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길들여지는 밤-56화 (5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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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집에서 잠든 가현은 구수한 음식 냄새에 잠에서 깨었다.

오랜만에 마신 술에 깊이 잠이 들었다.

연락도 하지 않아 교진이 메시지를 남겨놓은 걸 보고 통화를 했다.

교진은 엄마와 통화를 하시면서 걱정을 많이 하셨다는 말을 듣고 죄송했다.

술을 빌려 쌓였던 고민을 눈물로 쏟아냈지만 그런 저를 엄마는 얼마나 걱정했을지 생각하니 죄송했다.

“엄마 이 많은 건 언제 다 준비했어요.”

엄마는 음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콩나물국과 엄마가 자주 해주던 반찬으로 가득했다.

“일어났어? 이리 앉아. 이거부터 먼저 먹어.”

수저를 쥐여준 엄마는 콩나물국을 가현의 앞에 놓았다.

맑은 국물에 파가 송송 썰어진 콩나물국이 맛있어 보였다. 국물을 몇 숟가락 뜨다 국그릇을 들고 반쯤 마셨다.

몇 잔 마시지 않은 술이 콩나물국에 풀렸다.

엄마와 마주 앉아 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마시는 가현을 재촉했다.

엄마 집이어도 외박은 좋지 않다며 빨리 집으로 돌려보내려 했다.

가현은 갈 생각을 하지 않고 주저했다.

“엄마 내가 아버지 일과 관련해서 말하지 않은 게 있어요.”

“더 놀랄 일이 있겠어. 나한테 알리지 않았으면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우리 딸이 엄마 나쁘게 할 일이 뭐가 있겠어.”

무한한 신뢰가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아빠 끌고 가 그렇게 만든 사람들 장형원이라는 조직이라고 했잖아요.”

숨을 크게 내쉬고 말을 기다리는 엄마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그 사람들 움직이는 사람이 내가 결혼한 사람이었어.”

엄마는 멍하니 가현을 보다가 들고 있던 커피잔을 스르륵 놓쳤다.

식탁에 탁하고 부딪친 컵이 기울어져 쏟아졌다. 식탁 위를 반원을 그리며 구른 커피잔이 멈췄다. 커피가 주르륵 식탁을 타고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엄마도 가현도 움직이지 않아 식탁 위 쏟긴 커피가 거의 흘러내려 나중에는 시간차를 두고 뚝뚝 떨어졌다.

“기억이 돌아오고 처음에는 몰랐어요. 엄마를 찾으려고 백방으로 알아봤는데 못 찾겠더라고 하성 그룹 주안이 알죠. 주안이가 도와주다 주안이 형이 검사였잖아요. 내가 돌아온 걸 알고 몇 가지를 알려줬어요. 그러다 다른 일과 엮이면서 알게 됐어요.”

“…….”

엄마는 충격을 받았는지 눈도 깜빡 않고 가현을 응시했다.

몇 번이고 용기를 내려 했던 말이었고 속으로 수백 번도 더 상상했던 일이라서 지금이 당황스럽고 낯설지도 않았다.

“뒤에 이야기를 들은 걸로는 그 조직원들이 차지한에 대한 과잉 충성으로 아버지를 그 지경으로 만들었다고 들었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죽었잖아. 죽을 필요도 없었고 누구도 원치 않은 죽음이었는데 그 일로 우리 집은 엉망이 됐는데 내가…… 그렇게 만든 사람과 결혼했더라고.”

그를 두둔하고 싶었던 걸까.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주절주절했다. 가현은 담담하게 말하면서도 마지막 말은 감정이 실렸다.

마음껏 엄마가 욕도 할 수 없게 못난 딸은 그렇게 지한은 감싸듯 말해놓고 스스로가 치가 떨리게 싫었다.

엄마는 목이 메는지 말을 하려다 기침을 했다.

“네 잘못이 아니야. 가현아.”

엄마는 오히려 가현이 상처받은 마음을 먼저 위로했다. 그 말에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엄마, 우리 떠나요. 이렇게는 살 수 없어. 그 사람에게 말하려고.”

엄마는 섣부르게 말리지도 그렇다고 헤어지라고도 못 하고 가현 옆으로 와 가현을 안아주었다.

“우리 딸 어떡해, 불쌍해서 어떡하지.”

두 사람은 그렇게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

집으로 돌아와 몇 개 없는 짐을 챙겼다. 처음 이곳에 아무것도 없이 왔듯이 다 그에게 받았던 것이라 가지고 갈 물건도 많지 않았다.

사막에서 입었던 젤라바와 모로코에서 샀던 아랍어책 한 권, 사용인에게 선물 받았던 흰색 원피스. 그 외에는 큰 의미도 제 것도 없었다. 소박한 몇 가지의 옷가지를 챙겨도 작은 캐리어는 넉넉했다.

“다 지한 씨에게 받은 것뿐이네.”

가현은 아랍어 소설책을 들고 별채로 갔다. 여전히 중정은 드높아 더 넓어 보였고 온실은 울창했다.

온실 테이블에 아랍어 소설책을 놓고 그에게 간단한 쪽지를 남겼다.

