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이것도 욕심입니다. 라윤이를 챙기셔야죠.”
“이놈이야. 회사 물려받아야지.”
“아버지. 그런 말씀 없으셨잖아요. 당장 돌아가실 것처럼 왜 그러세요?”
라윤은 놀라 아버지를 뚫어지게 보았다.
“정말 어디 안 좋으신 거예요? 저한테 숨긴 거 있으면 말해 주세요.”
“죽긴 누가 죽어. 나 100살까지 살 거야. 너 결혼도 안 하려고 하고 언제까지 기다려? 후계자 절차 밟아.”
“감사해요, 아버지. 그렇지만 물려받아도 아버지가 옆에 계셔야 해요.”
“귀찮아. 너희들이 알아서 잘해봐.”
“잘 생각하셨습니다. 라윤이 잘할 겁니다.”
“믿어줘서 고마워, 오빠. 그래도 아버지처럼 무르게 오빠랑 사업하진 않을 거야.”
백 회장이 껄껄 웃었다.
“이제 내 딸답네.”
“어련하겠습니까.”
라윤은 고급스러운 만년필을 내밀었다. 한정판으로, 장인이 만든 만년필은 사려고 해도 6개월은 기다려야 할 만큼 구하기 힘들다고 했다. 가현은 옆에서 생일 선물을 보고 미안했다. 겨우 엉망인 케이크라니…….
가현의 표정이 어두웠다. 못난이 케익은 사람들 앞에 내놓을 수도 없었다. 오늘 함께 식사하는 두 사람에게 보여줄 수도 없는 모양새라 더 속상했다.
“가현 씨, 선물은 뭐예요?”
“아, 그게…….”
라윤의 질문에 가현은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렸다. 지한이 입꼬리를 올리고 대신 대답했다.
“그건 보여줄 수 없어.”
“얼마나 대단한 선물이길래 보여줄 수가 없어?”
“나도 처음 받아보는 선물이라서 뭐라 말은 못 하겠지만 써보면 분명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선물이 될 거라는 확신이 들어.”
“정말 말 안 해주려나 보내? 가현 씨도 말 안 해줄 거예요?”
“…….”
예쁘게 만들어진 큰 케이크를 나눠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세하게 말을 해주지 않아 라윤이 툴툴거렸지만 두 사람은 까다로운 지한이 만족할 선물이라면 보통은 아닌 선물일 거라 짐작했다.
그 자리에서 불편한 건 가현뿐이었다. 다음엔 제대로 선물을 준비하겠다 다짐했지만, 가현은 그때까지 몰랐다. 이후 지한의 선물은 고정될 예정이었다.
지한이 백 회장과 이야기하는 사이 라윤과 둘만 차를 마시게 되었다. 둘은 어색하게 커피만 마시다가 말을 꺼낸 건 라윤이었다.
“지한 오빠 옆에 있는 당신이 난 아직도 싫어요.”
“알고 있어요.”
그녀는 늘 당당했고 솔직했다. 그래서 아프지만, 부러 속내를 의심하지 않아 좋았다.
“하지만 가현 씨가 없어도 내가 아니라는 건 알겠어요.”
그녀는 원치 않는 현실이 마음에 안 드는지 예쁜 얼굴을 찡그렸다.
라윤의 입장도 이해는 갔다. 아쉬운 것 없던 그녀는 그와 함께 자라왔다. 그와 함께할 반려자로 모두가 그녀를 짐작했었다. 자신이 그녀에게는 가장 보기 싫은 존재라는 건 당연했다.
“차지한 잘 지켜요. 내가 넘보지 못하게 악연까지 인연으로 만들 정도로 견고한 사랑이라면 끝까지 지켜요. 나 가현 씨가 다시 물러나면 차지한 또 탐낼 것 같으니까요.”
그녀에게 고마웠다.
아프게 말했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여 가현을 떼어내려 하지 않았다. 그게 백 회장 밑에서 자란 그녀만의 자존심이자 룰이라 생각했다.
“백 본부장님 말에 상처받은 적도 많아요. 그래도 감사했어요.”
감사라는 말에 라윤이 설핏 인상을 썼다.
“늘 솔직하게 말해 주고 충분히 백 본부장님 정도면 저 같은 건 내칠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존중해 주셨어요.”
“그건 차지한을 알기 때문이에요. 그 남자만의 선을, 전 그걸 건드리고 싶지 않았을 뿐이에요.”
라윤은 커피잔을 내려놓고 핀잔을 했다.
“난 그 말 기분 나빠요. 승자가 여유 있게 할 수 있는 비하인드 스토리 같은 말이잖아요.”
가현은 라윤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라윤도 웃는 가현을 뚫어지게 보았다.
“차지한이 그 웃음에 빠졌나?”
“네?”
“아니에요. 아무튼 그 웃음도 마음에 안 들어요. 어린 여자의 무기 같잖아요.”
그녀는 지나치게 솔직했지만, 가현은 그녀를 미워할 수 없었다. 왜 차지한이 라윤에게 끝까지 나쁘게 하지 못했는지 알 것 같았다. 어쩌면 가현보다 마음은 여린 사람이라 생각했다.
백 회장과 라윤이 돌아가고 집은 다시 조용해졌다.
드레스룸에서 치장한 귀걸이를 빼며 가현은 미안함을 내비쳤다.
“미안해요, 지한 씨. 돈으로 할 수 있는 선물 말고 특별한 선물을 해주고 싶었어요.”
