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남자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았다.
왜 이 순간에 노을을 함께 본 그가 떠오를까.
가현은 돌아본 남자를 보고 알았다. 자신이 노을을 보는 이유를 딱히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호감 가는 여자에게 손을 내미는 남자를 보니 깨달았다. 혼자 그와 봤던 추억을 곱씹고 있었다.
잘 견디고 있다 생각했다. 몇 달이 지났고 그만큼 눈물은 줄었고 그가 떠오르는 횟수도 그를 생각하면 아픈 마음도 무뎌졌다. 하지만 잊지 못하고 그를 추억하는 시간을 따로 만들어 놓은 것과 같았다.
가현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남자에게 옅게 미소 지었다.
“이젠 노을은 보면 안 될 것 같아요. 앞으로 이곳에 노을 보려고 오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래야 할 것 같아요.”
무슨 말인지 이해 못 한 말에 남자는 도망치는 가현을 붙잡았다.
“제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건가요? 그럼 취소할게요.”
“아니요. 좋으신 분 같아요. 하지만 저는 그쪽 관심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에요.”
가현은 돌아서 걸어갔다. 이젠 그를 잊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해가 늦게 지는데도 엄마는 귀가하지 않았다. 늦어진 엄마가 도착할 시간에 맞춰 저녁 식사를 차렸다.
국을 데우려 가스레인지 불을 켜고 수저를 놓았다. 멍하니 국이 끓기 기다리며 식탁에 앉아 생각은 또 멀리 가 있었다.
엄마는 집에 들어와 인사도 전에 헐레벌떡 뛰어왔다.
“이게 뭐야? 불나겠어.”
가스레인지 위 냄비가 타고 있었다.
냄비가 타, 연기까지 피어올랐다.
가현이 놀라 일어났다.
가스 불을 끈 엄마는 달궈진 냄비를 수습하며 잔소릴 했다.
“국을 데우면 신경을 써서 봐야지 다 타서 불이 날 정도까지 정신을 빼놓고 있어.”
가현이 집안 곳곳 창문을 활짝 열고 환기를 시켰다. 자신이 생각해도 미쳤다 싶을 만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미안해요. 불 올려놓고 깜박했어요.”
수습도 되지 않을 정도로 까맣게 탄 냄비를 싱크대에 내려놓고는 엄마가 돌아서 가현을 식탁에 앉혔다.
우왕좌왕하던 가현도 놀라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어깨가 축 처졌다.
“가현아, 정말 왜 그래? 너 병원에서 검사받아도 멀쩡한데 매번 물건 잃어버리고 오늘은 정말 불이 날뻔했어.”
“미안해, 엄마.”
미안해하는 가현을 보니 마음이 약해지는지 엄마는 한숨을 쉬었다.
“오늘은 정말 내 속마음 이야기 좀 하자.”
“어떤 마음?”
“너한테 우선 할 말이 있어.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야.”
생각지 못한 말이라 가현은 멀뚱히 엄마가 무슨 말을 할지 가만히 있었다.
“아버지 사업 사세 확장하고 했다는 건 들어 알지.”
“응, 회사 부장님이었던 분 만나서 들었어.”
“너희 아빠, 마냥 좋은 사람 아니야. 사세 확장한다고 자신이 겪었던 것처럼 영세업자들 사람까지 시켜서 때리고 돈 받기도 하고 엉뚱한 사람들 말에 현혹되어서 사세 확장한다고 이곳저곳 돈 다 끌어다 쓰고 그것만 있는 줄 알아? 회사에 직원들 권고사직해서 피눈물 나게 만들고. 어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생각지 않은 아버지의 회사 운영을 듣고 놀랐다.
“죽은 네 아버지라서 지금까지 말 안 했지만, 알고 보면 네 아버지가 더 악독한 사람이었어.”
“엄마.”
“내 남편이고 네 아버지니까 나도 그 사람 그렇게 죽은 거 안타까워, 하지만 그렇게 못되게 하고 벌 받았다는 생각도 들어.”
“무슨 말이야! 엄마.”
“그렇게 다른 사람에게 나쁘게 하면 안 된다고 말리고 했어. 회사 직원이 나를 찾아와서 피눈물을 흘리며 도와달라고 그렇게 애원하는데 결국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니?”
엄마는 차마 말을 잊지 못하다가 결심을 했는지 숨기지 않고 말했다.
가현은 엄마의 이야기에 할 말을 잃었다.
“그 집 아이가 아파서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는데 결국 돈 때문에 수술도 못 받고 죽었어.”
“뭐라고요?”
“그 사람이 결국 아버지 해코지했던 사람들에게 정보를 줬나 봐. 나도 내용은 모르지만 다른 사람 가슴에 한 맺히게 하니 이렇게 됐나 싶을 때도 있어.”
가현은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생각했던 아빠는 가족을 지키는 듬직한 분이셨다. 아버지의 나쁜 행동으로 자신은 행복하게 웃으며 배부르게 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리 아빠가 어떻게.”
“네 좋은 기억 엄마도 깨고 싶지 않은데 너 지금처럼 사는 걸 볼 바에는 죽은 사람이 나빴던 거 밝히는 게 나아. 너 지금 이게 사람 사는 거야. 네가 산 송장인데.”
엄마는 가현의 손을 잡고 애원하듯이 부탁했다.
“가현아, 차지한 대표라는 그 사람 못 잊겠니?”
“엄마 그건 왜 물어요?”
