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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여지는 밤-48화 (4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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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때와 달랐다. 과호흡이 폐부를 찌르듯이 통증이 밀려들었다.

숨이 막혀 죽을 수 있다는 공포는 살이 떨릴 정도였다.

가현은 숨을 천천히 쉬려 해도 더는 마음처럼 되지 않아, 헉헉대기만 했다.

20분째 계속되는 욕지거리와 고성이 난무한 밖은 열 수 없으니 더 불안하기만 했다.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누군가 문을 벌컥 열더니 가현을 찾는 것 같았다. 화장실 문을 열려는 남자는 쾅쾅 문을 열라 화를 냈다.

“제기랄 얼른 문 안 열어!”

몸을 부딪쳐 강제로 열어젖힌 남자의 얼굴은 머리를 다쳤는지 피가 흘렀다.

그걸 보는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 급속도로 숨이 가빠지고 구석으로 뒷걸음질 쳤다.

남자가 악력으로 잡아끌어 가현은 뛰다시피 끌려 나왔다. 며칠 나오지 못한 오피스텔 거실에는 남자들이 여럿이 엉겨 붙어 싸움이 벌어졌다. 야구 방망이를 본 순간 자신이 머리를 부딪친 거처럼 오른쪽 머리가 아팠다.

울려대는 머리를 부여잡고 부들부들 떨며 주저앉았다.

끌고 가던 남자에게 다른 남자가 다가와 상황을 전했다.

“다 뚫렸습니다. 형님.”

“젠장! 비상 엘리베이터는?”

“그쪽으로 왔습니다. 가시죠.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가현을 끌고 가던 남자가 가현을 아래 부하에게 넘기고 빠르게 뛰어갔다.

부하는 가현을 어깨에 둘러메고 따라 뛰기 시작했다.

흐릿한 시야에 다른 모습이 겹쳤다.

눈을 찌푸려 한 곳을 응시했지만 윙윙거리는 소리에 다른 소리가 섞여들었다.

‘서 사장 이러다 당신 죽어.’

‘한 번만 기회를 줘.’

가현은 얼굴을 찌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환청을 털어냈다.

지금 공간과 다른 소리가 겹쳐 들었다.

한 무리가 웅성웅성 다가오더니 남자가 가현을 내려놓았다. 다시 시작된 싸움이 귓가를 울렸다.

여러 명이 뒤섞여 신음과 구타 소리가 난무했다.

가현은 구석에 머리를 감싸고 앉아 눈앞에 번쩍하고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섬광에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가현아, 지금 아니면 너도나도 위험해. 우리 둘 같이 움직이면 여길 못 벗어날지 몰라.’

‘엄마같이 안 가면 안 가요.’

‘너라도 빨리 도망가서 경찰에 연락해. 엄마는 괜찮을 거야.’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다가 가현을 밀어냈다.

‘네가 날 살릴 수 있어. 얼른 가.’

환청인지 현실인지 구분도 되지 않는 상황이 오고 가는 동안 가현은 패닉에 빠졌다.

가현은 등 뒤에 닿는 벽을 더듬어 일어섰다.

한 남자가 다가와 가현을 이끌었다. 소란한 틈을 타 남자가 가현의 팔을 잡고 당겼다.

“빨리 빠져나가야 합니다.”

나쁜 이인지 아니면 자신을 돕는 이인지 구분할 판단력도 잃은 채 휘청이며 걸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현이 구석에 앉아 숨을 헉헉댔다.

“괜찮으십니까?” 조금만 참으십시오.”

기억의 조각이 단발적으로 스치고 지날 때마다 머리는 깨질 듯 아파왔다.

‘정가현은 어때?’

지한의 깊은 눈매가 눈앞을 가득 메웠다.

블랙홀에 빨려들듯 장면들이 한 구멍으로 빨려들었다가 장면이 바뀌기를 반복했다.

‘가현이? 서가현 맞지?’

밀려드는 기억은 가현에게 공포였다.

***

치수가 지한이 있는 방으로 안내되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치수는 신이나 춤이라도 출 정도였다.

“결심이 섰나? 차 대표가 만나자는 일이 흔하지도 않은데 말이지.”

“답을 줘야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으니까.”

“그렇지. 이제야 말이 통하네.”

지한은 앞에 놓인 커피를 마시며 온화한 표정이었다. 그런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살벌할 정도라 지한이 말을 할수록 치수의 표정은 굳어갔다.

“네가 요구한 조건 하나도 들어줄 수 없어.”

건들거리던 치수의 행동이 멈췄다.

“되려 내 여자를 건드린 대가를 치러야 해.”

“여자가 위험할 텐데.”

“이미 네 애인 집에 있던 내 아내는 빠져나왔지. 한 가지 더 알려주지, 네가 수습할 수 있는 능력이 된다면 말이야.”

“…….”

“네가 나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으면 지금 일참 이사 자리는 사라지게 될 거야.”

“무슨 시건방진…….”

“일참 회장님이 하신 약속이야. 네가 충성하는 그 형님.”

치수는 두 손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굉음과 함께 테이블이 우지직 부서졌다.

“애꿎은 곳에 화풀이하지 말고 머리를 굴려. 지금이라도.”

표정이 없는 얼굴에 선을 하나 그은 것처럼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걸 보고 치수는 인상을 구겼다.

