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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현은 제천에 터를 잡고, 건망증이라 보기에는 심각할 정도로 물건을 잃어버리고 다녔다. 오늘도 가지고 나갔던 우산을 잃어버리고 돌아왔다. 건망증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쳐 엄마는 한숨을 쉬었다.
“또 잃어버렸어?”
“앞으로는 더 신경 쓸게요.”
가현은 오늘 일이 익숙한 것처럼 건성으로 약속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뒷모습을 보고 엄마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활달했던 가현은 학교도 마무리할 생각도 없이 제천에 눌러살 생각을 했다. 그냥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다고 보는 게 정확했다.
처음에 가현이 떠나자고 할 때는 불안한 그녀를 달래기 위한 것도 있었고 결혼한 남자와의 관계를 끊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엄마는 떠나온 지 몇 달이 지나고 걱정이 더 커졌다.
딸이 결혼했던 남자는 알고 보니 신문, 경제지에 나오는 돈 많고 유명한 사람이었다. 언론에 오르내리니 그가 방송에 나올지 몰라 뉴스도 틀어놓지 않았다.
정신을 반쯤 빼놓고 사는 가현을 보면 시간이 약이란 말이 불안했다.
궁리해도 해결 방법은 없었다. 가현을 도울 방법도 찾을 수 없으니 걱정만 쌓였다.
“저도 방법을 찾지 못하니 저러고 살지.”
오늘도 지갑을 들고 가지 않아 메시지를 남겼다. 돌아온 답은 가방에 챙겨놓은 현금이 있다고 했다.
이제는 자주 있는 일이라 차선책을 만들어 놓기까지 했다.
엄마는 가게에 나가려고 집안일을 마무리하고 일찍 집을 나섰다.
빌라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있던 고급스러운 차에서 노신사가 나왔다. 엄마는 지나치려 했지만, 엄마를 주시하는 모습이 분명 자신을 보고 내렸다.
낯이 익은 얼굴이 어디서 마주쳤는지 기억하려 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가현이 귀가로 연락했던 정교진 실장이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그제야 떠올랐다. 가현이 기억을 잃었을 때 살뜰히 챙겨준 교진은 부녀처럼 찍은 사진을 보고 알고 있었다.
실제로 본 적이 없으니 기억을 못 한 것도 당연했다.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먼 곳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가현이와 약속하셨나요?”
“아닙니다. 가현이는 모릅니다. 어머니를 만나 뵈러 왔습니다.”
가현이 떠나면서 교진에게 정착할 곳을 이야기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직접 찾아올 거로 생각지 못했었다. 그가 가현이 아닌 자신을 찾아왔다니 어떤 말을 할지 걱정부터 앞섰다.
“그래요. 제가 출근하는 길이라 집은 그렇고 집 앞 커피숍에서 이야기하셔도 괜찮을까요?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죄송하긴요. 제가 불쑥 찾아와 송구합니다.”
큰길로 나와 작은 커피숍에 마주 앉았다. 아침이라 손님이 없어 조용했다.
“무슨 일로…… 혹시 큰일은 아니죠.”
“아닙니다. 걱정하실 일이 있어 찾아온 건 아닙니다.”
“죄송해요. 갑자기 저와 이야기하러 오셨다니 걱정이 돼서.”
“그럴만하죠. 워낙 큰 고초를 겪으셨으니까요.”
찾아온 것을 오히려 미안해하는 교진을 보고 안심이 되었다.
“가현이를 직접 만나면 그 아이가 더 마음을 못 잡을까 봐 걱정도 되고 또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여러 가지로 마음이 그렇습니다.”
“그러실 테죠. 감사하단 말씀 드리고 싶었어요. 제 딸 기억 잃고 힘들어할 때 정 실장님이 안 계셨으면 어쩔 뻔했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피가 섞인 친척도 외면하는 데 정말 감사합니다.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은혜라니요. 당치도 않아요. 저는 어릴 때 딸을 가슴에 묻었습니다. 가현이를 보면 그 아이가 생각이 납니다. 저는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가현이를 딸로 호적에 올리려고 생각했어요. 저에게는 가현이를 자식같이 제가 챙길 수 있어 낙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가현의 아버지는 그리 살가운 사람이 아니었다. 가현을 위하기는 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가혹할 만큼 악독하게 굴기도 했다.
가현의 엄마는 그걸 알면서도 가현에게는 좋은 아빠로 남겨주고 싶었다.
남편이 과한 협박으로 애석하게 죽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남편에 비하면 교진은 자상한 아빠의 전형 같았다.
“가현 아빠는 그렇게 살갑고 잘하지 않았어요. 가현이는 애틋하게 기억할지 몰라도 다른 사람에게 좋은 사람은 아닐 때가 많았어요. 정 실장님 덕분에 아버지를 더 좋게 기억하는 것도 같아요. 그래서 더 감사합니다.”
