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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여지는 밤-37화 (3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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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들키기 싫어 엉뚱한 말로 그의 관심을 돌렸다.

“백 회장님 만나 조심해야 할 말이 있나요?”

“호칭 그리고 포커페이스.”

“네.”

가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지한이 돌아서 방을 나갔다.

가현이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크게 쉬었다.

“이름 한번 부른 걸로 이렇게 바보같이 굴어.”

설렌 마음은 오래 여운을 남겼다.

***

테이블에 앉은 백 회장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최근 사용해 익숙하지 않은 지팡이 손잡이를 문질렀다.

지한이 들어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나도 늙긴 했지. 노인네처럼 이런 지팡이를 쓰고 있잖아.”

지한임을 알고 백 회장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

“아직 정정하십니다.”

“이 자식, 젊다고 해야지. 정정하다는 말은 네가 늙은이라는 말을 돌려서 까는 거잖냐.”

지한에게 핀잔을 주는 그는 껄껄 웃었다.

“100세는 거뜬히 사십니다.”

“100살만 살라고.”

“욕심도 많으십니다. 저보다 오래 사시면 되지 않습니까.”

오가는 농담은 익숙했고 서로가 잘 이해했다.

“네 결혼 소식을 듣고 라윤이는 말이 없어.”

“죄송합니다.”

“나쁜 녀석, 내 딸이 그렇게 싫었냐.”

“아시지 않습니까. 라윤이는 저에겐 동생입니다. 회장님이 제 아버지라고 생각하는 것처럼요.”

“나도 섭섭해.”

“알고 있습니다. 자식이란 놈들은 다 부모님을 실망시키죠.”

“말이나 못 하면, 쯧쯧”

노크 소리가 들리고 가현이 방으로 들어왔다. 상기된 얼굴로 백 회장에게 인사하는 그녀는 긴장한 얼굴이었다.

“정가현 씨를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 저 녀석이 여자를 옆에 두는 걸 처음 보긴 했지만 말이요.”

“말씀 낮추세요.”

“그럽시다. 결혼 축하해요.”

“죄송합니다. 백 본부장님이 지한 씨에게 어떤 마음이었는지 알아요.”

“아직 호칭이 익숙하지 않구먼. 익숙해지도록 노력해 봐.”

머뭇거리는 호칭에 백 회장이 미소를 지었다. 눈치 빠른 그를 피하지 못했다.

“네, 대표님이라 부르는 게 아직 편합니다. 앞으로 지한 씨에게 도움이 되도록 노력할 겁니다.”

“좋은 자세야.”

오붓한 식사 자리에 오가는 말들이 농담 같았지만 그만큼 내공이 있는 대화였다. 가현은 두 사람의 기에 눌리지 않으려 노력하느라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실 때였다.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지배인이 따라 들어왔지만, 백 회장의 저지에 물러갔다.

“여기 커피 한잔 갖다주세요.”

라윤이 들어와 백 회장의 옆에 앉았다. 그녀는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을 묵묵히 보았다.

그녀는 가현은 없는 사람 취급했다.

“두 사람 다 너무 하네요. 이런 식사 자리에 나만 쏙 빼는 건 너무 하잖아요.”

“저 녀석이 나만 불렀어. 넌 왜 온 거냐?”

“아버지도 똑같아요. 오빠가 그랬어도 아버지는 부르셔야죠.”

“결국 애비 탓이구먼. 자식이 그런 거지.”

백 회장은 아무렇지 않은 척 지한 탓을 했지만 라윤의 화살이 자신에게 향하니 투덜거렸다.

“이 결혼은 축하 못 해요. 인정하지도 않고요.”

세 사람은 라윤의 말에 입을 닫았다.

“두 사람이 평생 함께 살 거라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니 살아봐요, 결혼이나 동거나 뭐가 달라.”

