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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주안아.”
- 어머니 소재는 찾지 못했어. 그런데.
주안은 말을 못 하고 뜸을 들였다.
“괜찮아. 이렇게 네 일처럼 도와주는 걸로도 고마워 네 도움이 없었다면 이만큼 알아내지도 못했을 거야.”
얼굴을 볼 수 없지만, 그의 반응이 평소와 달랐다.
“왜? 다른 걸 알아냈어? 무엇이든 괜찮아. 말해줘.”
- 이걸 말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확인이 필요하긴 한데.
“주안아. 나 기억까지 잃어봤어. 이젠 외면하지 않고 다 알고 싶어. 엄마를 찾는 데 도움 되는 일이라면.”
그가 한숨을 쉬더니 걸려 하던 말들을 전부 말해 주었다.
- 형한테 자꾸 너희 집 이야기를 물으니까, 형도 검사다 보니 감이 있잖아. 왜 묻는지 추궁을 하더라고. 그래서 형에게 네가 나타난 자초지종을 말했어.
“괜찮아. 내가 돌아온 건 맞잖아. 평생 숨길 생각도 아니었어.”
- 거기까진 괜찮았는데 형이 네가 차지한 대표와 결혼한 걸 듣고 말해 줬어. 장형원을 움직이는 사람이 차지한 이라고.
“…….”
가현은 자리에 앉아 얼어버렸다.
눈길이 머물러 있던 아름다운 정원은 이제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강 교수와 악수하고 가현이 앉은 곳으로 그가 걸어왔다. 얼굴에 머금은 미소가 유난히 보기 좋았다.
가현은 눈앞이 흐려지는 걸 겨우 참았다.
“미안. 오래 기다렸나?”
“아니에요.”
그가 앉으려다 가현 옆으로 다가와 그녀의 얼굴을 쓸었다.
“얼굴이 핏기가 없어. 안 좋아 보여. 지금 병원으로 가지.”
“괜찮아요.”
가현이 그의 손을 걷어내고 화제를 돌렸다.
“앉아요. 배가 고파서 더 그런가 봐요.”
지한은 자리에 앉아 강 교수를 불렀다.
가현이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지한과 강 교수가 이야기를 나누고 자리를 떠났다.
그녀의 말이라면 하늘에 별이라도 따줄 듯한 이 남자가 그렇게 냉정했던가 싶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자신을 바라봐주길 소망했었다. 기적처럼 소원은 이루어졌는데 기뻐할 수가 없게 되었다. 울컥하는 마음을 어떻게 할 수 없어 핑계를 댔다.
“저 잠시 자리 좀 비울게요.”
화장실에 뛰어 들어갔다.
‘그가 장형원을 움직인다? 아버지는 그들에 의해서 돌아가셨다. 엄마는 찾을 길이 없다.’
가현은 물을 틀어 세수했다.
곱게 했던 화장은 중요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엄마를 찾는 데 집중해야 했다.
그를 생각하면 가슴에 통증이 일 정도로 조여왔다.
고민해도 답은 없었다. 기억을 잃는 걸로 도피했던 자신은 이젠 없었고 어디에도 숨을 곳이 없었다.
물기를 털어낸 가현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뚫어지게 보았다.
“이젠 피하지 마.”
가현은 통창 앞에 앉은 지한에게 다가갔다. 이미 음식이 나와 있었다.
“세수라도 했어?”
“네.”
지한은 가현의 행동이 조금 다르다고 생각했는지 다른 날보다 질문이 많았다.
“무슨 일이 있거나 불만이 있으며 말해. 난 네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가현은 포크로 미트볼을 굴리다 한숨을 쉬었다.
“내가 어떤 걸 물어도 솔직하게 말해 준다고 약속할 수 있어요?”
“그래.”
“당신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요.”
“어떤 거지?”
가현은 무릎 위에 있던 냅킨으로 손을 닦아 닦은 후 지한을 보며 말했다.
“사람을 찾아주세요.”
지한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전혀 생각지 않았는지 당황하는 것도 같았다.
“누구를 찾고 싶지?”
“엄마를 찾고 싶어요.”
“…….”
가현은 차분하게 그에게 말했다.
“나 기억이 돌아왔어요.”
그가 놀라는 것 같았다. 고개를 살짝 기울인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놓고 냅킨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언제?”
“이번 납치사건 때 의식을 잃은 이후에요.”
“왜 말하지 않았지?”
“내 기억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어요. 명확해지면 말하려고 했어요.”
“어머니 행방은 아직 찾지 못했어?”
이상한 건 그가 기억을 찾았다는 말에 놀랄 뿐 자세한 내막은 묻지도 않았고 엄마가 행방불명 됐다는 걸 아는 것 같았다.
“잠깐만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 엄마를 왜 찾는지, 내 부모가 어떤 분인지 안 궁금해요?”
가현은 격양된 목소리로 물었다.
“이건 솔직하게 대답해줘요. 나 기억 잃었을 때 내가 누군지 알았어요?”
