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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여지는 밤-45화 (4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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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남자는 자신이 기억을 잃은 건 어떻게 알았을까.

가현은 그의 말이 께름칙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과호흡을 더 부추겼다.

이 순간 지한이 떠올랐다. 자신을 지켜주던 그 남자가 오늘은 곁에 없다는 생각이 정신을 놓게 했다.

저만치 치수가 멀어져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숨을 뱉어냈다. 손이 덜덜 떨려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 통화버튼을 겨우 눌렀다. 차지한이란 이름이 떴다.

가현이 쉬어지지 않는 숨을 몰아쉬며 자신에게 다가온 보안요원에게 쥐어짜 내 말 했다.

“벼, 병원에 …… 연락 허헉, 해 주…… 세요.”

“사모님, 괜찮으십니까? 119로 연락해!”

옆에 있던 보안 요원이 급하게 소리쳤다.

“여기 백화점…….”

삐이.

산소포화측정기의 심박수가 사라진 것처럼 귀에 거슬리는 단음이 이어졌다.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이상 음이 커졌다. 호흡은 더 거칠어지고 손에 들린 핸드폰을 놓쳤다. 떨어진 핸드폰을 주우려고 손을 뻗다 앞으로 쓰러져 버렸다.

주위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가현에게는 한 사람만 떠올랐다.

‘지한 씨, 살려줘요.’

***

지한은 좀 전에도 울리던 가현의 전화가 신경 쓰였다.

릴레이 회의는 지루하게 흘러갔다.

결혼 전보다 시무룩한 그녀가 신경 쓰였지만 신혼여행 후 밀려드는 일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많았다.

원하던 바가 좌절된 라윤은 작정이라도 한 듯 일을 밀어붙였고, 거액의 돈이 걸린 모로코 건설사업도 진행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평소 전화를 하지 않던 그녀가 두 번이나 전화하는 일은 드물었다.

“10분만 쉬었다 하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어수선한 소리만 들릴 뿐 가현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여보세요? 정가현.”

“여보세요? 혹시 핸드폰 주인과 어떻게 되십니까?”

“당신 누굽니까?”

사무실로 돌아가던 지한이 복도에 우뚝 섰다. 그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 목소리는 날이 섰다.

“저는 로제 백화점 보안 요원입니다. 사모님께서 쓰러지기 전에 전화 버튼을 누르셨습니다.”

“남편입니다. 상태는 어떻습니까?”

“119를 불렀습니다.”

“세한 병원으로 이송 부탁합니다. 그곳에 주치의가 있습니다. 그쪽으로 바로 가죠.”

지한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며 전화를 걸어 차를 대기시켰다. 직접 운전하려 했지만, 명 비서가 말렸다.

자신이 없는 자리에서 가현이 쓰러지는 일은 지금까지 없던 일이었다.

늘 과호흡으로 자신을 찾았고 지금 같은 변수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젠장.”

명 비서가 도착 전 세한 병원에 연락해 서 교수에게 미리 전달했다.

병원 앞에서 기다리는 서 교수는 굳은 얼굴로 내리는 지한에게 바로 보고 했다.

“VIP 병동으로 이동했습니다.”

“상태는?”

“지금 안정제를 맞고 잠들었습니다. 깨어나시면 괜찮으실 겁니다.”

지한은 병실에 하얗게 핏기 없는 얼굴로 누운 가현의 이마를 짚었다. 따뜻한 온기가 안심되었다.

“어디를 가서 쓰러진 거지?”

“백화점 쇼핑 중에 최치수 이사를 만났다고 합니다.”

“최치수? 그 자식은 왜?”

생각지 않은 위험한 인물에 예민해진 지한은 명 비서를 보고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말할 수 없는 짜증이 치밀었다. 더 화가 나는 건 최치수를 만나고 난 후 쓰러져서였다.

지한은 주먹을 불끈 쥐고 화를 삭였다.

고저 없는 목소리에 화가 묻어났다. 자초지종을 보고 받은 지한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는 생각이 많은 듯했다.

“심상치 않아. 최치수 움직임 파악해 봐.”

알 수 없는 불안감에 가현을 돌아보았다. 가현을 보니 불안하게 흔들리는 촛불 같았다.

꺼지지 않게 지켜야 할 것 같은 그녀를 보고 지한은 자리를 뜨지 못했다.

***

가현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병원이었다.

정신은 돌아왔지만 아득한 목소리만 들렸다. 익숙한 낮은 목소리는 안심이 되었다.

“어떻게 된 거야?”

“과호흡 때문에 실려 왔습니다.”

“어디를 가서 그런 거지?”

“백화점 쇼핑 중에 최치수 이사를 만났다고 합니다.”

그의 손길이 가현의 이마에 느껴졌다. 차가운 체온이 지한이라는 걸 알고 긴장이 풀렸다.

웅웅 울려 들리던 대화 소리가 멀어지고 잠에 빠져들었다.

가현이 눈을 떴을 때는 와이셔츠 차림의 지한이 창가에 서 있었다.

“지한 씨.”

지한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가현의 얼굴을 확인했다.

“일어났나?”

“미안해요.”

“최치수를 만났다고?”

