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길들여지는 밤-35화 (3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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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다면?”

“저만큼 검은 바닥을 끌어모았던 분이 회장님이시죠. 지금이야 제가 넘겨받다시피 했지만 일참 회장님과 백 회장님 두 분은 쌍벽이었습니다. 제게 장형원을 흡수할 수 있게 도운 회장님도 장형원이 삼중이 된 상황에 내막이 드러나서 이득이 될 일은 없죠. 잘 아시지 않습니까.”

말을 하는 지한도 듣는 백 회장조차 눈빛이 날카로웠다. 지한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디테일한 상황을 인지시켜 주었다.

“이게 언론에 밝혀지면 어떻게 될까요? 아니면 라윤이가 알게 되어도 머리 아플 겁니다. 플러스, 검찰은 아주 구미가 당기겠죠.”

“이게 맞짱이야.”

백 회장은 백발이 성성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서류를 짜증스럽게 던졌다. 백 회장이 곤란할 때 하는 행동임을 지한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라윤이는 모로코 사업을 일참 그룹에 넘기는 계획까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백 회장은 ‘흠’ 소리를 내며 딸의 무모한 협박에 혀를 찼다.

“적당히 했어야지.”

“전 라윤이가 좋은 경영자가 될 거라 생각합니다.”

지한의 말에 동의하지 못하는 백 회장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지금 이 꼴로 회사를 흔들릴 상태로 만든 놈을 무슨.”

“저만 포기한다면 너무나 이성적인 녀석입니다.”

“그렇게 싫냐?”

백 회장은 라윤과의 결혼을 진지하게 물었다. 지한은 이 대답으로 판가름이 날 것을 짐작했다.

“라윤이를 불행하게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제게 정략결혼은 무의미합니다.”

백 회장이 고심에 빠졌다.

라윤이 녀석을 좋아했고 자신도 성인이 된 지한을 사윗감으로 점찍었었다. 하지만 아들 같은 그를 잃고 싶지 않았다.

라윤이 칼을 들이미니 총을 목에 가져다 데는 놈과 적이 되는 바보는 아니었다.

“이 자료의 내용이 밖으로 알려지는 순간 나도 가만 있을 순 없다. 약속할 수 있냐?”

지한이 재킷 안 주머니에서 파일이 담긴 메모리 스틱을 꺼냈다.

“원본 자료입니다. 약속드리죠.”

“아이고 우리 라윤이를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네 놈 때문에 내가 머리가 아파!”

“저 같은 놈을 찍은 라윤이 낮은 눈을 탓하셔야죠.”

“도저히 안 되겠어. 사우나나 가자. 네 일정은 나도 몰라 오늘은 고생 좀 시켜야지.”

“얼마든지 고생하겠습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백 회장은 지한을 탓했다. 지지 않고 말을 받아치는 지한의 의견은 묻지 않고 백 회장은 비서실장을 불렀다.

***

그녀와 지한의 결혼은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이상적이었다. 잘 나가는 두 그룹의 결합, 잘난 두 사람의 결합. 무엇 하나 빠지지 않고 모두가 당연하다 생각할 커플이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지한이 필요했다. 그의 별채에 들어선 이후로 가현은 그와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관계가 되었고 조금 다른 친밀함이 생겼다.

가현의 달라진 태도에 교진도 눈치를 챘다. 한창 생각에 빠져 있던 가현은 교진에게 먼저 용기를 내었다.

“가현아 또 무슨 일 있는 거야?”

“대표님이 곤란하세요.”

“곤란하시다니 큰일이 있는 거니?”

“결혼 문제로요, 전 대표님이 아니면 안 돼요. 결혼해야 할 사람이 필요하다면 보잘것없지만 제가 하고 싶어요.”

“뭐? 무슨 말이니?”

“저 대표님과 결혼하려고요.”

교진은 가현의 무모한 용기에 할 말을 잃었다. 가현은 결심이 섰는지 지체하지 않고 늦은 저녁 지한이 쉬던 방문을 노크했다.

“들어와.”

지한을 바라보는 눈빛은 간절했다.

“대표님.”

지한이 다음 말을 기다리며 돌아보았지만 불러놓고도 말이 없었다.

지한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는 귀찮다는 듯 한마디 했다.

“불렀으면 용건을 말해. 아니면 나가든지.”

그는 창가에 놓은 1인용 리클라이너 의자에 긴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흰 와이셔츠를 걷어 올리고 일을 하던 그의 모습은 일하는 남자의 전형 같았다.

손에 들린 위스키 잔에서 얼음이 녹아내려 덜그럭 소리를 내었다. 조용한 방안 팽팽한 긴장감에 위축된 가현이 그 작은 소리에 움찔했다.

지한의 입술을 타고 들어가는 위스키가 넘어가 목울대가 꿀렁거릴 정도로 움직였다.

그걸 보면서 왜 자신이 침을 삼키는지 알 수 없었다.

가현은 차마 말을 내뱉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벌서는 아이처럼 서재 문 앞에 서 있었다.

지한이 더는 참지 못하고 끊어냈다.

말이나 행동이 길어지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남자이니 당연했다.