“…….”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러 잔잔하게 들리던 음악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두 사람 사이의 정적이 길어질수록 가현은 조바심이 났다.
“내 이름…… 알고 ‘가현이는 어떠냐.’라고 했던 거예요?”
가현은 대답을 듣지 않았는데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
‘제발 아니라고 말해요.’
그런 가현의 바람은 지한이 입을 열고 무너졌다.
“알고 있었어.”
“…….”
“이름, 나이, 부모님의 행방불명.”
“차지한, 당신 정말 나쁜 사람이야.”
가현은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눈물이 툭 하고 떨어지고 봇물 터지듯 걷잡을 수 없이 흘렀다.
지한은 한숨을 쉬었다.
“무슨 일을 당한 지도 모르고 기억까지 잃었는데 진실을 말할 수 없었어. 가진 재산은 공중 분해되고 부모님은 행방불명인 상황을 말하면 독이라 생각했어.”
지한의 냉정함을 잠시 잊고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때는 내가 나서서 말해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
“나는……. 나는…….”
떨리는 목소리가 걷잡을 수 없었다.
가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알고 있었다는 여파는 가현의 심장이 칼에 베여 반쯤 벌어진 것 같이 손쓸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충격이 컸던지 휘청이는 가현의 몸을 지한이 잡았다.
가현은 입을 악다물고 그의 팔을 뿌리쳤다.
“가현아.”
“나중에 이야기해요. 엄마를 찾아줘요.”
울먹이는 목소리가 흔들려 겨우 나왔다.
“꼭 찾아요.”
최대한 정신을 차려보려 노력하는 가현이 안쓰러운지 지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가현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이며 걸어갔다.
가게를 나와 벽을 짚고 숨을 몰아쉬었다. 자꾸 새어 나오는 울음소리를 참으려 깨문 입술이 덜덜 떨렸다.
‘나한테 그러면 안되는 거잖아. 결혼했을 때라도 말했어야지.’
가현은 자신이 가장 사랑한 사람에게 느낀 배신감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집으로 돌아와 가현은 저택에 와 처음 사용했던 사용인들이 쓰는 방으로 갔다.
가현이 이 저택에 왔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소박한 방이 결혼 이후 쓰는 방보다 오히려 편했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이곳이었어.’
가현은 작은 싱글 침대로 들어가 몸을 말아 누웠다. 멈추지 않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쓴 가현은 오열했다.
걱정한 교진이 문을 두드렸지만, 가현은 문을 잠근 채 방을 나오지 않았다.
가현은 식음을 전폐하고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죽은 사람처럼 누워 창밖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멍하니 보았다. 눈물도 말라버려 바싹하게 마른 나뭇잎같이 마음은 황폐했다.
지한은 이틀을 참지 못하고 방문을 두드렸다. 그는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았다.
쾅쾅
“가현아 문 열어. 문 열고 이야기해!”
문밖에서는 지한만이 아닌 몇 명의 목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제가 설득해 보겠습니다.”
“아닙니다. 열쇠 가져오세요.”
지한은 이 방에서 자신을 꺼내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가현은 영혼이 빠져나간 유령처럼 일어나 털컥거리는 문을 열었다.
문 앞에 선 지한을 올려다보았다.
얼굴을 살피던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할 말이 있어요.”
가현은 방에서 나와 걸어갔다.
지한은 말도 없이 위태롭게 벽을 짚고 걷는 자신을 따라 걸었다.
정원을 가로질러 별채로 걸어갔다. 별채 소파에 앉은 가현의 옆 소파에 그가 앉았다.
그가 물을 따라 가현의 앞에 놓았다.
“물이라도 마시고 말해.”
그가 따른 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가현이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내 아버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고 있어요?”
“이틀 전에 이야기 듣고 더 자세히 알아봐서 알아.”
“장형원 그 조직이 지한 씨와 관련이 있나요?”
“…….”
“장형원의 일원이 납치된 나를 구하는 데 도왔나요?”
“…….”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눈물이 차오르고 목이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지만, 또박또박 천천히 물었다.
“내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유가…… 내 가족을 망친 사람이 장형원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걸 알고 있어요?”
“…….”
여전히 대답하지 않는 그를 쏘아보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 가족을 망쳤냐고 묻는 건 가슴을 도려내는 것 같았다. 말라버린 것 같던 눈물이 남아있었나 보다.
“차지한 당신이 장형원을 움직이는 사람인가요?”
지한은 그제야 가현을 보고 대답했다.
“그래.”
가현은 주춤거리며 일어났다. 가현의 눈빛이 슬픔과 분노가 뒤섞여 지한을 죽일 듯 보아도 소용없었다.
“모셔와요. 내 엄마. 죽였다면 무덤이라도 파서 내 앞에 모셔와요.”
남에게 나쁜 말 한번 못하던 엄마의 온화한 미소가 그리웠다. 엄마가 사무치게 보고 싶은 밤이었다.
길들여지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