그는 깨어난 자신의 안부보다 꺼림칙한 그 남자를 먼저 물었다.

“네.”

“그 자식이 뭐라고 했어?”

고압적인 말투에 가현은 인상을 일그러뜨리고 그를 쏘아보았다.

“나 취조해요? 몸 괜찮냐 그거부터 물어야 하지 않아요?”

섭섭해 그에게 화를 냈다. 아무 말도 해주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과호흡 상태에서도 그만 떠올렸는데 그는 자신의 상태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미안해.”

“나가 주세요. 혼자 있고 싶어요.”

지한이 한숨을 쉬고는 병실을 나갔다. 그가 나간 걸 확인하고 눈물이 툭 떨어졌다.

자신을 달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그런 건 모르는 남자였다. 그조차도 섭섭하고 서러웠다.

“괜찮냐는 한마디면 됐다고. 이건 욕심이 아니야.”

그에게 섭섭한 건 자신의 욕심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욕심이 아니었다. 모르는 사람도 상황보다 아픈 사람의 상태를 걱정하는 게 당연했다. 그 당연한 게 욕심일 리 없었다.

“아무 말도 해주지 않을 거야.”

가현은 눈물을 닦으며 신문하듯 물었던 이야기는 해주지 않을 거라 혼자 되뇌었다. 그 작은 행동으로 그를 애태우게 하고 싶었다.

소심한 복수라도 해주고 싶은 애증이 가현을 외롭게 했다.

***

병원에서 퇴원 후 가현은 말수가 줄었다.

“정 실장님. 사모님과 이야기해 보셨어요?”

“말을 도통 안 해요.”

“큰일이네요.”

장원댁이 걱정해 물었지만 교진은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결혼하고 더 상태가 안 좋아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아닐 거예요. 결혼하고 대표님 조금 바뀌셨잖아요. 분명 괜찮아질 거예요.”

장원댁이 교진을 위로했다.

“그러길 바랍니다. 시간이 걸리겠죠.”

지한은 결혼 후 분명 예전보다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가현은 반대로 그의 곁에서 불안해 보였다.

겨우 결혼한 지 몇 주 만에 가현은 미소가 줄어 교진의 근심이 커졌다.

가현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창밖 계절이 바뀌어 새로 옷을 입는 정원을 보았다. 초봄이라 정원에는 꽃들이 새싹을 틔우고 색색의 꽃봉오리가 영글어 갔다.

싱그러운 봄기운이 가현의 마음도 어루만졌다. 백 회장의 생신 선물은 의외로 단순하게 결정됐다. 백 회장이 지한의 사무실을 찾아왔을 때 서 대리가 열심히 준비하던 차가 생각났다. 지병으로 커피는 마시지 않고 차에 심취해 있다고 했었다. 선물을 사려다가 좋지 않은 일이 생겼지만 그래도 좋은 의도로 했던 외출이었다.

“그래도 그 사람에겐 아버지 같은 분이고 결혼하고 첫 생신인데 챙겨야지.”

그는 절대 변하지 않을 테고 자신은 그를 떠날 수 없으니 털고 일어나는 방법 외엔 없었다.

가현은 손목에 팔찌처럼 끼고 있던 머리끈을 빼 포니테일로 머리를 질끈 묶었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은둔하던 침실을 나갔다. 교진과 장원댁이 대화를 나누고 있어 밝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혹시 지금까지 백 회장님 선물 지한 씨가 어떻게 준비했는지 아세요?”

그의 아내이지만 여전히 다른 이 보다 모르는 걸 인정하고 숨기기보다 물어보기로 했다. 그의 아내는 그냥 이름일 뿐이지만 그의 아내 역할은 잘하고 싶었다.

“제가 준비했습니다. 와인은 소량 드시니 최고급 와인을 준비하거나, 자동차를 수집하시니 차나 그림을 준비했습니다.”

“아버지 존댓말은 다른 분들로 족해요. 아버지까지 이러지 마세요. 지한 씨에게도 아버지 존칭은 듣고 싶지 않다고 미리 말했어요.”

교진에게까지 듣는 존댓말은 견딜 수 없었다.

“알겠어.”

“네, 감사해요.”

가현은 그제야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선물 준비 이번에는 제가 해야 할 것 같은데 잘 모르겠어요. 제가 기억하는 건 백 회장님께서 좋은 차를 선호하신다는 거예요. 좋은 다기와 좋은 차를 선물하면 어떨까 하는데 어때요?”

“좋은 선물일 것 같아. 백 회장님은 골동품도 좋아하신다 들었어. 예전에 대표님이 오래된 동양화를 선물하기도 했지.”

“오래 고민했는데 잘됐네요.”

“이제 제법 안주인 같으신데요.”

“정 여사님도 이렇게 있을 때는 말 놓으시면 안 돼요?”

가현이 부탁하듯 간절한 눈빛으로 장 여사를 보았다.

주위를 두리번 둘러보고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는 장 여사가 눈을 찡긋하고는 대답했다.

“그럴까? 하지만 정말 사석에서만이야.”

“그럼요. 감사해요.”

장원댁의 사람 좋은 웃음에 가현도 따라 웃었다.

길들여지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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