“그 사람도 알고 보면 우리 잡아가는 거 지시하지도 않았고 알지도 못했다며, 그 장형원인가 하는 그 사람들 윗사람이지만 직접 관리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보면 밑에 놈들이 만든 사단이지 그 사람 잘못도 아니잖아.”
“그래도 아빠가 죽었잖아. 우릴 잡아만 갔다면 나도 이러지 않아.”
가현이 엄마 앞에서 참았던 눈물을 떨궜다.
“아빠가 죽은 것도 그놈들이 만든 일이야. 난 죽은 네 아버지보다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제천 와서 육신만 여기 있지, 반쯤 넋을 놓고 살았어. 그런 널 보는 엄마는 어떨 거 같아? 아빠, 엄마 생각하지 마. 너만 생각해도 돼. 네가 무슨 죄야.”
“그러면 엄마는 무슨 죄야. 이게.”
“난 네 아버지와 결혼한 죄지. 너는 달라. 그리고 네가 행복하면 엄마는 지금보다 훨씬 행복할 것 같아.”
엄마의 말을 듣고 가현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를 용서할 용기도 없었다.
“난 못하겠어. 엄마 아빠 그렇게 된 거 잊고 그 사람 볼 자신 없어.”
가현은 집 밖으로 뛰어나갔다.
숨을 크게 내쉬며 걷고 또 걸었다. 나중에는 눈물도 말라 터벅터벅 생각도 없이 걸었다.
옆을 스쳐 가던 사람이 돌아와 말을 걸었다.
“아까 개천 옆 산책로 맞죠?”
다름 아닌 산책로에서 노을을 같이 봤던 남자였다.
가현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남자를 보았다.
“무슨 일 있어요? 얼굴이 운 거 같은데.”
모르는 남자가 걱정하는 게 불편했다.
“신경 쓰지 말고 가세요.”
“이런 얼굴로 가는데, 어떻게 신경을 안 씁니까?”
“맥주 마실래요?”
엉뚱한 추파에 가현이 인상을 썼다. 남자는 씩 웃고는 가현의 속도 모르고 착하게도 웃었다.
“아니 그런 얼굴을 하면 정말 내가 나쁜 놈 같잖아요. 여기 편의점 앞에서 맥주 한잔요.”
가현은 시선을 돌려 남자가 손짓한 환하게 켜진 편의점을 보았다.
“편의점에서 맥주 사 가려고 가던 길이라서요. 한 병 제가 쏠게요.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니까 싫으면 갈게요.”
가만히 보고 있는 가현을 보고 남자는 대답을 기다렸다. 말도 없이 가현은 남자를 지나쳐 편의점으로 걸어갔다.
허락이란 것을 알아차린 남자는 얼른 따라왔다.
맥주를 사 들고 나온 남자가 편의점 파라솔 아래 앉은 가현 앞에 맥주를 내밀었다.
날씨가 제법 더워 사람들이 편의점 앞에서 술을 즐기고 있었다.
“고마워요.”
“같이 있는 게 싫으면 이것만 주고 갈게요.”
“앉으세요. 걱정해서 사주신 거 알아요. 나쁜 의도 아닌 것도 알고요.”
남자는 미소를 띠고 맞은 편에 앉았다.
가현과 남자는 말 없이 맥주 캔을 따 마셨다. 시원한 맥주 캔에 이슬이 송골송골 맺혀 손가락 끝을 적셨다.
그걸 문지르며 차가운 지한의 손가락을 떠올렸다.
이 순간에도 차지한 이라니 가현은 헛웃음이 났다.
그걸 본 남자는 술을 마시다 주춤했다.
“그렇게 웃을 줄도 아네요.”
“네?”
“제가 본 그쪽은 늘 슬퍼 보였어요. 좀 전에는 쓰러질 것 같아서 그냥 가려니 걸렸고요.”
“그러고 보니 최근에 웃은 적이 없네요.”
자신이 중증이라 생각했다. 언론에 가끔 언급되는 지한은 잘 지내는 것 같았다.
잘생긴 얼굴과 날카로운 눈매는 여전했다. 그를 향했던 외사랑은 일방통행이었으니까 당연했다.
그에게 자신은 그냥 멀어지면 그뿐인 사람이니 큰 영향 없이 일상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자신만 바보같이 그를 못 잊고 있었다.
가현은 마지막 한 모금을 꿀꺽 삼키고 손끝을 적시던 이슬도 사라진 깡통을 찌그러뜨렸다.
“오늘 고마워요. 맥주 덕분에 힘이 나네요.”
“다행이네요.”
“그럼 갈게요.”
“또 힘든 일 있으면 여기 와요. 나 이 시간쯤에 여기 자주 오니까.”
“얼마 되지 않는 확률에 자신을 걸지 말아요. 지나고 나면 아프더라고요.”
가현은 희미하게 웃으며 돌아섰다.
“뻔한 삶에 설레는 기다림도 나쁘지 않아요. 혹시 알아요? 인연이 어떻게 될지요.”
‘그 인연이 가끔 악연일 때도 있어요.’
가현은 이 순간에도 지한을 떠올리며 쓸쓸하게 고개를 떨겠다. 엄마의 말을 곱씹었지만 지한과 자신은 안된다는 결론만 나왔다.
답답해 하늘을 올려다보았더니 다른 날보다 별들이 제법 많았다.
“여기도 별이 많네.”
가현은 어떤 순간에도 그와의 추억을 떠올렸다. 자조하듯 스스로 면박을 주었다.
‘바보같이.’
길들여지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