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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아닌 행동으로 자신을 보내지 못한 남자. 자신은 울고불고 시간을 견딜 때 그는 말도 없이 속으로 울며 견디고 있었다. 온실 속에 갇혔던 어린 차지한처럼 그는 상처에 취약했다.
자신이 떠난다고 통보했을 때 서재 문 너머로 들리던 물건 부서지던 소리가 떠올랐다.
그가 아직도 자신을 놓지 못한다 생각하니 끝도 없이 파문이 일어 마음속이 요동쳤다.
“가끔 네가 지내던 작은 방에 우두커니 앉아 계신단다.”
교진의 말에 가현은 병원으로 달려갔다.
“차지한, 차지한 씨 어디에 입원했어요?”
병원 입원실을 확인했지만, 그의 이름은 찾을 수 없었다.
입원 명단을 확인하던 간호사는 모니터를 훑어 확인했다.
“퇴원하셨어요.”
“한 번만 더 확인해 주세요. 입원한 지 며칠 안 됐어요.”
그가 벌써 퇴원할 리가 없다고 생각해 간호사를 붙잡으니 짜증을 섞어 가현이 잡은 팔을 털어냈다.
“그런 분 없으세요. 지금 바빠서요. 비켜주세요.”
트레이 위 드레싱 도구와 치료에 필요한 여러 물건을 점검하고는 급하다며 복도 끝 입원실로 사라졌다.
그를 만나겠단 생각으로 정신없이 뛰어왔던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택시를 타고 고속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그를 만나야 한단 생각만 가득해 서울로 향했다.
저택 앞까지 달려간 가현은 막상 커다란 대문을 보자 머뭇거렸다.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멀찌감치 떨어져 그와 헤어질 때 하던 고민을 다시 되풀이했다.
지겹도록 수만 번 되뇌었던 ‘아버지 일을 잊고 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늘 그를 향하던 걸음을 멈추게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저택에서 떨어진 도로 코너에 서서 고민을 반복했다.
그와 만나고 겪었던 납치와 그가 겪은 이번 일까지 바람 잘 날 없는 일들이 두 사람 사이에 반복해 일어났다.
추운 겨울에 보슬보슬 비가 내렸다.
“이런 날씨에 비야.”
보슬비에 가현의 입에서 나온 한숨이 섞인 입김이 흩어져 내렸다. 애꿎은 비까지 내려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을 방해했다.
어쩌면 이게 악연이 아닐까 생각했다.
만약 눈감고 함께 한다고 해도 또 다른 일이 서로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까.
그가 이번 일처럼 다치게 된다면 이란 질문에 가현은 피가 말랐다.
상상한 일이 벌어진다면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가현은 비를 맞으며 돌아서 걸어갔다. 용기를 낸 마음을 접는 게 앞으로 생길 상처를 방지하는 방법이라 자신을 설득했다.
그를 보겠다 달려왔지만 그를 만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어, 두 사람의 인연이 크리스마스 이브날 지한이 다친 이후로 더 멀어졌다. 무슨 염치로 그를 볼까.
소리 없이 내리던 비가 차가운 공기와 만나 물안개를 피웠다. 느린 걸음에 생각은 환상 속을 헤매었다. 보슬비라도 겨울비를 계속해 맞으니 한기가 들 만큼 젖는 줄도 몰랐다.
늦은 오후, 온도가 내려가는지 싸라기눈이 되어갔다. 어스름한 오후 한적한 도로는 반쯤 눈이 된 비가 툭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인적이 드문 도로 옆 나무 위로 내려앉아 조용히 소리를 내어 몽환적이기까지 했다.
추운 날씨에 입에서 입김이 연신 나왔다. 저택 앞에서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 느리게 걸어가던 머리 위로 비가 멈췄다.
눈앞 시선에는 분명 싸라기눈이 톡톡톡 떨어지는데 머리 위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놀라 돌아보니 지한이 장 우산을 들고 서 있었다.
“왜 비를 맞고 다녀.”
“지한 씨.”
“감기 들면 어쩌려고 겨울비를 맞아.”
“갑자기 비가 와서. 이렇게 돌아다니면 안 되잖아요.”
무엇보다 그의 건강이 먼저였다.
“난 괜찮아.”
멀찌감치 선 자신에게 우산을 씌워준 지한은 반은 비를 맞고 있었다.
가현은 자신을 씌워주려고 맞고 있는 그에게 다가가 그가 비를 피하게 우산을 잡았다.
“지한 씨 환자예요. 이렇게 비 맞으면 안 돼요. 이미 반쯤 맞았잖아요.”
“그 잔소리도 오랜만이야.”
마음이 소란스러워 그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말을 피했다.
“누굴 만나러 왔는데 이렇게 가?”
“…….”
뻔히 알고 있는 질문에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만나러 왔으면 용건을 말하고 가야지.”
“몸은 괜찮아요?”
그의 질문에 곧바로 물었다. 줄곧 그가 악화했다는 말을 들을까 전전긍긍했다. 거기다 퇴원했다는 말에 더 걱정이 많았었다.
“그 말 듣기 좋네.”
