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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현의 비명에 밖에 있던 두 남자가 창고로 뛰어왔다.
머리에서 피가 흐르는 지한은 어지러운지 벽을 짚었다. 가현은 뛰어가 그를 살펴야 하는데 발이 얼어붙어 움직여지지 않았다.
“대표님! 괜찮으십니까? 119 불러.”
“개새끼.”
119에 신고하던 남자가 욕지거릴 하고 뒷문으로 뛰어나갔다.
충격이 컸는지 바닥에 주저앉은 지한의 머리에서 피가 멈추지 않고 흘렀다. 지한을 살피던 남자가 손수건을 꺼내 상처를 압박했지만, 손수건이 붉은 피로 젖어 들어 소용이 없었다.
가현은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수건을 챙겨 그에게 뛰어가 상태를 살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가현은 정신을 놓고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괜찮아.”
지한은 피를 흘리는 와중에도 가현을 안심시켰다.
가현이 손을 떨며 상처를 지혈하려 했지만, 속수무책으로 젖어갔다. 그의 얼굴과 옷을 적시고 지혈하던 수건마저 젖어 온통 피로 물들었다. 그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연락받고 온 구급대원들이 여러 가지를 물었다. 구급대원의 질문에 대답했지만,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인식도 못 했다.
반쯤 정신을 놓은 가현을 구급대원이 흔들었다.
“환자분 머리 쪽에 찢어진 상처 때문에 피가 많이 나는 겁니다. 머리에 난 상처는 원래 피가 많이 나요. 자세한 건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봐야 하지만 걱정부터 하지 마세요.”
“감사합니다.”
“안 타세요?”
가현은 구급차에 타지 못하고 주춤했다. 얼어있던 가현은 닫히는 응급차 문을 붙잡았다. 급하게 가현이 올라타자 응급차가 출발했다. 응급요원은 지한이 의식이 있는지 확인하며 응급처치를 했다. 가현은 온갖 신들께 도와달라 빌었다.
‘제발 지한 씨 살려주세요. 이 사람 살려주시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어요.’
입으로 ‘미안해요’를 중얼거려도 불안함은 잠재워지지 않았다.
응급실로 들어간 그는 여러 가지 검사를 거쳐 찢어진 상처를 봉합했다. 담당의가 가현에게 지한의 상태를 알려주었다.
“머리 쪽 상처는 5바늘을 꿰맸습니다. 각목으로 머리를 가격당했다고 했나요?”
“네, 맞아요.”
“다른 상처는 없고 맞은 부위에 피가 고이고 부은 상태지만 다른 문제는 며칠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더 안 좋아질 수도 있나요?”
놀라서 가현이 의사의 팔을 붙잡고 말했다. 가현의 손에 붙은 피가 담당의의 하얀 가운에 묻어났다.
가현도 놀랐는지 얼른 손을 떼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놀라셨을 텐데 손 씻고 마음 추스르세요. 환자분은 병실로 옮기고 깨어나시면 추가 검사하고 삼일 정도 지켜보겠습니다.”
침상에 누운 그는 평온해 보였다.
이렇게 편한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지한이 악몽을 꾸던 그때 외에 그가 잠든 걸 본 적도 없었다. 늘 깨어있었고 사람이 맞을까 싶을 만큼 그는 잠도 자지 않고 일에만 몰두하는 사람이었다.
그를 떠나오고 몇 달 만에 보는 모습이 하필 편의점에서의 불미스러운 일이라 애석했다.
가현은 잠든 지한을 우두커니 보다가 듣지 못하는 그에게 읊조렸다.
“잘 지냈어요? 가끔은 당신이 찾아올까 그런 상상을 하고는 했어요. 난 차가웠던 당신 손, 찡그리던 얼굴, 당신과 함께 봤던 노을을 매일 곱씹었어요. 당신은 내가 없던 그때처럼 잘 사는데 난 바보같이 그랬어요. 날 구해줘서 고마워요.”
가현은 살인까지 이어질 수 있는 폭력이 싫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번은 지한을 말린 걸 후회했다. 자신이 그를 위험에 빠뜨렸다고 생각하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당신을 다치게 할 줄 몰랐어요. 정말 당신이 다칠 거로 생각하지 못했어요.”
가현은 생각해보면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그가 느꼈단 생각이 들었다. 지한도 의도는 아니었지만, 아버지가 사망해 힘들었을 것이다. 원치 않은 결과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됐다.
그가 입원실로 옮겨지는 걸 돕던 가현이 따라가지 않았다. 가현은 명 비서가 응급실로 뛰어 들어와 그가 이동하는 것을 발견하고 달려가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대표님 괜찮으십니까?”
명 비서도 놀랐는지 지한의 상태에 심각한 표정이었다. 그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입원실로 이동하는 걸 지켜보던 가현은 돌아섰다.
“미안해요, 지한 씨. 이젠 내게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오지 말아요.”
그가 아무 일 없이 건강해지길 속으로 빌고 빌었다.