라윤이 거침없이 말하며 선을 넘었다. 백 회장도 라윤의 화난 마음은 알아도 지한만큼이나 선은 지키는 사람이었다. 백 회장은 농담을 걷어내고 진지하게 딸을 불렀다.

“라윤아.”

“네, 여기까지만 할게요.”

백 회장의 묵직한 부름에 라윤도 그만두었다.

“식사는 이쯤 하지. 라윤이는 따라와.”

백 회장이 일어나 모두가 함께 일어났다.

“결혼식장에서 보자. 잘해주길 바란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가현의 말에 삐딱하게 보고 있던 라윤이 뒤 따라 나갔다.

라윤과 백 회장이 함께 차를 탔다.

“오늘은 경솔했다.”

“알아요.”

“이젠 지한이라도 신중해져야 한다.”

“무조건 가지려는 바보스러운 짓은 이제 하지 않을 거예요. 기다릴 거예요. 제때를요.”

백 회장도 거기까지는 말릴 수 없었다.

딸의 맹목적인 지한 바라기를 알고 있으니 그녀를 말려 오히려 엇나가게 할 수 없었다.

결혼을 준비하며 주위에서 하는 말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결혼을 알고 있는 여자들은 하나같이 신혼여행지가 중요하다며 원하는 곳을 꼭 가라고 말했다.

가현과 지한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은 가현에게는 공허하게 들릴 뿐이었다.

“결혼은 형식이야. 약식으로 하려고 해. 결혼에 로망이라도 있나?”

“아니요, 아버지께서…… 정 실장님께서 결혼식은 꼭 해야 한다고 하세요.”

“나에게도 와서 그러더군. 그래서 간단하게 소수만 모인 결혼식을 하려고 해. 결혼식에 의미를 두지 않는 나로선 참을 수 있는 건 이 정도야.”

그의 말대로 간단한 결혼사진을 찍고 결혼반지를 맞추고 결혼 준비는 간소하게 그리고 빠르게 진행됐다.

달콤한 결혼은 꿈꾸지 않았어도 지금 같은 결혼은 생각지 않았다. 너무 건조하고 형식적인 결혼은 가현의 행동까지 위축시켰다.

지금 같은 영혼이 빠진 듯한 결혼 준비는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걸렸다.

“결혼은 간단하게 해결되겠어. 신혼여행은 모로코로 가지.”

지한은 비즈니스 목록을 확인하듯 결혼 절차를 정리한 리스트를 들추었다.

모로코는 입찰로 알게 되었지만 낯설었다.

“모로코요?”

“그곳에 있는 회사와 시에라리온 국영사업으로 출장을 가야 해. 신혼여행 겸 가면 시간을 줄일 수 있겠어.”

“아! 네.”

결혼식이 끝나고 신혼여행을 바로 떠나기로 했다. 신혼여행지 결정은 타의로 간단하게 해결됐다. 가현의 의견은 염두에 두지도 않은 태도였다.

그는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꺼려 결혼식 직전에 언론에 알려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간소하게 30여 명의 사람만 모인 결혼식이라 떨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신부대기실에 앉아 시간이 가길 기다렸다. 기쁘기보단 마음은 복잡했다.

기억이 있었다면 부모님이 축하하는 결혼식을 했을 것이다. 자신이 기억하는 친구도 가족도 없는 결혼식은 생각해보지 않아 착잡했다.

신부대기실로 생각지 않은 손님이 들어왔다. 절대 오지 않을 하객이라 생각한 라윤은 부케를 든 가현에게 다가왔다.

라윤이 무표정한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새하얀 도화지처럼 표정 없던 얼굴에 스마일 얼굴을 그려 넣듯 입꼬리를 올린 모습이 진짜 웃는 것 같지 않았다.

“내가 올 줄 몰랐나 봐요?”

역시나 라윤은 당황하는 자신을 보고 싶었을지 몰랐다. 그녀보다 더 당당하게 오늘 결혼식의 주인공으로 인사를 건넸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음…… 그 인사 어색하네요.”

