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사실 따지고 보면 재경이 너무 일찍 도착했다. 그러니까 고도결 부회장이 인터뷰에 늦었다고 볼 수는 없었다. 재경은 분위기가 싸해지는 것을 막고자 허둥지둥 손을 놓았다.
“실은 저도 도착한 지 얼마 안 됐습니다. 아, 여기 주문한 음식 좀 부탁드릴게요.”
당황한 재경이 자기소개도 잊고 웨이터를 향해 음식 이야기부터 꺼냈다. 도결은 서두르는 재경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오래 기다렸습니까?”
“아니에요! 오래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서 먼저 주문했어요. 괜찮으시죠?”
그러자 그는 반듯하게 자세를 고쳤다. 의외라는 눈빛이 스쳤다 사라진 것도 같았다.
재경은 누가 보아도 미인에 속했다. 큰 눈에 오뚝한 콧날. 도결도 그렇게 느낀 것인지 재경의 얼굴을 몇 번이고 곱씹듯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진짜 이런 자리가 처음입니까?”
그러자 스프링이 튀어 오르는 속도만큼 빠르게 재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벌 4세를 인터뷰하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그럼요!”
주혁 선배는 경제부 부장이니까, 몇 번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지만 재경에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너무 대놓고 티를 내는 건 기자 체면을 구기는 일이니까. 표정 관리부터 해야겠다.’
재경은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그를 향해 비즈니스용 미소를 지었다.
“크흠. 네. 저는 그럼 편하게 기자님이라고 불러 주세요. 저는 부회장님이라고 부르면 되겠죠?”
고도결 부회장은 이름처럼 고결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잘생겼다는 말로 다 표현하기가 아쉬울 정도로 근사했다. 진성그룹의 떠오르는 별다웠다. 애초에 진성그룹이라는 회사 자체가 온 국민에게 사랑받는 회사이긴 했다.
“아, 명함이.”
재경이 주섬주섬 명함을 꺼내 한서일보가 잘 보이는 쪽으로 내밀었다.
“여기요. 제 이름은….”
그가 재경이 내민 명함을 홱 받더니 읽지도 않고 구겼다. 그러고는 태연하게 자리에 앉았다.
“서로 알 만큼 아는 사이인데 구태여 시간 낭비하지 맙시다.”
구겨진 명함을 보면서 재경이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다짜고짜 명함을 구기는 고결을 보면서 재경은 그가 의외로 예의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표정 관리를 해야 하는데, 자꾸만 등에서 열이 났다. 속으로 참을 인 세 번을 그려 본 재경이 이내 한숨을 삼키고 의자를 끌어 자리에 털썩 앉았다.
“…….”
“…….”
그가 아무리 말을 아끼고 싸늘하다고 해도 기자인 재경까지 덩달아 멀뚱멀뚱 앉아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크흠. 크리스마스라서 길이 많이 막히던데. 오시는 데 불편하진 않으셨나요?”
일부러 공감할 수 있는 주제를 꺼냈다. 친밀감을 만들어 볼 요량이었다. 인터뷰를 잘하는 재경의 특별한 비법이었다.
“아니요. 헬리콥터를 타고 와서 막히는 것 없이 편하게 왔습니다.”
재경이 느릿하게 눈을 끔뻑였다. 공감하고 싶어도 절대 공감할 수가 없는 교통수단이었다.
“아… 헬리콥터.”
그렇게 대화에 공백이 생겼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싸늘한 정적을 뚫고 직원이 나타났다.
“즐거운 식사 되십시오.”
재경은 이 어색한 순간에 음식이 나왔다는 사실에 깊이 안도했다.
그녀는 자신의 앞에 놓인 샐러드를 포크로 꾹꾹 찌르며 머리를 굴렸다. 공감할 수 없다면, 상대가 관심이 있을 법한 주제로 호기심을 유발하는 것도 방법이었다.
“아, 내년 신제품 준비로 바쁘시다고 들었는데.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그녀의 질문에 도결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떨 것 같습니까?”
그가 재경을 향해 우아하게 질문을 되받아쳤다. 줄타기처럼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떨어지면 아찔한 상황….
“으음.”
재경은 조용히 그의 옷차림을 살폈다. 크리스마스인데도 완벽한 슈트 차림인 점이 특이했다. 뭐, 물론 재경도 정장을 골라 입었다. 이런 우아한 인터뷰는 생애 최초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까. 크리스마스에도 슈트를 입었다면 역시 일이 바쁜 게 아닐까 싶었다.
“짧은 소견으로는 정신없이 바쁘실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제 친구가 신제품 출시를 앞두면 항상 마케팅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고 하더라고요.”
슬쩍 친구 이야기를 꺼냈다. 자신의 의견에 힘을 실어 보려는 의도였다. 그러자 그가 미간을 구겼다.
“친구분이 마케팅 팀인 건 아니고요?”
별것 아닌 질문이었지만, 허를 찔린 탓에 놀란 재경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고등학교 동창인데 쭉 마케팅 쪽에서 일하고 있어요.”
“재밌네요.”
전혀 웃지 않는 얼굴로 도결이 재밌다고 말하자 재경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인터뷰를 계속해도 되는 건가?’
생각과 다른 대화가 오가는 탓에 재경은 자꾸 몸에 힘이 들어갔다. 긴장되면 누구나 그렇듯이 재경도 슬슬 목이 마르기 시작했다.
“큼. 혹시 제 친구가 고등학교 친구라서 재밌으시다는 말씀이신가요?”
“아니요. 이 대화가 재밌습니다. 유난히 제게 관심이 많아 보여서 흥미롭달까요.”
