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60)

<1화>

Blue blood 호텔 스위트룸.

은하수 같은 서울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침대 위에 있는 남녀는 아슬아슬하게 서로만을 바라보고 있어 창문 밖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부회장님.”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재경의 젖은 눈꺼풀이 바람에 나부끼는 마지막 잎새처럼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평범한 인터뷰로 장식될 줄 알았던 재경의 크리스마스가 네온사인을 켠 것처럼 화려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가슴은 크리스마스트리 가장 꼭대기에 올려진 뾰족한 별 장식에 긁힌 것처럼 따갑고 아프기만 했다.

“제가 울린 겁니까?”

도결의 우아한 목소리가 젖은 재경을 위로하듯 물어 왔다. 그의 단단한 가슴에 갇힌 그녀가 욕정으로 가득 찬 도결의 눈을 빤히 바라봤다.

“끄읍, 아니에요. 안 울어요.” 

“이런데도?”

그가 손끝으로 눈물을 콕 찍어 재경의 눈앞에 내밀었다. 그러자 재경이 고개를 세게 저으며 강하게 부정했다.

“눈물일 리가 없잖아요.”

“아, 절대 눈물이 아니다?”

“그럼요! 저는 어릴 때 전교생 앞에서 계주 뛰다 넘어져도 안 울었던 사람이에요. 그런 제가 울었을 리 없잖아요.”

재경의 말에 도결이 표정을 구겼다. 곧 커다란 그의 손이 재경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다정하게 닦아 냈다. 

“그럼, 지금 기자님 눈에서 흐르는 건 눈물이 아니고 땀인 겁니까?” 

“훌쩍, 예? 아, 말이 그렇게 되나?”

반듯한 그의 입술은 왜 거짓말을 하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재경은 그런 도결이 내심 마음에 들었다.

“그럼, 앞으로는 다른 사람 앞에서 땀 흘리지 말아요.”

분명 방금까지 양파를 잘게 다진 것처럼 눈도 마음도 아렸는데 그의 말 한마디에 피식 웃음이 튀어나왔다.

“저… 그런 건 제 의지로 될 게 아닌데요?”

그녀는 지금 자신을 뜨겁게 위로해 줄 수 있는 상대가 필요했다. 

“그럼 내 의지로 노력해 봐요. 좀 거슬리니까.”

괜한 죄책감에 그녀는 도결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주혁을 마음에 품고서 낯선 남자의 품에 안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게….”

그의 시선을 애써 피한 재경이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녀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도결이 그녀의 턱을 감싸고는 정면을 향하도록 만들었다.

“대놓고 피하는 건 싫은데.”

“제가 오늘따라 몸에 열이 많이 나서…. 지금 좀 별로죠?”

당혹스러워하는 재경의 머리카락을 곱게 넘기면서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땀 흘리는 얼굴이 마음에 들어요.”

“그러니까, 지금 이런 모습이 나쁘지 않다는 거죠?” 

“네. 나쁘지 않고 아름다워요. 아주 많이.” 

재경에게는 지금 다른 남자가 필요했다. 오랫동안 가슴에 품었던 남자를 떠나보내려면 극단적인 방법 말고는 없을 것 같았다. 그녀가 그의 샤워 가운을 부드럽게 움켜잡았다.

“아무한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을 만큼 아름답습니다.” 

“…고도결 부회장님도 아름다워요.”

붉어진 얼굴로 그녀가 조용히 속삭였다. 지금 그녀를 위로해 줄 사람은 오직 그뿐인 것 같았다. 

재경은 도결이 절대 이뤄질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게 가장 마음에 들었다. 진성그룹 고도결 부회장은 평범한 일반인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상대였다. 그런 그에게 위로받고 싶었다. 오늘 일을 영원한 비밀로 하고 싶었으니까.

“후회 안 할 자신 있어요?”

재경에게는 지금 주혁이 아닌 다른 사람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절대 후회할 이유가 없었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음은 계속해서 갈등하고 있었다. 결국, 재경은 떨리는 입술로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후회하게 될지 아닐지는.”

애매한 대답에 그가 싸늘한 눈초리를 했다. 밥상을 다 차려 줬더니 숟가락을 못 들겠다고 하는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재경은 슬쩍 그의 눈치를 보면서 머쓱하다는 듯이 웃었다.

“그럼, 기자님이 결정해요. 나랑 잘 건지, 말 건지.”

단호한 태도에 재경이 눈을 깜빡이며 도결을 바라보았다. 꿀꺽 침을 삼킨 그녀가 결심한 듯이 그를 꽉 잡았다.

“앞으로는 절대 후회 같은 거 안 하고 싶어요. 같이 있고 싶어요, 부회장님이랑.”

재경의 대답에 그는 기다렸다는 듯 만개한 꽃처럼 미소를 지었다. 탄탄한 그의 팔뚝이 재경의 허리를 꽉 감싸 안았다. 야릇한 분위기에 휩쓸린 재경의 뺨이 더욱 붉게 달아올랐다.