가현은 그녀에게 들킨 것 같아 솔직하게 말했다. 역시나 가식은 자신과 어울리지 않았다. 가현은 한숨을 푹 쉬고는 라윤을 보고 솔직하게 말했다.

“오실 줄 몰랐어요, 이렇게 인사하시는 것도 불안하고요.”

“가식보다 좋네요. 지한 오빠만 아니었다면 우린 좋은 친구가 됐을 텐데.”

“왜 오신 거죠?”

“그저 보고 싶었어요. 두 사람의 시작과 끝을 다 알고 싶거든요. 지금은 그 과정이고.”

“전 그분 곁에서 떠나지 않을 거예요.”

가현은 못 떠나는 거라 되뇌며 그녀가 또 어떤 말로 불안하게 만들지 경우의 수를 생각했다.

그러나 항상 예측은 빗나갔다.

“그건 지나 봐야 알죠. 난 당신을 돕진 않을 거예요. 하지만 억지로 끌어내릴 일도 없어요.”

“그게 무슨 말씀이죠?”

알 수 없는 말에 짜증이 났다. 그녀는 핸드백을 고쳐 들고 정확하게 알려주었다.

“이게 끝이 아니라는 말을 하려고 왔어요. 그 자리는 당신 스스로 내려오게 될 거예요.”

가현의 얼굴이 굳었다. 예언처럼 하는 말이 저주와 무엇이 다를까 싶었다.

“지금 악담 같은 거 아시죠?”

“충고예요. 감당하기 힘든 자리니까. 그러니 지금을 즐겨요.”

“백 본부장님이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앞으로는 알아서 하죠.”

“그래요.”

쿨한 척했지만, 그녀는 절대 지한에게서 멀어지지 않을 게 뻔했다. 꼭 애인을 뺏긴 여자처럼 행동하는 그녀가 싫었지만 백 회장이 지한을 배려했던 것처럼 지한도 백 회장을 위해 라윤을 배려한다는 걸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가 참아줄 수 있는 선을 그녀는 자신보다 잘 알고 있어 싫었다.

결혼식 날 복잡한 마음은 더 엉망이 되었지만 그런 마음조차 챙길 시간도 없이 결혼식은 시작되었다.

서로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줬을 때 알 것 같았다. 결혼식이 가지는 의미는 그냥 형식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함께하겠다는 약속 그 이상의 무게감은 왜 교진이 친정아버지처럼 결혼식은 꼭 해야 한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결혼식은 정신을 차릴 틈도 주지 않고 순식간에 지나갔다. 식이 끝나고 이 정도가 간소하다면 정식으로 하는 결혼식은 어떨까 싶어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모로코로 떠나는 직항은 있지도 않을 정도로 먼 북아프리카였다. 평생 북아프리카에 지금이 아니면 가볼 수 있을까 생각하니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 생각했다.

그의 비즈니스 일정에 맞추다 보니 경유지와 신혼여행지는 자동으로 정해졌다.

말은 신혼여행이지만 일을 처리하기 위해 명 비서가 함께 떠나 비즈니스 출장이 더 어울렸다.

비행기는 평범하지 않았다. 거실을 연상케 하는 소파와 좌석이 배치된 넓은 공간과 침실까지 있는 호화 비행기였다. 비행기 안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놀라 두리번거리니 뒤따라 들어오던 명 비서가 알려주었다.

“모로코 왕실에서 결혼 축하로 준비해 준 비행기입니다. 신혼여행까지 모로코로 간다고 하니 이렇게 성의를 표시하는 거겠죠.”

“모로코 왕실요?”

“네, 대표님이 신혼여행 중에 미팅을 제안했으니 그들도 모른 척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렇군요….”

모로코 왕실을 움직이는 이 남자의 재력이 얼마인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길들여지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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