울려대는 전화에 치수가 험상궂게 눈살을 찌푸렸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치수 부하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형님, 장형원 이 새끼가 쳤습니다. 잡아놨던 여자는 놓쳤습니다. 지금 완전히 빠져나가지 못한 것 같아 찾고 있습니다.”

방 안 공기가 증발한 것처럼 숨이 막힐 만큼 팽팽했다.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치수는 상대가 조목조목 보고하는 말에 화가 치솟아 갈라진 목소리로 버럭 소릴 질렀다.

“찾아! 이 새끼야.”

전화를 내려놓은 치수가 지한을 노려보았다.

“아직 안 끝났어. 차지한. 네 마누라 잡으면 내가 어떻게 할 것 같아?”

“그릴 일은 다시는 없어.”

지한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순간, 그가 지한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는 한쪽으로 몸을 피해 큰 스윙으로 주먹을 날리는 치수를 피했다. 주춤하는 그의 팔을 잡아 꺾어 부서진 식탁에 내리꽂았다. 금이 간 식탁이 두 동강이 났다.

요란한 소리에 레스토랑 지배인과 직원이 들어와 놀랐다.

“테이블값까지 지불하지.”

지한은 소란스러운 상황을 돈으로 간단하게 해결하고 빠져나갔다. 바닥에 쓰러진 치수가 일어나 지한에게 가려고 해 지배인이 그를 말렸다.

“차지한 이리 안 와! 이 새끼 내가 너 가만둘 것 같아! 회장님이 어쩌고 어째. 날 그렇게 버릴 분이 아니야!”

“이사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다른 분들이 듣습니다.”

“뭐 딴 놈들을 뭐!! 내가 무슨 상관이야!”

지배인의 얼굴을 주먹으로 가격하며 지한에 대한 분풀이를 레스토랑 직원들에게 했다.

이성을 잃은 그를 말리지 못하고 결국 경찰까지 출동해 문제를 더 키웠다.

레스토랑을 빠져나온 지한은 오피스텔 쪽을 수습하고 있는 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 됐지?”

“오피스텔을 빠져나오긴 했지만 지금 사모님을 모시고 나온 직원과 사모님이 연락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가지.”

지한은 급하게 차를 몰아 오피스텔로 향했다.

오피스텔 안이 소란해져 거주자들이 밖으로 나와 웅성거렸다.

가현을 데리고 나왔던 남자는 가현을 감금했던 남자에게 일격을 당해 쓰러졌다.

남자가 쓰러진 모습이 아버지가 쓰러지던 모습과 겹쳐 보였다.

눈물을 툭툭 흘리며 동공이 커다래져 흔들렸다. 공포를 이기지 못한 가현은 옆에 쓰러진 남자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가현은 눈앞이 흐려지고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가 됐다. 가현의 비명을 손으로 막고 엘리베이터로 끌고 갔다.

“제기랄, 조용히 해.”

그녀를 끌고 가던 남자가 욕지거리해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걸 누군가 잡았다.

머리가 어지럽게 기억의 조각들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가현은 숨을 몰아쉬다 들이마시기도 전에 숨을 내뱉어 정신이 아득해졌다. 남자가 비명을 지른다고 막은 손 때문에 상태는 더욱 안 좋아졌다.

심장이 정지하듯 삐 하는 이명이 다른 소리를 잡아먹을 정도로 크게 들렸다.

입을 달싹이던 가현이 정신을 잃었다.

가현은 정신을 잃기 전 괜찮다며 웃어주던 엄마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

‘엄마.’

그녀의 눈가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엘리베이터로 들어온 몇몇 남자들이 가현을 끌던 남자와 옆에 있던 남자의 턱을 날렸다.

엘리베이터 안은 일방적인 싸움 소리만 울렸다.

누군가 가현의 상체를 끌어안아 흔들었다.

“가현아. 가현아!”

익숙한 목소리에도 가현은 반응하지 않았다. 호흡조차 희미해 느껴지지 않았다.

지한은 알 수 없지만 무언가 잘못됐다고 직감했다.

지한으로 나아질 한계를 넘은 몸에 호흡이 부족해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숨을 쉬어.”

지한이 입술을 겹쳐 숨을 불어넣었지만, 가현의 상태는 더 나빠지기만 했다. 지한의 품에서 그녀가 축 늘어졌다.

“119 불러!”

지한은 가현을 바닥에 눕히고 인공호흡을 시작했다.

“안돼. 숨을 쉬어. 숨을 쉬어야 해.”

지한은 가현을 불렀지만 도통 의식이 돌아올 줄을 몰랐다.

구급대원들이 달려와 그녀의 맥박을 확인하고는 앰부백(수동식 인공호흡기)으로 규칙적으로 산소를 짜 주입했다.

구급차에 타려는 지한에게 가현과의 관계를 물었다.

“환자분과 어떤 사이십니까?”

두 사람의 관계는 명확한데 선뜻 지한은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몇 초간의 시간 동안 정가현의 남편이라는 무게감이 새로웠다. 대답하고 나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것 같았다.

“남편입니다.”

“타십시오.”

핏기 없는 가현에게 응급처치 중인 대원은 정신없이 바빴다.

그 와중에 전화로 병상을 확인했다.

“세한 병원으로 가 주십시오. 서민호 교수가 주치의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녀의 손을 잡았다. 늘 따뜻했던 손이 다른 때보다 찼다.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득해졌다.

가현의 손을 꼭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길들여지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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