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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현은 어릴 때부터 마음 한 자락 내어주지 않던 지한이 사랑했던 유일한 여자였다. 지한은 인정하지 않지만 어릴 때부터 그를 지켜본 두 사람은 확신했다.
그의 성격상 다시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 일이 있을까 생각하면 가현이 유일할 것 같았다.
쉽지 않은 우연으로 만나 평범하지 않은 스토리로 사랑한 두 사람은 절절한 사연으로 엮여있었다.
그의 사랑이 일그러졌다 해도 가현을 사랑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우리 도련님…… 괜찮으실까요?”
표현하지 않는 지한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 변화 없는 그가 걱정되는 건 당연했다.
“예전처럼 잘 지내는 것 같지만 절대 잘 지내는 게 아니라서 걱정이죠, 저녁에 독한 위스키가 없이 잠을 못 주무세요.”
“우리 불쌍한 도련님, 어쩌누.”
장원댁은 눈물을 찍어내며 지한을 진심으로 걱정했다. 그녀를 찾을 줄 알던 지한이 전혀 가현을 따로 찾지 않았다.
두 사람을 안타까워하던 사람들은 두 사람의 관계가 끝났다고 낙담했다.
***
사무실 안은 살벌한 공기가 감돌았다.
임직원 두 명은 멘탈이 털려 대표실을 유령처럼 걸어 나갔다.
라윤이 길어진 보고에 기다리다 그들을 보고 혀를 찼다.
“저 사람들 오늘 일하긴 글렀는데. 아버지가 한 말이 있어.”
“지적은 하되 사기는 떨어뜨리지 마라.”
지한은 라윤이 할 말을 가로채 대신 말했다. 라윤이 미소를 지었다.
“잘 아는데 그렇게 기를 죽여 놔.”
“잔소리하려고 왔어?”
지한은 귀찮다는 듯 삐딱한 태도였다.
“차지한 씨 괜찮은지 확인하라고 아버지 특명받고 파견 왔어. 심부름도 할 겸.”
“오히려 둘러대지 않아 좋네.”
“그렇지? 모르는체하는 게 더 가식적이라 생각해. 오빠 사랑해서 한 결혼도 아닌데 이젠 다시 잘 살면 되잖아.”
지한은 사인하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밥 먹자.”
“아직 점심 전이야.”
“그럼 브런치로 먹을까?”
지한은 웃고 말았다. 자신이 오츠에 데려가던 날 가현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식사를 제안한 그녀를 보았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밥을 먹는 건 확실하다는 표정이 어딘가 자신을 닮아 있었다.
자신도 저런 표정이었을까.
약간은 설레고 상대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모습.
그렇다면 라윤처럼 자신도 그녀를 좋아했는지 몰랐다.
지금까지는 그녀에 대한 집착이라 생각했다. 자신의 영역 안에 있는 이들에 대한 책임감과 놓치고 싶지 않은 집착. 하지만 가현을 생각하면 명확하지 않았다. 부연 설명이 많았고, 생각할 것이 많아졌다.
고집을 꺾지 않을 라윤을 따라 이른 점심을 먹었다.
“오빠, 모로코 사업은 어떻게 돼가?”
“아직 본격적인 진행은 내년 정도 지금은 기획과 조율 중이야. 회장님 통해서 필요한 납품 건은 협의를 마쳤어.”
“얼마 전에 모로코 왕실에서 행사로 초대한 걸로 아는데, 맞아?”
“무슨 말이야?”
“동반 파트너가 필요하다면 내가 갈게.”
그의 옆자리가 빈 지 얼마 되지 않아 가현의 향기가 가시지도 않은 자리를 라윤은 넘보았다.
지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결혼 전에도 누군가와 함께 참석하는 건 싫어했어.”
“그래, 그러던 오빠가 그 룰을 깨고 가현 씨를 파티에 데려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했어.”
“그래서?”
“곤란한 입장이라면 이번에는 날 이용하는 건 어떠냐고. 나 지금 자존심도 없이 오빠한테 매달리는 거야.”
“자존심 챙겨, 백라윤. 아직 법적인 결혼 상대자는 정가현이야.”
라윤은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 법적인 서류 관계를 정리하지 않은 지한을 질타했다.
“아직도 정리 안 했어? 그리고 정가현이 아니라 서가현이지. 허상인 정가현은 사실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잖아.”
“그래, 그래서 이제 옆에 없는지도 모르지.”
“오빠답지 않은 지금 모습 실망스러워. 가현 씨와 오빠는 악연이야.”
알고 있어도 남에게 듣는 말은 곱게 들리지 않았다.
“정가현에 대해 너에게 듣고 싶지 않아.”
지한은 더는 식사할 입맛이 떨어졌다. 냅킨을 테이블에 놓고는 더 이상의 반박도 못 할 눈빛으로 잘랐다.
“백라윤 더는 개인적인 감정으로 찾아오지 마. 일 이야기 아니면 그만 가.”
“나 아직 오빠에게 미련 안 버렸어. 난 오빠 사랑해.”
“…….”
“정가현 씨 잊을 수 있게 내가 도와줄게.”
진지한 눈빛, 간절한 태도의 라윤을 어떻게 설득할지 난감했다.