생물학적 친아버지보다 더 아버지 같은 그에게 고마워 솔직하게 말했다.
“가현이는 잘 지내고 있습니까? 사실 얼마 전 처음으로 통화를 했습니다. 목소리가 안 좋아서 마음에 걸려 왔습니다.”
“말도 마세요. 저도 떠나오면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한숨을 푹 쉬고 가현은 근황을 말했다.
“이런 말씀 드리면 더 걱정하시겠지만, 저도 속이 타서…….”
“괜찮습니다. 말씀해 주세요. 많이 힘들어하나요?”
“반쯤 넋을 놓고 살아요. 물건 잃어버리는 건 예사이고 건망증으로 생각하기엔 지나쳐서 병원에도 갔어요. 하지만 아무 문제 없다더군요. 아직도 마음은 그곳에 두고 온 사람처럼 육신만 멀쩡한 것처럼 살아요.”
교진도 낙담한 표정을 비췄다.
“전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가현이와 결혼했던 차지한이란 그 대표님은 어떠세요?”
“대표님은 가현이가 떠나고 겉으로는 똑같으십니다. 다만.”
교진이 뜸을 들였다.
“위스키가 없이는 잠을 못 주무십니다. 똑같은 것 같지만 절대 괜찮지 않습니다. 저는 대표님을 어릴 때부터 모셔왔습니다. 힘겨운 유년 시절을 보낸 만큼 사람을 곁에 두지 않으십니다. 그런 분이 가현이를 마음에 담았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보입니다. 얼마 전에 알게 됐습니다. 아직도 결혼 후 서류정리를 하지 않으셨더군요.”
“그럼 아직 부부 사이란 말인가요?”
“네 법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죽은 사람은 안타깝지만 전 살아있는 제 딸이 더 중요합니다.”
가현의 엄마는 눈물을 찍어냈다.
“제 남편을 죽인 건 그 나쁜 사람들이지만 그걸 그분이 지시한 것도 아니라는데 이렇게 못 잊고 있는 둘을 떼어 놓아야 하나 싶어요. 제 남편에게는 미안하지만 두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면 전 가현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네, 저는 가현이가 행복하면 그걸로 돼요. 지금처럼 산 송장처럼 사는 건 더는 보고 싶지 않아요.”
“저도 그렇습니다. 몇 달이 지났지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래 주신다면 제가 감사합니다. 저도 가현이와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두 사람의 지한과 가현의 재결합을 도울 방법이 있을까 고민했다.
***
가현은 주말 오후 어김없이 산책을 나와 개천에 설치된 벤치에 앉았다. 가을이 무르익은 산 사이로 노란 들판을 붉게 물들이며 노을이 지고 있었다. 신혼여행 이후 노을을 보면 황금빛 사막에 내려앉아 이글거리던 태양이 모래언덕 저편으로 사라지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장면이 지나고 나면 날렵한 턱선을 한 지한이 내려다보던 모습과 부드럽게 키스하던 장면이 떠오르곤 했다.
추억을 더듬는 시간은 원망스러울 정도로 짧았다. 여지없이 해는 서산을 넘어 주위는 금세 어두워졌다. 가현의 아련한 눈빛도 현실로 돌아왔다.
“좋은 시간은 끝났어.”
매일 반복되는 일이라 슬픔도 빠진 목소리는 무료했다. 노을 구경을 끝낸 가현은 옆을 보고 놀랐다.
낯선 남자가 자신의 옆에 앉아 자신처럼 노을을 구경하고 있었다.
놀라 일어난 가현이 빠른 걸음으로 산책로를 걸어가자 남자가 뒤따라왔다.
“놀라셨어요? 나쁜 사람 아닙니다.“
“…….”
“오늘 노을이 좋아서 지나가는데 여기가 제일 노을 구경하기가 좋더라고요. 그래서 매일 여기서 노을 보시는 거 아닌가요?”
가현은 놀라 남자를 흘끔 보았지만, 발걸음은 여전히 빨랐다.
“저 이상한 사람 아닙니다! 이 시간에 이곳 산책로에서 운동합니다. 그러다 보니 그쪽을 보게 되었어요. 그쪽은 모르겠지만 저는 운동하면서 매일 봐서 저도 모르게 친근했나 봅니다.”
그 역시 가현을 따라 빠른 걸음을 유지했다.
가현은 여전히 경계를 하면서도 조금 속도를 늦췄다.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해서요. 뭘 알아달라는 것도 아니고 스토커나 이상한 남자라고 오해하는 건 억울해서요.”
“…….”
“늘 노을 보시느라 제가 지나가도 모르셨어요.”
남자는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웃음이 선하게 보여 순한 얼굴이 보기 좋았다.
그를 모를 만도 했다. 노을에 넋을 놓아 다른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랬군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가현이 돌아서는데 남자의 질문이 가현을 붙잡았다.
“내일도 노을 보러 오시나요? 저도 함께 봐도 될까요?”
길들여지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