“나 때문에 죽을 뻔했는데 웃음이 나와요?”
자신이 걱정한 것이 무색한 대답에 화가 나기까지 했다. 가현이 인상을 쓰고 지한을 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울 수는 없잖아. 그 말 하려고 왔어?”
“나 때문에 당신이 다쳤으니까.”
“그 이유 외에는 없냐고 물었어.”
지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듣고 싶은 말은 따로 있는 줄 가현도 알지만 조금 전 저택 문 앞에서 결론을 내렸다.
그가 다치는 걸 원치 않고 둘은 악연이었다.
“지한 씨 크게 다쳤어요. 그것만큼 중요한 문제가 어디 있어요. 퇴원했던데 정말 괜찮아요?”
“멀리서 온 너 우산 씌워 줄 정도는 충분히 돼.”
“옷 다 젖었어. 들어가서 갈아입고 가.”
교진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아무렇지 않게 생활하는 그가 왜 뒤로는 그러는 걸까.
“내가 쓰던 물건 정리 안 했다고 들었어요. 왜 안 해요?”
“흔적을 지운다고 없던 일이 되진 않으니까.”
저택으로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았다.
“저 그냥 갈게요.”
“이 꼴로 내가 어떻게 보내? 내 고집 알 텐데.”
그의 손짓에 뒤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차가 달려왔다.
“걷는 것도 힘들면서 왜 나왔어요?”
“교진이 유난스러워.”
가현이 피식 웃었다. 교진의 이야기에 그가 보고 싶었다.
“아버지 보고 싶네요. 제천 가고 한 번도 못 봤어요.”
“들어가서 만나고 가.”
그렇게 몇 달 만에 저택에 발을 들였다. 무엇하나 변한 것 없어 자신이 잠시 꿈을 꾸었나 싶을 정도로 똑같았다.
교진과 사용인들을 만났다. 반기는 그들은 하나같이 돌아왔냐를 물었다. 가현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예전 쓰던 방으로 도망치듯 들어섰다. 그때와 똑같이 편집숍 같은 물건들이 가지런히 주인 없이 정리되어 있었다.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둘러보았다.
“나만 변했나?”
자신이 이상한 것처럼 모든 게 똑같았다. 그때 다른 결정을 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았지만 되짚어봐도 다른 대안은 없었다.
가현은 옷을 갈아입고 추운 몸을 녹이고 나왔다. 지한이 가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마워요. 가볼게요.”
“정말 할 말 없어?”
“난 물을 게 있어. 그래서 제천에 갔었고.”
가현이 지한이 앉은 소파로 돌아섰다.
“뭐가 궁금해요.”
“그 남자. 그 남자 때문에 이후부터 노을을 보지 않았나?”
남자? 남자라니 가현은 알아듣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남자라니요?”
“노을을 마지막으로 보러 갔던 날 함께 노을 봤던 남자. 그 남자에게 마음이 있는지 묻는 거야.”
“네?”
가현은 지한의 설명에 생각이 난 그날 유난히 자주 마주쳤던 남자가 생각났다.
가현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지한을 보았다. 심각한 그를 보고 웃어버렸다.
자신은 심각하게 말했는데 가현이 웃으니 지한은 더 인상을 썼다.
“지한 씨, 질투해요?”
“질투? 그런 건 어떻게 하는지도 몰라.”
가현의 말에 어이없어하는 건 지한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심각하게 물어보는 지한 씨 표정, 지한 씨 말투, 지한 씨 질문 자체가 질투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인정하지 않는 지한을 보고 가현은 기분이 좋았다. 속도 없이 가현은 미련을 보이는 그가 좋았다.
자신 혼자 그를 잊지 못하는 게 아니란 건 교진을 통해 알았지만, 그의 말로 표정으로 보여주는 건 달랐다.
“그 질문이 왜 중요해요?”
“정가현 마음이 변했다면 나도 이젠 놓아줘야 하겠지. 그러니 정확히 대답해.”
“그렇게 쉽게 놓아줄 거면 제가 누군가 좋아하는 척을 할 걸 그랬나 봐요.”
“정가현.”
고압적인 말투가 가현의 생각을 질타하는 것 같았다.
“우연히 알게 됐고, 우연히 당신 때문에 힘들어하는 날 위로해 줬어요.“
지한은 알 수 없는 말만 하는 가현을 고개를 갸웃거리며 보았다. 미간은 펴지지 않아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그는 늘 결론을 말해달라 했던 남자였다.
“알아요? 가끔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 위로가 돼요.”
“아무것도 아닌 놈이 왜 노을을 같이 봐, 밤에 왜 같이 술을 먹고.”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가 왜 귀여운지 가현은 다시 웃었다.
“그 웃음 마음에 들지 않아 그러니 똑바로 대답해.”
“결론만 말하면요. 내가 노을 보는 시간에 그 남자는 운동을 했어요. 남자는 내가 노을 보는 걸 자주 보았고 난 그 사람을 몰랐어요. 그런데 다음날도 같이 노을 보자고 하더라고요.”
지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꼬시는 거였네.”
명백한 질투가 좋아 가현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렸다.
길들여지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