지한은 라윤의 도발적인 고백에 한숨을 쉬었다. 라윤이 안된 마음도 있었다. 결혼해 버림까지 받은 남자가 뭐가 좋다는 건지. 부족한 것 없는 그녀는 자신처럼 갖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집착이라 생각했다.
“라윤아. 널 사랑해줄 수 있는 남자를 찾아. 난 널 사랑할 마음 따윈 없어.”
“그 여자는 되는데 난 왜 안 되는데!”
지한이 더 들을 말이 없다고 생각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넌……. 정가현이 아니니까.”
그는 진심을 말하고 사라졌다.
라윤은 늘 가현과 결혼했던 이유가 필요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이 더 사랑하고 더 잘할 수 있다 생각했다. 어쩌면 그렇게 우기고 싶었는지 모른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일상으로 돌아온 지한을 보고 희망을 품었다.
그녀로 생긴 빈자리는 크지 않다 판단했다.
지한의 마지막 말은 진심이 담겨 있었다. 알고 싶지 않은 민낯을 마주한 것처럼 슬펐다.
틈도 없이 정가현이란 여자가 지한의 빈틈까지 들어차 있었다.
“왜 하필 그 여자야.”
라윤은 주먹을 꼭 쥐고 무너진 희망에 화를 삭였다.
***
명 비서의 보고를 오늘처럼 경청한 적이 있나 싶을 만큼 지한은 토시 하나 빠지지 않고 귀담아들었다.
“충북 제천 외곽 작은 마을에 집을 구했습니다. 작은 빌라라고 합니다. 우선은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고 그 외 시간에는 미술학원과 학원에서 강사들을 돕는 일을 한다고 합니다. 어머님은 근처 음식점에서 일하시고요.”
“집 주변은?”
“구도심에 있는 구축 빌라들이 몇몇 있는 곳이라 시설이 좋지는 않지만 생활하기에 위험한 지역은 아닙니다. 한 가지 더운 날씨에 에어컨도 없고 변변한 가전제품도 없이 생활 중이라 들었습니다.”
“그 집 매도해.”
“대표님. 그걸 사모님께서 아시게 되면 오히려 더 먼 곳으로 숨을 겁니다.”
명 비서도 가현과 일을 해봤으니 그녀의 성격을 알았다. 지한은 그의 충고에 생각이 많아진 것 같았다.
“집주인 통해 적당한 가전제품을 옵션으로 제공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티가 나지 않게 중고면 덜 의심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
명 비서도 고민했는지 대안을 제시했다. 지한이 생각지 못한 의견에 승낙했다.
“한번 가보시겠습니까?”
명 비서는 지한이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한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가현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안타깝고 가장 최상위 우두머리인 그라 해도 그가 세부적인 장형원의 내부사정을 관리하는 대표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이 지한에게 잘 보이려던 지나친 처사에 사달이 나고 말았다.
이것까지 지한의 책임이라면 억울할 만한데도 지한은 투덜대지도 않고 가현을 보냈다.
옆에서 보는 명 비서가 답답하면서도 그라면 변명은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아니, 그냥 지켜보라고 해.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역시 그다운 대답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안타깝고 절절한 지한을 도울 방법이 없어 명 비서도 한숨만 늘었다.
이후 지한에게 매일매일 가현의 근황을 알렸다.
집주인을 이용해 무상으로 가전을 제공했고, 가현의 어머니가 일하는 환경을 개선했다.
보이지 않는 키다리 아저씨처럼 조용하게 두 사람의 앞날을 도왔다.
저녁 만찬을 마치고 돌아가는 지한은 오랜만에 술을 많이 마셨다. 오랜만에 가현과 맞닥뜨렸던 양평의 2차선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늦은 시간 계절만 다를 뿐 크게 달라지지 않은 도로를 달리며 명 비서가 조용하게 가현의 오늘 하루를 보고 했다.
“오늘 미술학원 학생들이 떼를 썼는지 초등학생 아이 5명을 데리고 떡볶이집에서 간식을 사줬답니다. 그리고 오늘도 집 근처 개천에 벤치에 앉아 노을을 봤다고 합니다.”
“…….”
늘 뻔하고 일상적인 보고에 질릴 법도 한데 지한은 말없이 가현의 하루를 들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하실 생각입니까?”
“내가 그만두라고 할 때까지 해.”
명 비서도 안타까워 물었지만 지한은 단칼에 잘랐다.
지한도 이렇게 계속 살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녀의 하루를 작은 것까지 보고 받아야 안심했다. 매일 그녀의 평안을 들어야 안심하는 자신을 보고 자조하듯 픽 웃었다.
“미친놈.”
자신이 정상은 아니라 생각됐다.
‘스토커도 아니고 정가현이란 이름을 들어야 안심이 되지.’
처음에는 다 괜찮을 줄 알았다. 처음 며칠간 노을이 지는 하늘을 한 시간을 보았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먹먹했다.
그녀가 일몰을 보지 않는 날이 온다면 가능할까?
지한은 그날이 온다면 자신이 달라질지 모른다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 지한은 그녀를 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었다.
그녀를 처음 만났던 도로를 달리며 과거를 회상했다.
길들여지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