“나가.”

“저와 결혼해 주세요.”

지한이 입으로 가져가던 위스키 잔을 멈추었다. 매섭게 쏘아보는 눈빛이 들은 말을 곱씹는 것 같았다. 가현의 의중을 판단하는지 미간을 좁히고 눈썹이 일그러졌다.

“지금 한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는 해?”

그는 가현이 겨슬려 미간을 좁혔다.

“네 대표님도 저도 서로가 필요해요.”

“솔직해지지.”

“…….”

“내가 아니라 내 몸이 필요하겠지. 말 같지 않은 사랑 따위 운운하지 마.”

그의 눈이 날카롭게 가현을 가르고 보았다.

이기적인 욕심도 있다고 하지만 그를 향한 마음은 분명 있었다. 가현은 그가 들키지 말라던 마음을 철저하게 숨기며 그가 기다리는 대답을 내어놓았다.

“네, 당신 몸이 필요해요.”

“그래, 그게 더 현실적이고 납득이 되네.”

그는 당황한 것이 분명한데 말은 평이해 더 긴장됐다.

“결혼해요.”

“…….”

입으로 내뱉고 나니 결심이 섰는지 그녀치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한마디만 녹음된 인형처럼 ‘결혼해요’만 반복했다. 그런 가현을 속내를 꿰뚫어 볼 것처럼 찬찬히 살폈다.

지한은 긴장해 손을 꼭 쥐고 어깨에 잔뜩 힘을 준 모습을 주시했다.

그가 협탁 위에 위스키 잔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네가 말하는 그 결혼 상대를 잘못 찾았어. 좀 더 착한 놈을 찾았어야 해. 나 같은 놈 말고.”

“결혼해요.”

지한과 결혼을 하는 것이 일생일대의 목표인 것처럼 세 번째 결혼하자는 말을 내뱉은 가현은 처음보다 여유로워 보였다.

지한이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가현을 감상하다 몇 발짝 앞에 섰다. 침묵이 이어졌고 두 사람은 말없이 바라보았다.

“섹스 상대가 필요하다면 그건 기꺼이 되어줄게. 지금처럼.”

“아니요. 결혼해 주세요.”

“그 말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는군.”

지한이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와 입꼬리를 올렸다.

한 발짝 거리에 오자 키 차이로 가현은 그를 한참 올려다보았다.

지한이 가녀린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매서운 눈매가 목덜미를 뚫어지게 보다가 눈을 응시했다.

옮겨지는 시선이 가현의 얼굴을 타고 올라 고스란히 느껴졌다.

“결혼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해요. 백 본부장님과 결혼하고 싶지 않지만, 결혼이 필요하다면 저와 해요.”

그는 말을 아끼듯 공백을 두어 다음 말을 기다리게 했다.

“너와 결혼한다면 상황은 단순해지겠군.”

그의 눈매가 길게 가현을 쏘아보았다.

“그러니 이용하세요. 저도 대표님도 서로가 필요하니까요.”

시선을 돌리지 않고 두 사람은 서로를 보았다.

“만약… 네가 내 여자가 되면… 죽어서도 나한테서 못 벗어나.”

그 다운 허락이었다.

지한의 경고 같은 음습한 말투였지만 가현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목덜미를 움켜쥔 손의 체온에 실감이 나서 마른침을 삼켰다. 늘 서늘한 그의 손은 몸에 닿으면 소름이 돋았다. 보통 사람의 체온보다 낮아 사람 같지 않은 손의 감촉이 무척이나 위험했다.

“네… 알아요.”

“후회해도 그땐 늦어.”

목덜미를 쥔 커다란 손에 힘이라도 주면 숨이 끊어질 것 같은 강직한 느낌에 긴장했지만, 결혼하겠단 결심을 물릴 수 없었다.

그는 한 번 더 기회를 주듯 말했다.

지한의 진득한 눈빛이 입술로 향했다. 느린 그의 행동이 더 숨 막히게 해 고개를 숙였다.

“저 어린애 아니에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의 촉촉한 입술이 닿았다. 가현의 눈꺼풀이 자신도 모르게 감겼다.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 목덜미가 조금 더 젖히고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위험한 손길과 함께 그의 부드러운 입술이 사납게 가현을 삼켰다.

가현은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그는 긴 키스에 입술을 떼는 가현을 다시 찾아 들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그에게서 벗어나려 해 지한이 한쪽 팔로 들어 올려 책상 끄트머리에 앉혔다.

넓은 책상 위를 손으로 쓸어내려 물건들이 바닥을 나 뒹굴었다.

지한이 책상에 누운 그녀를 감상하듯 내려다보며 손에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풀어 리클라이너 소파에 던졌다.

자기 셔츠를 풀며, 낮은 목소리로 가현에게 읊조렸다.

“오늘은 잠들지 마.”

음습한 눈빛, 낮은 내리까는 목소리, 드러난 잘 짜여진 그의 근육. 그는 그대로 바지 버클을 풀었다.

그의 느린 행동에 마른침을 삼켰다.

지한은 경고처럼 가현에게 밀려들었다.

길들여지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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