입원실까지 따라가지도 못하면서 옷도 따뜻하게 챙겨 입지 못한 가현은 병원을 떠나지 못하고 추운 바깥을 서성였다. 12월의 밤은 추위가 매서웠다. 병원 밖에 설치된 대형 크리스마스트리에 장식된 작은 전구들이 반짝이는 걸 멍하니 보고 있었다.
병원 로비를 지키는 경비원은 가현의 옷에 얼룩진 핏자국을 보고 큰일은 겪었다 추측한 것 같았다.
“누가 아프신지 모르지만, 로비에서 기다리세요. 그러다 병나시겠어요.”
걱정하는 말이 고마웠지만 자신 때문에 다친 것을 주체하지 못하고 스스로 벌을 주는 것처럼 견뎌내는 게 마음 편했다.
시간이 많이 지나고 응급실 담당의에게 부탁해 지한의 상태를 한 번 더 확인했다.
안정을 취하고 있다는 말을 끝으로 자정이 넘어서야 집으로 들어갔다.
연락도 되지 않아 걱정하던 엄마는 가현의 꼴을 보고 깜짝 놀라 가현을 살폈다.
“가현아! 무슨 일이야? 어디 다쳤어? 아니 무슨 일이길래 넋을 놓고 있어.”
엄마는 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지 애가 타 힘겨워했다.
“오늘 편의점으로 지한 씨가 찾아왔는데 저 때문에 다치셨어요. 제가 말리지만 않았다면 다치지는 않았을 텐데.”
“뭐, 그 사람이 찾아와서 다쳤어? 얼마나 다쳤길래 네가 이래?”
“폭력으로 아빠가 목숨을 잃었어요. 난 또 그런 일이 생길까 두려워서 그 사람에게 화를 냈는데 그 사람이 오히려 다쳤어요. 내 말대로 해주려다 그 사람 잘못되면 어떡해요?”
가현은 병원에서 돌아온 뒤 집에 틀어박혔다. 벌어진 상황을 주체하지 못하고 밤잠을 설쳤다.
그가 어떻게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며칠을 보냈다.
가현은 경찰이 집으로 찾아와 사건의 경위를 묻기도 했고 경찰서에 가서 진술서를 썼다.
경찰이 알려준 사장이란 사람은 위험한 인물이었고, 자신이 알던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아무 일 없이 보냈던 시간이 천운이라 생각됐다.
“천만다행입니다. 그 자식 전적이 있더군요. 초범이라 집행유예로 나왔었는데 일상에서도 죄질 나쁜 행동들을 많이 해서 증언하겠다는 사람도 많고 이번은 피하기 힘들 겁니다.”
“저 혹시 다친 차지한 대표님은 어떠신지 아시나요?”
“오늘 오전에 병원에 갔는데 검사로 자리를 비워서 직접 만나보지 못하고 비서만 만나고 왔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가현은 용기를 내어 명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명 비서님, 안녕하세요. 지한 씨 몸은 어때요?”
“사모님은 괜찮으십니까? 대표님은 지켜보는 중입니다. 표면상으로 큰 문제는 없습니다.”
“저 때문에 다쳤어요.”
“그때 상황을 보고 받았습니다. 가해자가 나빴지, 사모님 잘못이 아닙니다. 자책하지 마십시오.”
“저, 지한 씨와 헤어졌어요. 사모님이란 호칭 불편해요.”
“아직 대표님은 사모님과 서류정리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네?”
떠나올 때 이혼서류에 찍을 도장을 교진에게 전달했다. 지한이 이혼서류를 제출하지 않은 변수는 생각지 못했다.
지한을 알 수 없어 생각이 많아졌다.
“대표님을 만나러 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 날은 왜 그 사람이 왔던 거죠?”
“대표님은 사모님의 제천생활을 보고 받으셨습니다. 생활에 문제가 되지 않을까 말씀은 하지 않으시는데 걱정하셨습니다. 기분 나쁘실지 모르지만, 대표님만의 표현방식입니다.“
명 비서의 말을 이해했다. 자신이 아는 지한은 감정 표현이 서툴렀다. 다른 사람이 스토커라고 말할지 모르는 일이지만 그건 그만의 관심 표현이었다. 늘 잘 산다 생각한 남자가 자신이 제천에 온 생활을 다 알고 있다.
가현은 마음이 먹먹했다. 그는 자신을 잊지 않고 있었다.
사장을 때릴 때 자신이 울부짖던 비난에 맥이 풀리던 그는 분명 상처받았었다.
“대표님이 곁을 허락한 사람은 사모님입니다. 그걸 모르시는 것 같아 말씀드립니다.”
“그만 끊을게요.”
가현은 용기를 내지 못하고 명 비서의 말을 피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하루하루 그가 걱정되었다.
그런 가현에게 교진의 연락이 결정적이었다.
“가현아, 괜찮니? 대표님은 너 떠난 이후 위스키 없이 잠을 못 이루셨어.”
“…….”
“네 물건을 극도로 손대는 걸 싫어하셔. 지금도 네가 떠날 때 그대로 모든 물건이 있단다.”
지한의 생활을 들으니 가슴이 먹먹했다.
길들여지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