그의 말에 가시가 있는 듯했으나,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재경은 그가 더 화나기 전에 빨리 인터뷰를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달달 암기했던 인터뷰 질문들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줄을 이어 나왔다.
“푸아그라 계란찜과 와인입니다.”
식사하는 동안에는 말을 할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재경은 음식을 입에 넣고 씹으면서도 그에게 무슨 질문을 해야 좋을지 고민했다.
“아. 진성그룹에서 새로 나올 신제품은 지금까지 발표된 AI 그 이상이라고 하던데. 부회장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꽤 쓸모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돌연 재경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와인 잔을 잡았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던 재경도 괜히 목이 타서 슬쩍 와인 잔을 들어 갈증을 해소했다.
“이미 새로 나올 제품보다 훨씬 더 발전된 기술을 연구하고 있어요.”
그는 재경의 질문에 착실하게 대답했다. 재경은 그가 의외의 답변을 해서 놀란 참이었다.
“오. 그럼 새로 나올 제품을 뛰어넘는 기술이 있다는 거네요?”
재경은 진성그룹에서 앞선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빨리 공개하지 않는지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물론입니다.”
“그런데 왜 공개 시기를 늦추시는 거죠? 이번 신제품으로 선보여도 되잖아요?”
“글쎄요. 기자님은 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좋은 기술이 있으면 빨리 선보여야 하지 않을까요? 다른 기업들이 먼저 공개할지도 모르는데….”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는 재경의 목소리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안전성과 기능성을 더 연구해야 하는 단계라서 보류하는 겁니다. 새로운 기술이 추가되는 것만이 신제품의 기준이 될 수는 없으니까요.”
재경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다른 대답에 눈을 끔뻑였다. 생각해 보면 소비자는 당장 눈에 띄는 신기술을 더 따지는 편이니, 안전한 제품을 고민하는 부분은 기사를 쓰기 좋을 것 같았다.
“작년에 경쟁 업체에서 기계가 폭발했다는 기사가 있었던 것 같네요. 올해 SNS에서도 그런 영상이 좀 있었어요.”
그가 의외라는 시선으로 재경을 빤히 바라보자, 재경은 괜히 몸이 굳었다.
“그 영상은 저도 봤습니다.”
“그럼 진성그룹의 내년 신제품은 안전성이 더 강화될 거라고 보면 되는 건가요?”
재경이 싱긋 웃자 도결이 당황한 기색으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딱딱했던 표정이 느슨하게 풀리자, 재경이 환하게 웃었다.
“기능 추가도 충분히 했습니다. 그래도 출시 전까지는 안전 문제가 더 중시되어야 합니다.”
“아, 제 친구에게 잘 전해 줘야겠네요. 마케팅은 신기술 개발 다음이고, 신기술은 안전성이 확보되어야 한다고.”
재경은 긴장감에 계속해서 와인을 찾았다. 그러고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 * *
재경이 화장실 거울 앞에서 마주친 여자는 같은 여자가 봐도 미인이었다. 물론 재경을 깔보는 듯한 시선 때문에 신경이 쓰였지만….
“뭘 봐요?”
갑자기 예민하게 묻는 여자를 보면서 재경이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아니요. 안 봤는데요. 저 여기 거울 봤어요.”
재경이 서둘러 거울을 가리키며 미소를 짓자, 여자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이내 휙 나가 버렸다.
“어휴. 무서워. 간 떨어질 뻔했네.”
재경은 여자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일부러 천천히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주혁 씨….”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방금 만난 여자에게 반지를 내밀고 있는 익숙한 얼굴을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주혁 선배?’
놀란 재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분명 어머님이 편찮으시다고 들었는데. 한껏 멋을 낸 그의 모습은 어머니를 간호하다가 나온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선배?”
떨리는 재경의 입술은 애처로웠다. 여자의 갈매기 같은 눈썹이 매섭게 치켜 올라가는 것을 본 주혁이 재경의 눈치를 살폈다.
“어? 어, 재경이구나. 크흠.”
재경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여자가 이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주혁 씨, 아는 사람?”
“네. 대학 때부터 잘 따르는 후배예요.”
“아. 대학 후배.”
여자는 재경의 앞에서 주혁이 내민 반지를 당당하게 받았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재경을 힐끗 본 주혁은 여자의 눈치가 보였는지 서둘러 그녀에게 반지를 끼워 주었다.
“그만 가요, 은화 씨. 예약해 둔 곳이 있어요.”
“흐음. 나 이런 이벤트 좀 불편한데. 주혁 씨 후배분은 어때요?”
“네?”
눈물이 고인 재경의 눈을 보면서 여자가 미간을 구겼다.
“표정 보니까 후배분도 영 이런 건 취향이 아닌 모양이네.”
여자는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주혁과 재경을 바라본 뒤 몸을 돌렸다.
“한…은화 씨, 다음에는 절대 불편하지 않게 할게요.”
재경은 눈앞에서 다른 여자와 떠나는 주혁을 보고도 아무런 말을 못 하는 자신이 한심하고 답답해졌다.
주혁을 좋아한 것도 자그마치 5년이었다. 그사이에 재경은 주혁에게 열댓 번도 더 고백했었다. 주혁은 그때마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연애를 할 수 없다며 그녀를 타일렀다.
그랬던 그가 지금 다른 여자에게 프러포즈하고 있었다. 그것도 재경이 있는 이 호텔에서.
‘…사람 마음 이용하는 건 너무하잖아.’
재경이 주먹을 꽉 쥐고 주혁을 뒤따라가려던 찰나였다.
“설마 두고 가려는 건 아니죠?”
재경이 뒤를 돌아보았을 땐 고도결, 그가 서 있었다. 도결은 미세하게 미간을 구긴 채 재경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