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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아침 햇살에 황금빛 모래가 삽시간에 뜨겁게 달궈져 서늘했던 새벽을 금세 앗아갔다.
침대에 덩그러니 남겨졌던 가현 옆에 역시나 그는 없었다.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말아 누웠다. 추웠던 새벽보다 햇살에 올라간 기온이 더 낮게 느껴졌다.
데리아에 해를 가릴 천으로 두건까지 말끔하게 쓴 그가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두 손에는 음식을 양손 가득 들고 다가왔다.
“생각보다 일찍 일어났군.”
“시간이 얼마나 됐어요.”
“9시 반이야.”
“잠을 전혀 안 잤어요?”
“잤어. 네 살냄새 맡으며.”
가현은 빙글빙글 웃으며 말하는 지한 때문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가현이 있는 침상에 옷을 가져다주고 돌아서 음식을 챙겼다.
“빨리 와. 음식이 다 식어.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치고 안겨서 여기 앉혀지고 싶지 않으면.”
가현은 뒤돌아 옷을 챙겨 입고 그가 차려 놓은 아침 식탁에 앉았다. 어제보다 음식 숫자는 줄었지만, 사막에서 주식으로 차린 소박한 식탁이었다. 그래도 그와 함께 마주 앉아 먹는 식사가 정말 그와 부부라는 실감이 나 좋았다.
소박해도 그가 가져와 차린 식탁에 앉을 일은 흔치 않았다.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식사 끝나면 곧 출발할 거야.”
“또 낙타 타고 이동해요?”
전날 낙타를 타고 중심을 잡느라 긴장했던 게 생각이 났다. 오늘은 낙타보다 더 긴장하게 했던 차지한 때문에 몸이 말이 아니었다. 지금 낙타를 탄다면 몸살이 단단히 날 것 같았다. 가현이 낙타는 못 탄다며 못을 박았다.
“난 낙타 못 타요. 다 당신 때문이에요.”
“걱정하지 마. 오늘은 자동차를 타고 이동할 거야. 한국 돌아가면 운동을 꼭 시켜야겠어.”
식사를 마치고 짐을 꾸렸다. 전날보다 더 맑은 파란 하늘이 황금빛 모래와 선명하게 대비를 이뤘다. 사륜구동 자동차 세 대가 준비되어 있었다. 지한이 직접 운전하는 차를 타고 사막 위를 빠르게 달렸다. 낙타만큼이나 흔들리는 차도 만만치 않게 힘들었다. 다행히 떨어질 염려는 없었다.
그렇게 액티비티한 사막 여행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시원하게 샤워를 마치고 이 층 테라스에 기대어 레모네이드를 마셨다. 저 멀리 겹겹인 사막언덕을 바라보며 어제를 떠올렸다.
“사막의 밤하늘은 정말 그리울 것 같아.”
가현이 옅게 미소를 지으며 그와 나란히 모래언덕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던 모습을 떠올렸다.
***
“또 여기서 잠들었나? 자정이 넘었어.”
“이제 퇴근하셨어요?”
오늘도 별채에서 잠이 들었다. 가현은 소파에서 일어나 머리를 쓸었다.
“잠자리가 불편한가?”
“아니요. 좋아요.”
“그런데 왜 일주일에 네 번은 이곳에서 잠들어 있어.”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일상은 평온했다.
모로코의 파란만장했던 여행이 꿈같이 아득할 정도였다.
모로코 사업이 진행될수록 지한은 더 바빠졌다.
회사에 출근도 하지 않는 삶은 무료하기만 했다. 결혼 후 사용인들은 가현을 어려워했다.
지한이 없는 시간 별채로 숨어드는 건 가현의 일상이 되었다.
가현은 잠자리에 들기 전 커다란 침대가 지독히 싫었다.
“침대가 너무 커요.”
“이 온실은 더 크지. 잠자리로 삼기에는.”
“…….”
고압적인 표정과 말투도 늘 똑같았다.
결혼 후 그와 마주치는 시간은 줄었다. 결혼이 특효약인지 아니면 사람들과 마주침이 줄어서인지 가현의 트라우마 현상은 현저히 줄었다. 그걸로 만족해야 하는데 결혼은 사람을 바꿔놓는지 그에게 기대하게 됐고 그만큼 실망도 커졌다. 가현은 욕심을 내려놓으려 자신을 세뇌해도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오늘 병원은 왜 가지 않은 거야?”
“요즘 증상도 줄었어요. 치료는 필요 없어요.”
“그건 의사가 판단할 일이야.”
결혼 후 지한은 트라우마 치료를 받게 했다.
떠오르지 않는 기억을 매번 질문하는 의사도 지겨웠고 증상도 줄어 치료를 거부했다.
“도움이 되지도 않는 치료에 힘 빼고 싶지 않아요. 늦었어요. 쉬어야죠.”
지한이 스쳐 지나가는 가현을 잡았다.
“신혼여행 후부터 넌 날 피해.”
“그 반대예요. 당신이 너무 바빠요. 신혼여행 이후에 자정 넘지 않은 게 손에 꼽을 정도잖아요.”
“처음에는 결혼만 해달라더니, 다음은 옆에 있어 달라. 점점 요구 사항이 많아지는 것 같지 않나.”
결혼은 혼자 한 것이 분명했다.
가현은 지한을 올려다봤다.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을 보고 더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외사랑엔 답이 없고 상대는 절대 알지 못한다. 그의 냉정한 말이 아팠다.
“사모님, 백 회장님 생신이 일주일 후인데 생각하신 계획 있으세요? 대표님은 늘 준비하셨어요.”
