 수 있어요?” 

황당해서 말문이 막힌 도결을 보면서 그녀가 다시 또 울먹였다.

“혼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훌쩍.”

*   *   *

Blue blood 호텔에서 현재 예약 가능한 방은 스위트룸 한 곳뿐이라고 했다. 그 소리에 도결은 곧바로 방을 잡고 재경을 끌고 올라왔다.

‘같이 와서 어쩌자고.’

그가 느슨하게 넥타이를 풀면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정리했다. 

‘약속 시간이 바뀐 것부터가 문제라면 문제겠지.’

재경과 스위트룸에 들어선 순간부터 도결은 입술이 바짝 말랐다. 처음 겪는 이 상황이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없고 황당했지만, 그렇다고 도로 물리고 싶진 않았다. 

‘한서일보 금지옥엽이라더니, 집에서 전화 한 통 없네?’

그의 시선이 조용한 그녀의 가방을 향했다. 지금까지 도결이 본 맞선은 평범했었다. 가볍게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고 일어나는 식이었다. 

오늘처럼 마음에 드는 맞선 상대를 만난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상대도 방금 차여서 다른 남자는 딱히 없어 보였다.

‘정략 결혼에 딱히 흠도 아니지.’

물론 눈앞에서 맞선 상대가 다른 남자 때문에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을 보는 건 거슬렸다. 그렇다고 여자가 싫어진 건 아니지만.

“마음에 듭니까?”

“흐음. 네. 푹신하고 좋아요.”

침대에 누운 재경이 낮게 중얼거렸다. 눈물을 흘리면서 대답하는 모습이 썩 마음에 들진 않았다.

‘첫 만남에 잠자리라. 그래, 딱히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으니까.’

보통의 정략 결혼이 그렇듯이 따로 마음에 둔 사람이 있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가 구태여 기분 좋지 않은 일을 먼저 꺼낼 필요는 없었다.

“…끄윽. 나쁜 놈.”

축축하게 젖은 눈이라든지, 찌푸린 표정이라든지 하는 것들이 거슬렸다. 도대체 그 많은 맞선 상대 중에서 왜 이런 여자가 마음에 들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화장 번진 것 같은데, 먼저 씻을래요?”

그의 질문에 재경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흐윽, 부회장님 먼저 씻으세요.”

세상을 전부 잃은 표정으로 대답하는 재경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으허어엉. 나쁜 놈.”

도결은 자신의 등 뒤에서 오열하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보지 말아야 할 것을 엿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럼, 제가 먼저 씻겠습니다.”

*   *   *

재경이 진정했을 때쯤, 도결이 샤워 가운만 걸치고 그녀의 앞에 등장했다. 마치 울음소리가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나온 것처럼 알맞은 시간이었다.

고도결 부회장의 모습은 화보가 따로 없었다. 탄탄한 가슴 근육에 붙어 있던 물방울들은 그가 움직일 때마다 굴곡진 근육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야릇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를 보면서 재경의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도 하나, 둘 말라 갔다. 

“부회장님?”

어두운 방 안의 은은한 주황색 조명이 스위트룸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가 야릇한 미소를 보이며 물었다.

“키스해도 됩니까?”

누가 먼저 시작했냐고 묻는다면, 분명 재경이 먼저 시작했다. 

함께 있고 싶다는 말은 재경이 먼저 뱉어 냈으니까. 그러나 누가 더 이 밤을 원했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당연히 고도결, 그가 더 많이 원했다.

“제가….”

그는 떨리는 재경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젖은 풀잎처럼 축축한 입술이 목소리만큼 떨리고 있었다.

“이런 일은.” 

거절하려는 재경의 눈빛을 보면서 그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었다. 

“…처음이라서요. 죄송해요!”

의외의 말에 놀란 그가 재경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태연하게 물었다.

“그럼, 처음으로 나는 어때요?”

애초에 그 흔한 연애에도 관심이 없던 그였다. 여자와 단둘이 방 안에 남는 것도, 마음에 든 맞선 상대가 생긴 것도 전부 처음이었다.

 애초에 호텔 레스토랑에서 칼질이나 좀 하다가 헤어질 요량으로 온 맞선이기도 했고.

“방금 차인 여자도 상관없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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