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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현이 눈을 떴을 땐 처음 지한이 발견해 병원에서 눈을 떴을 때와 비슷했다.
예전의 낯설고 불안한 느낌과는 달랐다.
가현은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으로 갔다.
거울을 보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서가현. 22살. 한민대학교 재학 중.”
기억이 돌아왔다.
의문점은 너무나 많고 돌아온 기억만큼 마음의 무게가 가현을 짓눌렀다.
기억이 진실인지 조작인지조차 경계선을 넘나들었다.
이해되지 않는 의문점은 가현이란 이름을 기억을 잃고도 그대로 쓰고 있었다.
이름은 분명 지한이 지어주었는데 우연이라기엔 미심쩍었다.
아버지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 지옥 같은 곳에 남겨두고 온 엄마는…….
부모님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병실 문이 열리고 지한이 문 앞에 서서 눈을 가늘게 뜨고 가현을 보았다. 데자뷔처럼 처음 그와 병실에서 만났던 그때처럼 마주했다. 그다음에 어땠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가현이 생각하는 사이 지한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와락 안았다.
“괜찮아? 앞으로 이런 일은 절대 없을 거야.”
당황스럽지만 이번 일로 그도 많이 걱정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고마우면서도 그의 걱정을 덜어주고 싶었다.
“저도 조심할게요.”
예전의 차지한은 이렇게 안지도 말하지도 않았다. 비슷한 상황을 떠올리면 그는 가현의 기억이나 트라우마는 안중에도 없이 조롱하던 남자였다. 가현은 평소와 다른 그가 낯설어 그의 얼굴을 살폈다.
“과호흡은 더 심해졌나?”
“아니에요. 최치수 사람들이 날 위협했어요.”
가현은 기억이 돌아왔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 우선 둘러대며 기억이 정확한지 확인한 후 이야기해도 늦지 않았다. 가현은 떠오른 기억의 진실 여부를 타진하느라 그의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지한은 한숨을 크게 쉬었다.
“며칠 치료받으며 쉬도록 하지.”
“집에 가고 싶어요.”
가현은 더 이상 트라우마에 시달릴 일은 없을 거라 확신했다. 돌아온 기억에 더는 병원에 있을 이유도 없었다.
지한은 가현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올려 눈을 마주쳤다. 가볍게 입맞춤한 지한이 가현을 설득했다.
“치료는 받고 가야 해. 혹시 모르는 일이야.”
“알잖아요. 트라우마만 아니면 별문제 없어요.”
그가 걱정하는 건 알지만 도움이 되지 않은 상담은 더는 받고 싶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야 기억을 더듬어 가족을 찾을 단서라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달려 나가 가족을 찾고 싶었다. 그에게 말을 할까 고민했지만, 기억의 진위를 가려내기 전까진 묻어두기로 했다.
다음날 가현은 평소보다 고집을 부려 간단한 검사만 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되었다.
퇴원하는 날도 지한은 이상했다.
“출근 안 하세요? 아버지와 돌아가면 돼요.”
가현의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온 교진은 지한만큼이나 놀라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두 남자가 유난스럽게 가현을 챙겼다.
가현은 출근도 하지 않고 자신의 옆을 지키는 지한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갑자기 변한 남자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다.
“왜 갑자기 나에게 잘해줘요? 너무 변해서 난 적응이 안 돼요.”
“네가 이런 말을 할 정도로 내가 소홀했군.”
지한은 가현을 보고 피식 웃었다. 그가 가현에게 다가와 입술을 겹쳤다.
살며시 겹친 입술이 가현의 상태를 살피고 괜찮다는 걸 확인 하는 것처럼 조금씩 거세게 가현의 입속을 가르고 들어왔다. 그의 옷자락을 잡고 그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지한의 키스가 길어져 숨이 차왔다. 어제 폐부에 느껴지던 통증이 생각나 얼른 입술을 떼었다.
그도 더는 다그치지 않고 숨이 가빠진 가현을 품에 안았다.
너무 달콤해진 남편은 적응이 안 되기도 했지만, 다시 그가 차갑게 행동할 걸 생각하면 겁이 나기도 했다.
좋은 것에 중독되면 그리워지는 것처럼 그의 사랑을 받아보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자신이 없는 금단현상처럼 무서웠다.
“지한 씨는 너무 극단적이에요. 너무 못되게 굴다가 너무 잘해주니 난 겁나요.”
“잘해줘도 문젠가?”
“이러다가 다시 차가워질까 봐요.”
가현의 양볼을 잡고 들어 올려 쪽 소리 나게 입술을 겹쳤다 떼었다.
“그럴 일은 없어. 네가 밀어내지만 않는다면.”
그는 진득한 눈빛으로 가현의 허리를 감아 다시 입안을 가르고 들어왔다.
교진과 명 비서가 퇴원 수속을 마치고 병실 문을 열었다.
“퇴원 절차는 다 마쳤습니다. 간호사가 링거……. 어 으흠.”
놀란 명 비서가 헛기침하며 얼굴을 붉혔고 교진도 당황한 눈치였다.
가현이 얼른 지한의 가슴팍을 밀어 떨어졌다.