“생신이 얼마 안 남았군요.”
장원댁은 결혼 후 호칭과 존댓말을 철저히 지켰다. 다른 사용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격식 없이 지내고 싶은 가현의 마음은 중요치 않았다. 지한을 대하듯 존댓말과 깍듯한 태도는 가현조차 그들을 피하게 됐다.
“지한 씨와 상의해 볼게요.”
가현은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이 집의 사용인보다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아버지 같은 백 회장의 생신은 생각지 못하고 지낸 가현은 갑자기 바빠졌다.
결혼 후 첫 대소사이기도 해 잘하고 싶었다.
가현은 서둘러 외출 준비를 하고 백화점으로 향했다. 어떤 걸 선물할지 감이 오지 않아 우선 쇼핑하며 찾아보기로 했다.
넥타이, 넥타이핀과 커프스, 만년필, 신발 등등 여러 가지를 보았지만 산 물건은 없었다.
백화점의 고급스러운 물건들은 넘쳐나게 많았지만 백 회장에게는 흔하디흔한 물건들이었다.
백 회장의 취향을 잘 알고 있을 그에게 기대 없이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들리다 낯선 안내 음성을 듣고 끊었다.
역시나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가현이 운전기사에게 전화를 걸려던 참이었다. 먼저 인사를 해오는 남자의 목소리가 음습했다.
뒤를 돌아본 가현의 얼굴이 하얗게 변해갔다.
“이게 누구신가? 차지한 따까리에서 신분 상승한 그때 그 아가씨네.”
“…….”
치수만으로도 불안한데 그의 뒤에 선 검은 정장의 남자들 시선이 무섭게 목을 조이는 것 같았다.
목구멍이 막혀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아, 미안. 미안. 이제는 사모님이라 해야 하나?”
“…….”
“우리가 처음 보는 사이도 아닌데 인사는 하고 살아야지, 차 대표도 결국 우리 식구인데.”
“무, 무슨 일이시죠?”
가현은 얼어붙은 채 온몸이 곤두서 남자를 경계했다. 그걸 직감했는지 남자는 연신 가현을 놀라게 해 미안하다며 가현에게 살갑게 굴었다. 가현은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심기를 드러냈다.
‘잘했어! 정가현. 쓰러지면 안 돼.’
스스로 잘했다 격려하고는 자리를 어떻게 빨리 빠져나갈지 고민했다. 눈앞에 있는 그가 빨리 사라지길 바라는 마음은 어설프게 뒷걸음질로 나타났다. 그녀의 겁먹은 행동에 사방이 트인 명품관에서 억울했던지 치수가 억울한 내색을 비췄다.
“내가 나름 배려해줬는데, 느끼지 못했나? 아, 너희 내 뒤에서 인상 썼냐?”
“아닙니다. 이사님!”
치수가 부하에게 다그치는 과한 제스쳐는 가현을 더 위축시켰다.
고개를 숙여 그의 높아지는 목소리와 부하들의 대답 소리에 놀라 어깨가 한껏 올라갔다.
“아니면 됐고. 아니라는데 이러면 섭섭하지.”
명품관에서 신고가 들어갔는지 앞에서 보안 요원 몇 명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문제가 있으면 저희가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이런 상황을 많이 겪었는지 치수는 살벌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안면 있는 사이라 인사한 거라고.”
가현에게 다가가 치수를 알고 있는지 확인해 치수가 더 화가 났다.
“혹시 저분들 알고 계십니까?”
가현은 뒷걸음질만 하다 중앙에 놓인 소파에 걸려 앉았다. 숨을 몰아쉬며 사색이 된 얼굴을 보고 한 사람이 가현에게 물었다.
“사모님 괜찮으십니까?”
“하. 여기 VVIP로 그렇게 팔아줬는데 나에게 이렇게 대하나? 내가 누군 줄 알아 니들? 내가 일참 그룹 최 이사야!”
이들 중 관리자로 보이는 이가 빠르게 통제실에 연락해 치수의 신원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신고받고 왔습니다. 오해가 있었나 봅니다.”
깍듯하게 90도로 인사하는 보안 요원을 보고서야 치수가 조금 누그러들었다.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닌데 말이야. 조심해.”
“네, 최 이사님. 자리를 따로 마련해 드릴까요? 그런데 사모님께서 몸이 안 좋으신 것 같습니다.”
치수의 눈치를 보며 가현을 보호하려 했다.
“여기 신 대표 섭섭하네! 저 길바닥의 양아치 새끼로 만들고 말이야. 별 할 말도 없어.”
치수는 자리에 앉은 가현에게 다가왔다.
“이봐요. 정가현 사모님.”
자신의 이름까지 알고 있는 치수에게 놀라 그를 보았다.
“기억도 없다던데 정신 잘 차리쇼, 알고 보면 우리보다 더 이 바닥의 양아치 새끼는 당신 남편이란 말이야. 다음에 볼 때는 인사치레 말고 의미 있는 대화를 찐하게 해봅시다.”
그는 빙글빙글 웃으며 알 수 없는 말로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가현은 호흡이 이상하게 변해가 점점 식은땀을 흘렸다. 눈앞이 흐려져 눈만 껌벅였다. 그 와중에 가현을 보고 웃는 모습이 소름 끼쳤다.
“가자. 여기 더 있다가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르겠다.”
“네!”
치수가 걸어가며 옆에 따라오는 부하에게 지시했다.
“사람 붙여라. 조만간 써먹게.”
“네, 형님.”
치수의 입꼬리가 타깃을 제대로 잡았다.
길들여지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