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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어떤 남자와 벤치에 같이 앉아 노을을 봤다고 보고드렸습니다. 그리고 어젯밤 편의점 앞에서 그 남자와 맥주를 마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노을을 보러 개천 벤치에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지한은 늘 비슷한 보고에 익숙해 결재 서류에 사인하며 들었다. 하지만 오늘 보고를 들으며 손이 멈췄다.
눈치를 살피던 명 비서가 먼저 물었다.
“그 남자에 대해 알아볼까요?”
“아니야.”
“그럼 사모님 보고는 이제 멈출까요?”
지한이 마지막 서류에 서명하고 명 비서에게 주었다.
“하던 대로 보고해.”
지한은 아무렇지 않게 모니터를 보며 일을 시작했다. 명 비서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사무실을 나갔다.
모니터를 항해 있던 지한이 의자에 기대어 앉아 눈을 감았다. 손끝으로 눈썹을 쓸며 생각에 잠겼다.
가현이 노을을 보며 무엇을 생각할지 알 것 같았다. 그녀가 관둔다면 마음을 접겠다 마음먹었지만, 막상 현실이 되니 쉽지 않았다. 그녀가 깡통 상자 안에 넣었던 쪽지와 아랍어 소설책은 당연한 듯 지한의 책상 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녀가 노을을 보는 일이 끝날 날이 올 줄은 알았지만 다른 남자가 생길 일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지한은 심기가 불편해졌다. 명 비서가 건넨 사진에는 가현이 남자를 보고 웃는 얼굴이 찍혀 있었다.
지한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어떤 놈이야.”
가현과 함께 있는 남자를 향한 적개심은 점점 고조됐다.
가현을 멀리서 지켜보는 낙으로 평정심을 유지해오던 마음이 그녀를 향한 주변으로 조용히 파문이 일었다.
***
그를 놓지 못하는 시간은 잘도 흘렀다. 이제는 제천에서의 생활도 익숙해져 갔다.
생각해보면 1년이란 시간이 지나 그를 만났던 12월의 추운 겨울이었다. 연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들떠있는 크리스마스는 알바생도 빠지기 일쑤였다.
오늘도 오후 늦은 시간부터 펑크가 난 자리로 사장은 골머리를 앓았다.
“가현 씨 오늘 오후부터 저녁까지 알바 대신해 줄 수 있어? 내가 알바비는 더 쳐줄게.”
통 사정하는 사장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음식점은 대목이라 엄마조차 오늘은 일이 늦어질 거라 했다.
집으로 돌아가도 잡생각만 많아질 것 같아 가현은 승낙했다.
“제가 할게요.”
“고마워. 가현 씨! 내가 하려고 했는데 오늘 애들이 자장면 노래를 불러서 방법이 없었어. 가현 씨가 있어서 다행이야.”
“가족들과 행복한 시간 되세요. 제가 문 닫고 갈게요.”
“고마워, 부탁 좀 할게.”
사장은 부랴부랴 가게를 나갔다.
편의점 안은 캐럴이 조용하게 흘렀다. 집이 아닌 편의점도 오늘은 손님이 없어 조용했다.
생각은 또 과거를 헤매고 있었다. 이것만큼 시간 보내기 좋은 것도 없었다.
예전보다 가슴 아파하지 않으면서 남의 일처럼 과거를 회상했다. 꼭 나이 든 할머니가 과거를 회상하듯 가현은 1년 전 그때를 더듬었다.
늦은 저녁 가족들과 약속으로 바쁘다던 사장이 술에 취한 채 가게로 들어왔다.
“사장님, 가족들과 식사는 어떻게 하시고 이렇게 취하셨어요?”
가현은 선반에 물건들을 줄을 세워 정렬하다 놀라 사장에게 다가갔다.
“아내와 싸웠어. 이혼하재.”
“네?”
“나 참. 식사하러 가는 와중에 싸웠는데 나보고 이기적이라고 퍼붓는 거야. 그러더니 애들 볼 생각도 하지 말라고. 젠장. 내가 지들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데 그따위 말을 하냐고 “
“화해하셔야죠. 아이들도 있으시니, 이야기하다 보면 서로를 이해하게 될 거예요.”
사장은 씨알도 안 먹힌다며 아내와 가현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불편해진 가현이 한발 물러나 카운터로 향했다.
“가현 씨처럼 내 말을 조금만 들어줬으면 얼마나 좋겠어. 싸움닭처럼 정말 질리게 해.”
“들어가 주무시고 내일 생각하세요. 내일은 크리스마스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가현 씨만큼 잘 이해해주는 사람과 크리스마스 이브를 보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이 드네.”
카운터 건너편에서 끈적한 눈빛에 묘한 분위기로 가현을 보았다.
가현은 손님이라도 와 이 상황이 변하길 바랐지만 늦은 크리스마스이브는 유독 사람이 뜸했다.
“많이 취하셨어요.”
속으로는 그가 포기하고 사라지길 바랐다.
“딱 좋을 만큼 취했지. 오늘 특별한 날인데 남자 친구도 없고 무슨 재미로 살아?”
“들어가서 쉬세요. 곧 문을 닫을 시간이에요.”
가현이 빠르게 카운터를 정리했다. 사장은 술 몇 잔에 자신이 알던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이런 날은 특별하게 색다른 도발도 해보고 말이야. 나랑 특별한 크리스마스 어때?”