“지금부터 다른 것은 생각나지 않을 겁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최선을 다할 거니까.”

허스키한 그의 목소리가 의미심장했다. 

곧 뱀이 똬리를 틀듯이 그가 재경의 몸을 천천히 옭아맸다. 연애 한번 못 해 본 재경에겐 모든 것이 처음이라서 용기가 필요했다. 

재경은 눈을 질끈 감았다. 

“기자님.”

경고성이 짙은 목소리에 그녀가 몸을 움찔했다.

“네?”

“원만하게 계속하고 싶으면 눈 떠요.”

파르르 떠는 그녀의 몸을 빤히 내려다보면서 그가 미간을 구겼다.

“떨려서….”

“난 내가 누군가의 대체품으로 쓰이는 건 딱 질색입니다.” 

도결의 속삭임이 재경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대체품이라니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게 아니면, 눈 뜨고 똑바로 봐요.” 

재경이 질끈 감았던 눈에서 힘을 풀었다.

“지금 기자님이 누구 품에 있는지 확실히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말똥말똥 눈을 뜨고 있는 재경을 보면서 그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뜨거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느껴지자 재경의 몸이 점점 더 뜨거워졌다.

“저… 내키지 않으시면 그냥 가셔도 괜찮아요.”

떨리는 재경의 음성에 그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눈물에 젖은 청초한 얼굴과 육감적인 몸매. 전부 도결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안달 난 그와 달리 재경의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는 듯했다. 그 사실을 빤히 알아서 그런가? 도결은 자꾸만 불쾌해지려고 했다.

“내켜요. 그러니까 1초도 놓치지 말고 잘 봐요. 기자님이 선택한 나를.”

숨이 멎을 것 같은 긴장감에 재경의 입이 벌어졌다. 곧 그 틈으로 그의 입술이 닿았다. 

“흡.”

숨을 헐떡이며 입을 맞추는 재경을 보면서 그가 작게 웃었다. 그러고는 더욱 깊숙이 그녀의 입술 사이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똑같이 생긴 도형이 합동하듯 두 사람의 몸이 딱 맞아떨어졌다. 

“흣… 잠깐만요.”

돌진하는 그를 불러 세운 재경이 잘게 몸을 떨었다.

“우리… 계속해도 괜찮을까요?”

도결에게 물었지만, 사실은 그녀가 자신에게 묻는 말이었다. 인터뷰하는 도중에 이런 일이 일어나면 절대 안 된다. 그건 그녀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고도결 부회장. 그는 재경의 인터뷰 상대였다. 정확히는 주혁의 인터뷰 상대였지만….

“나한테 물었으니까, 내 선택을 따르겠다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지금부터 끝날 때까지 휴식 시간은 없어요.”

그 뒤 도결은 달콤한 사탕을 핥듯이 그녀의 눈물을 부드럽게 핥았다. 마른 눈가를 아쉽다는 듯이 바라보던 그가 이내 재경의 작은 입술을 한입에 꿀꺽 삼켰다. 

뜨겁게 달궈진 재경의 몸은 식을 줄을 몰랐다. 그렇게 천천히 그의 안에서 무너져 내렸다.

“……!”

그의 품에서 나오고 들어가기를 반복하면서 찢어질 것 같았던 재경의 마음이 조금 위로받았다. 재경은 끝내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고마워요. 함께 있어 줘서.”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짝사랑에 배신당한 상처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홧김이라고 해도 그녀의 감정은 확실했다. 

고도결 부회장,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 

고도결 부회장과의 인터뷰가 예상치 못한 결말을 향해 가고 있었다. 적어도 재경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   *   *

몇 시간 전.

신문 기자인 재경이 진성그룹 고도결 부회장을 만나게 된 건, 김주혁 부장 때문이었다. 

그는 재경의 대학 선배이자 한서일보 경제부 부장이었다. 그리고 재경의 오래된 짝사랑 상대였다. 재경은 주혁이 부탁하는 것은 늘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주혁의 곁에서 조금이라도 더 맴돌고 싶었다.

가정 환경이 어렵다는 주혁의 말에 흔들렸다. 그가 초고속 승진을 할 수 있도록 도운 이유는 그래서였다. 주혁도 그녀에게 마음이 있다고 믿었다. 

술에 취할 때면 자신에게 좋아한다고 속삭이던 주혁의 달콤한 목소리가 전부 진심 같았다. 취중 진담, 재경은 그 말을 몇 번씩 곱씹으며 버텨 왔다.

오늘도 주혁에게서 갑작스러운 문자를 받았다. 크리스마스라서 만나자는 연락인 줄 알고 눈치 없이 설렜다. 그러나 급한 일이 생겨서 자신 대신 인터뷰를 가 달라는 연락이었다. 

-인터뷰 장소는 Blue blood 호텔 레스토랑이야. 꼭 좀 부탁해. 재경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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