자신에게 그는 마법이었다.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살렸고 자신의 트라우마를 잠재운 그는 가현에게 유일한 마법사였다. 아랍서점에서 즉흥적으로 산 책은 희망의 메시지를 주는 밝은 소설이었다. 그 책이 그에게는 자신이 떠난 자리를 채워줄 희망이 되는 부적이 되었으면 했다.

아직 비우지 못한 미련을 소설책에 담았다.

온실을 둘러보고 인사했다.

“안녕.”

‘어린 차지한도 이젠 울지마. 지금의 지한 씨도 이젠 행복해져요.’

모든 정리가 끝나고 서재 앞에서 노크했다.

가현은 처음 그에게 결혼하자고 제안할 때처럼 서재에 발을 들였다. 그때처럼 그의 손에는 위스키가 들려 있었다.

“할 말이 있어요.”

“말해.”

“우리 그만 해요.”

“…….”

가현은 그에게서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했지만 지한은 도통 그녀를 보려 하지 않았다.

“지한 씨, 나 봐요.”

그는 한숨을 푹 쉬고는 들고 있던 위스키를 들이켜고 가현을 보았다.

무슨 말을 해도 그는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뻔한 말을 들었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허락할 수 없다고 했어.”

“당신이 허락하지 않아도 난 안 되겠어요. 당신을 보면 아버지가 생각나요.”

“우린 처음부터, 끝까지는 힘들었어요.”

지한은 가현의 말에 호응도 부정도 없이 묵묵부답이었다.

“저 엄마와 멀리 떠날게요.”

“이곳이 힘들면 어머니와 함께 지내.”

“아니요. 지금처럼 당신도 나도 고통스럽게 평생 살 수는 없어요.”

가현은 지금까지 내뱉지 못했던 말로 그를 끊어냈다. 심장이 끊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그냥… 우린 악연이었어요. 우린… 여기까지 같아요”

가현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지한과 눈을 맞췄다.

그녀가 마지막을 고하는데도 지한은 말이 없었다.

“지한 씨는 내가 트라우마 때문에 당신 몸이 필요하다 생각했지만 난 아니었어요.”

가현은 평소보다 차분하게 옛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입가에 미소를 짓고 이야기했다.

“처음에 지한 씨 너무 못되게 말해서 난 정말 싫어했어요.”

“나도 마찬가지야.”

지한도 인정한다는 말에 두 사람은 쓸쓸하게 피식 웃었다.

“당신은 누구보다 당당하고 성공한 인생이니까 모두가 생각하는 것처럼 잘 산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당신도 지금을 견디고 있다는 걸 알고 마음이 달라졌어요. 그때부터 내 마음이 당신을 향했어요.”

지한이 가현을 깊어진 눈으로 응시했다.

“당신 사랑했어요. 아마 이런 인연이 아니었다면 평생 그랬을 거예요.”

“…….”

지한의 턱관절이 악다문 이에 불거졌다.

“지한 씨 잘 지내요. 나 살려줘서 고마워요.”

지한은 가현을 잡을 수 없어 말도 없이 앉아 있었다.

가현이 문을 닫기 전에 벽에 부딪혀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났다. 그가 위스키 잔을 던졌는지 날카로운 소리에 주춤했지만, 입술을 깨물어 참아 냈다.

‘미안해요. 지한 씨. 나 잊고 잘 살아요.’

메마른 눈물이 눈물길을 만들며 타고 내렸지만 돌아보지 않고 저택을 나왔다.

지한이 던져 산산조각이 난 위스키 잔이 엉망으로 흩어져 잔해가 반짝였다. 잔에 남아있던 위스키가 책장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무렇게 던져진 물건들이 다른 물건들과 부딪쳐 서재는 부서진 물건들로 엉망이었다.

지한은 삐뚤어진 의자에 걸터앉아 힘이 빠져 버렸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이처럼 물건을 부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조차 여의찮아 그가 주저앉아 고개를 떨구었다.

지한은 가현이 떠난 다음 날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표정 변화 없이 늘 같은 일상처럼 식사하고 회사에 출근해 일을 지시하고 비즈니스를 이어갔다.

사귀다 헤어져도 여파가 있는데 결혼해 떠난 보낸 사람치곤 너무 평온했다. 결혼까지 했던 여자가 마지막을 고하고 떠나보낸 남자로 보이지 않아 주위 사람들이 말은 못 하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의 평안을 늘 걱정하던 정 집사와 장원댁이 한숨을 쉬었다.

“가현이는 잘 지낸 데요?”

“충청도 작은 도시에 정착했다고 연락이 왔어요. 자세한 건 말해 주지 않았고 저도 묻지 않았어요.”

“온전히 사연을 알고 있으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고 과거는 무시하고 살라고 말할 수도 없고. 어휴.”

“그러게 말입니다. 인연이 이렇게 꼬여서 두 사람 다 안타까워요.”

아직 서로의 마음이 남아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떠나는 가현의 얼굴에는 슬픔이 가득했고 표정 변화 없던 지한의 마음도 짐작이 되었다.

누구의 사연도 봐주지 않고 시간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흘러갔다.

지한은 가현이 떠나고 그녀가 없던 회색빛 세상으로 돌아왔다.

길들여지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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