지한에게 사과하는 가현의 표정이 어두웠지만 지한은 어느 때보다 밝았다.
“난 선물 정말 마음에 들어.”
“나 살짝 자존심 상해요. 아침 미역국도 그렇고 너무 영혼 없이 고마워하는 것 같다고요.”
목걸이를 뺀 가현은 거울에 비친 지한을 원망스럽게 보았다.
지한은 앉아 있는 가현을 일으켜 손을 잡고 조용한 복도를 지나 걸었다.
“어디 가요?”
“모셔놓은 생일 선물 가지러.”
그와 주방에 들어갔더니, 가현이 만들어 놓은 케이크가 덮개가 덮인 채 그대로 있었다. 케이크를 챙겨 든 그가 미리 마련해 놓은 와인병을 챙겨 가현에게 주었다. 가현은 그가 건넨 와인병을 끌어안고 물었다. 지한의 속내를 알 수 없었다.
“케이크랑 이걸 가지고 어디 가는 건지 말해줘요.”
“우리 둘만의 생일파티.”
“알아듣게 말해줘요.”
“가보면 알아.”
지한의 큰 보폭을 가현이 종종걸음으로 따라갔다. 그는 정원을 지나 온실로 향했다. 정말 둘만의 조촐한 파티를 한다 생각했다.
별채 문을 열고 들어갈 때까지 가현은 그의 의도를 알지 못했다.
***
으읏.
부드러운 크림이 정점에 닿는 느낌은 유난히 자극적이었다.
그의 손끝에 떠진 크림이 풍만한 살결 위에 문질러졌다. 가현은 상체를 드러낸 채 그의 손끝에 희롱당했다. 거칠어진 숨이 오르내릴 때마다 크림이 얹힌 가슴께가 함께 오르내려 눈앞에서 먹음직스럽게 지한을 자극했다.
“내년에도 꼭 케이크 만들어줘.”
그의 혀가 하얀 크림을 핥을 때마다 가현은 신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었다.
“싫어요, 파티한다고 하더니 이렇게…….”
차마 그가 케이크로 가현을 먹어 치울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런 그가 더 기함할 소릴 했다.
“내년에는 틀을 만들어서 안을 크림으로 다 채우는 건 어때?”
“말도 안 돼. 절대 케이크는 안 만들 거예요.”
화들짝 놀란 가현이 그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그래도 가현은 불안했다.
그의 소망은 소망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만약 거절한다면 가현의 생일에 만들어 나타날 남자였다.
지한은 자신이 생각한 아이디어를 무척 흡족해했다.
머릿속으로 상상되는 야한 장면 때문에 온몸이 붉어졌다.
부드러운 살결에 더 부드러운 크림이 도포되어 그의 입으로 삼켜지길 반복했다.
두 사람의 몸이 크림으로 매끄럽게 엮여 들었다. 지한은 새로운 신세계를 만난 것처럼 눈이 반짝였다.
“생각보다 가현이가 잘 반응하는데.”
“싫어요. 이젠 안 만들어요.”
“걱정하지 마. 내가 만들어 올게.”
결국, 지한은 다음을 기약하며 매끄러운 몸을 포개어 빨아들였다. 낮은 목소리가 가현을 긴장시켰다. 지한은 밤을 하얗게 불태울 기세로 가현의 몸속을 유영했다.
자신보다 자신의 몸을 잘 아는 그였다. 생각지 못한 감각을 일깨워 그를 거부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신음을 흘리며 그에게 매달리게 했다. 이미 길들여진 몸이 그의 손길에 무너져 내렸다.
으음.
미끄러운 몸이 그의 자극으로 바르작거려 연체동물처럼 두 사람은 마찰했다.
크림으로 번들거리는 피부가 불빛에 반짝였다. 자극적인 소리가 더해져 색다른 정사는 한층 고조되었다.
“예상이 맞았어. 써보니 이것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어.”
그의 손에 문질러지는 살점이 다시 크림으로 범벅이 되고 그의 입에 삼켜졌다. 가현도 지지 않고 그의 몸에 묻은 가슴께 크림을 할짝댔다.
지한도 기분이 좋은지 신음을 흘렸다. 그 와중에도 지한은 가현의 은밀한 곳을 파고들었다.
지한이 자극하니 그 자극을 이기지 못하고 가현이 그의 살점을 물어댔다. 그럴수록 지한은 더 가현을 자극하길 반복했다.
“매일 케이크가 먹고 싶어져. 내일은 어때?”
“시…… 싫어요. 또 못해.”
울먹이는 목소리가 지쳐 있었다. 그를 골탕 먹이고 싶었지만 그를 더 자극하는 꼴이 되어 가현은 숨을 가쁘게 쉬며 도망치려 했다.
뒤에서 끌어 안아 움켜쥔 손안에서 가현의 살결이 부드럽게 미끄러져 문질러졌다.
“다음 이벤트에 하도록 해.”
그는 이 야한 케이크 먹기를 다시 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다음엔 케이크를 더 크게 만들자.”
지한의 사랑은 자극만큼 뜨거웠고 행복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는 법이었다. 시간을 잊은 야한 케이크 먹기는 그가 기약하는 다음을 더 두렵게 했다.
무뚝뚝하지만 그에게는 기대할 수 없었던 말과 행동들로 생일 밤은 길고도 버라이어티했다.
정신이 아득할 만큼 부드러운 것이 더 진저리나게 자극적이었다.
서로에게 길들여진 밤은 끝을 모르게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