“사장님과 농담하고 싶지 않아요.”
“내가 지금 농담으로 들려? 한 번으로 끝내는 게 싫으면 나 이혼하고 쭉 만나도 되고.”
“전 사장님과 그런 관계 될 마음 없어요. 성희롱은 그만 하세요.”
단호하게 말했지만 이미 카운터를 나가려는 가현을 막아서 코너로 몰았다.
“비키세요.”
핸드폰을 움켜쥐고 사장에게서 어떻게 빠져나갈지 궁리했다.
사장은 이번에는 회유보단 으름장을 놓았다.
“가현 씨, 섭섭하게 왜 그래? 알바 자리 요즘 구하기 쉬운 줄 알아? 내가 그만큼 배려했으면 고마운 줄을 알아야지.”
“고마운 걸 이렇게 이용하는 건 말이 되나요?”
“참 따박따박 말 많네.”
사장이 다가와 가현을 뒤에서 결박하고 입을 막고는 창고 쪽으로 끌고 갔다.
끌려가지 않으려 발버둥 쳐도 술에 취한 남자의 완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입을 틀어막아 소리를 질러 도와달라 말하고 싶어도 속수무책이었다.
예전처럼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흉통이 엄습해왔다. 잊힌 줄 알았던 감각들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위기의 순간 과호흡까지 말썽을 부리면 큰일이었다.
“젠장, 내가 잡아먹어. 그만 좀 버둥거려!”
뒤에서 소리를 지르는 남자의 숨소리와 열기가 소름이 끼쳤다. 자신을 콱 잡고 있던 남자를 따라 몸이 뒤로 딸려갔다.
입을 막고 있던 손에서 먼저 벗어나고 남자가 가현을 놓았다.
바닥에 주저앉아 뒤를 돌아보기 전에 남자의 몸이 부딪혀 내는 소리가 요란했다.
억
바닥을 나뒹굴며 내는 신음이 들렸다. 가현이 돌아봤을 때는 커다란 인영이 사장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지한 씨?”
가현이 인상을 쓰고 그를 보았다. 그가 왜 여기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여기서 뭐 해요?”
“약한 여자 상대로 나쁜 짓 하는 놈 응징하는 중이야.”
낮은 목소리가 오랜만에 본 사람 같지 않았다.
얼굴을 가격해 사장의 입가에는 피가 맺혔다. 지한이 연속해 때리려고 해 그를 따라온 남자 둘이 말렸다. 지한이 화를 삭여 말했지만, 누구 하나쯤 죽일 기세였다.
“의자에 앉혀.”
“살려주세요. 저는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아무 짓은 곧 하려고 했지.”
“저 여자가 먼저 꼬셨어요! 가정도 있는데 노골적으로 절 유혹했어요.”
사장은 뻔뻔하게 지한의 앞에서 가현을 싸구려 취급했다. 가현이 사장의 말에 인상을 찌푸리며 화를 냈다.
“거짓말! 당신이 나한테 어떻게 했는지 CCTV에 다 찍혀 있어.”
지한은 미간을 찌푸리고 얼굴을 한데 가격했다.
“네가 말하는 그 싸구려라는 여자가 내 아내야. 한마디로 넌 똥 밟았다는 말이고.”
겁에 질려 지한과 가현을 번갈아 쳐다보며 두 손을 모아 싹싹 빌었다.
“살려주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잠시 미쳤었나 봐요. 수, 술을 먹어서 잠시 이성을 잃었어요”
횡설수설하는 남자는 반쯤 실성한 사람처럼 울부짖었다. 상대적으로 차분한 지한이 무섭게 느껴졌다.
“미쳤다고 하기엔 네가 선을 너무 넘었어.”
지한이 남자의 귓가에 경고하는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는지 사시나무 떨듯 살려달라 외쳤다.
“살려주세요. 제발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가현은 겨우 진정하고 의자에 앉혀져 손이 묶인 사장을 보았다. 많이 본 모습이 아버지가 끌려갔던 그때가 떠올랐다.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에 가현이 벽을 짚고 일어났다.
“그만 해요.”
가현이 낮게 말했지만, 그곳에 있는 다른 이들은 듣지 못했다.
“그만 해요!”
조금 더 큰 소리로 말해도 사장을 협박하는 건 멈출 생각이 없었다. 지한이 사장의 멱살을 잡고 때리려고 할 때였다.
“또 죽이려고요. 우리 아버지처럼! “
가현은 울부짖는 목소리로 악을 썼다. 지한은 가현의 비난에 그를 위협하던 몸에 맥이 풀렸다.
그가 가현을 돌아보고 괴로운 표정으로 인상을 썼다.
“네가 원치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
가현의 눈물이 볼을 타고 내렸다. 눈물에 어른거리는 지한의 표정은 더 아련해졌다. 그게 마음 아파 가현은 어깨가 들썩이는 울음을 참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풀어주고 나가 있어.”
남자 둘은 지시에 따라 고개를 숙여 밖으로 나갔다.
창고 안의 침묵이 어색할 때였다.
윽
또 자신을 해칠까 두려웠던 사장이 긴 막대기로 지한의 뒷머리를 내리쳤다.
“안돼! 지한 씨!”
사장은 들고 있던 막대기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창고 뒷문으로 달아났다.
가현을 보고 있던 지한의 머리에서 피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길들여지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