“저, 저희는 조금 있다 오겠습니다. 필요하시면 부르십시오.”
두 사람이 못 본 척 어색하게 병실을 나갔다.
가현은 두 사람에게 창피해 울상이 되었다.
“이제 어떡해요, 아버지까지 봐 버렸잖아요.”
“우린 부부야. 이 정도 스킨십은 당연하지 않나?”
지한은 아무렇지도 않게 입꼬리를 올렸다.
“얼마 전까지 지한 씨라면 절대 없을 행동 아니에요?”
“네 숨이 꺼져갈 때 후회했어. 또다시 후회할 미련한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아.”
가현은 그의 행동이 조금 이해되었다. 자신은 정신을 잃어 알지 못했지만, 그때 인공호흡을 하지 않았다면 가현은 심정지가 왔을지 모른다 했다.
그는 처음 도로로 뛰어들었을 때 자신을 살렸고, 이번에 다시 자신을 살렸다.
“지한 씨, 당신은 날 두 번이나 살렸어요. 고마워요. 당신은 내 생명의 은인이에요.”
가현이 환하게 웃으며 그를 끌어안았다. 지한이 매달리는 가현을 안아주었다.
***
가현은 가족을 찾아야 했고 어떤 일이 있어 자기 가족이 그런 고초를 겪어야 했는지 알아야 했다. 지한은 안전을 생각해 경호원을 붙였지만, 가현이 완강히 거부했다.
“더는 위험하지 않아요. 경호원은 너무 지나쳐요.”
“최치수 그 자식 재판 중이야. 밑에 있던 녀석들 끌어드려서 충분히 나쁜 짓 할 가능성이 커. 만나봐서 알잖아?”
“알겠어요. 그럼 재판 끝날 때까지 외출은 안 할래요.”
안전은 지한에게 제일 중요한 문제가 됐다. 약속처럼 가현은 재판이 끝나기 전까지 저택을 벗어나지 않았다.
인터넷으로 알 수 있는 자료는 모조리 찾았다.
아버지의 회사명을 인터넷으로 검색했다. 포털사이트에 이 단순한 검색만으로도 사라질 때쯤 보도된 뉴스를 찾을 수 있었다.
가현의 동공이 커져 눈도 깜박이지 않고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쉬지 않고 모든 자료를 단숨에 정독했다.
한 가족의 몰락이란 타이틀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보고 가현은 울먹이며 어깨를 들썩였다.
“사람이 죽었어. 사람이 행방불명 됐다고. 너무하잖아.”
가현은 목을 놓고 울고 말았다.
자신은 가족을 잃고 괴로워하며 평생을 살아야 하는데 기사의 내용은 흥밋거리처럼 쉽게 몇 마디로 끝났다.
간단한 검색 하나로 주르르 기사들이 넘쳐났다. 기억을 잃지만 않았다면 절대 모를 수 없는 소식에 참담했다.
아버지는 죽었고, 엄마와 자신은 행방불명으로 종결된 사건이었다. 기억은 작은 조각까지 진실이었다.
모든 기억이 떠올랐지만, 비극이 왜 생겼는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은 많지 않았다. 아버지의 사업에 관심을 가져 본 적도 없는 평범한 대학생이 다였던 시절이었다.
그들은 협박 중 실수로 아버지를 죽였다고 했다. 한 가족을 망쳐놓았는데 실수라는 말로 끝나다니.
기사를 보는 동안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가현은 감정을 추스르고 이성을 찾으려 노력했다. 지금은 행방불명인 엄마가 우선이었다.
이번에 있었던 가현의 납치와 감금은 조용하게 끝나지 못했다. 오피스텔을 발칵 뒤집어 놓았으니 당연했다.
가현과 지한은 참고인 조사를 했고 오피스텔에서 자신을 구해 낸 이들이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최 이사의 말처럼 지한의 사업은 방대했고 어쩌면 나쁜 이들과도 손을 잡았을지 모른다고 추측했다.
최 이사는 발악했지만 일참 그룹에서조차 내쳐졌다. 최 이사는 재판 후 구속될 거라는 말을 건너 들었다.
“내일이면 외출할 수 있겠어. 무엇부터 해야 하지.”
인터넷으로 찾을 수 있는 자료는 모두 찾았다. 자신이 학교 다닐 때 친했던 친구들의 연락처까지 모조리.
하지만 막상 인터넷이 아닌 오프라인에서 무얼 찾아야 할지도 막막했다.
차를 마시던 가현의 머릿속에 문득 한가지가 떠올랐다.
연말 파티에서 자신을 서가현이라 부르며 아는 체했던 남자.
대학 동기였던 하주안.
하성 기업의 아들이었던 그는 가현의 집과 교류도 있는 기업가의 아들이었다.
가현은 그의 연락처를 수소문해 연락을 취했다. 행방불명인 자신이 불쑥 나타난다면 또 어떤 파장이 있을지 걱정되어 섣불리 드러내 움직이지 못했다.
어디서부터 찾아야 하나 난감했다.
그때 자신을 알고 있던 파티에서 만났던 남자가 생각났다.
“하주안.”
길들여지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