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길들여지는 밤-34화 (3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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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네가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해?”

“최선을 다해서 움직여 보려고.”

“…….”

“이렇게까지 싫다는 나와 결혼하자는 널 이해할 수가 없어.”

“오빠가 모든 걸 걸고 따내고 싶은 사업권이 있다면 어떨 것 같아. 내가 아는 차지한은 전력을 다 할 거야.”

“비교가 완전히 틀렸어. 결혼은 사업이 아니야.”

그의 표정은 더는 동생을 대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나에겐 다르지 않아. 마음을 줄 수 없다면 이성적인 판단으로 정할 수 있다는 말이지.”

“라윤아.”

“난 감정적으로 오빠를 정했지만, 오빠는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도 있어.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래서 정략결혼이 있으니까.”

“정략결혼 같은 건 안 해. 감정? 그따위는 호르몬의 장난이야.”

그는 찬 바람이 부는 것처럼 날카롭게 말했다.

“모로코 사업은 일참 그룹이 아직 관심 있는지 알아봐야겠어.”

“너도 최치수 그 자식 저급하다고 싫어하잖아.”

“난 마음에 맞는 사람과 사업 파트너를 정하자고 그 사람까지 끌어들이려는 게 아니야.”

“오빠 마음을 돌리고 싶은 거야. 이렇게라도 절박하게.”

“아니 절박하지 않아. 협박으로밖에 안 보여.”

라윤은 자신이 생각해도 삐뚤어졌다는 걸 알았다. 일그러진 마음이라도 그를 놓치고 싶진 않았다.

지한을 보면 더 욕심이 났다.

명 비서와 가현이 함께 사무실로 들어왔다.

서류를 안고 있는 가현을 보자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에게도 그가 자기 남자가 될 거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그녀의 눈빛을 보면 알 것 같았다. 지한을 보는 가현의 눈빛이 자신을 닮아 있어 거슬렸다.

“다른 방법은 없어. 오빠가 정해. 모로코 사업 건을 봐주는 건 이번 달까지야. 오빠가 결혼하지 않으면 이 사업은 최치수의 것이 되도록 노력해 보려고.”

“회장님을 만나야겠다.”

“아버지를 만나도 소용없어. 나만큼이나 이 결혼을 원하시는 분이셔.”

“이렇게 무모하게 추진하실 분이 아니지.”

“아버지 허락하셨어. 한번은 눈감아주시기로”

자한은 어이없어 웃었다.

“미쳤군.”

“미쳐도 진지하게 고민해. 오빠가 다 가지든지 오빠가 다 뺏기든지. 둘 중에 하나야.”

나가려는 명 비서와 가현을 붙잡은 건 라윤이었다. 라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현에게 다가갔다.

“괜찮아요. 두 분도 들어요. 특히 정가현 씨.”

가현의 눈빛이 흔들렸다.

“당신이 차지한에게 다가가는 걸 그저 보고만 있지는 않을 거예요. 거기서 멈춰요.”

“백라윤!”

“이제 나와 결혼하게 될 테니까. 결혼식에 꼭 참석해 줘요. 당신에게 축하받고 싶거든요.”

라윤이 지한을 돌아보고 마지막으로 말했다.

“우리 함께 행복해질 방법은 결혼뿐이야. 연락 기다릴게.”

라윤이 사무실을 빠져나가고 사무실에 남은 세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

라윤이 했던 말이 자꾸 귓가를 맴돌았다. 그녀가 말한 결혼은 가현의 심장을 욱신거리게 했다.

지한은 라윤이 그렇게 휩쓸고 간 사무실에 앉아 차분하게 회의를 마무리했다.

그는 라윤이 다녀갔는지 가물거릴 정도로 흔들림이 없어 착각할 정도였다. 지한은 가차 없는 사람이었지만 라윤을 끊어내기보단 그녀를 설득하려 노력했다. 지금까지 보지 못한 모습이 낯설었다. 자신이었다면 어땠을지 생각하니 우울해졌다.

자신보다 친밀한 라윤에게 질투가 났다. 회의의 대부분은 듣는 일이었고 자신은 생각할 시간만 많아졌다.

가현이 명 비서를 따라 나가지 않고 머뭇거렸다. 지한이 눈치채고 가현을 불러 세웠다.

“정가현 씨 할 말 있나?”

“네. 백라윤 본부장님과 결혼하실 건가요?”

“그게 왜 궁금하지?”

“…….”

가현이 생각해도 그의 질문에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결혼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안 하면…… 곤란해지지 않아요?”

“방법을 찾아봐야지. 정가현 씨가 걱정할 일이 아니야. 나가봐.”

그는 고압적인 태도로 가현의 의견을 잘라냈다.

“그래도.”

“정가현 씨, 도를 넘지 마. 나가.”

“죄송해요.”

더는 듣지 않겠다는 그를 보고 생각이 많아졌다.

모로코 사업은 한 나라의 국책사업이었다. 가현도 그 일이 무산된다면 유형 그룹이 흔들린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가현이 걸어 나가다 말고 뒤돌아섰다.

“백 본부장님과 결혼하기 싫다면 다른…….”

“말 같지 않은 소리. 당장 나가.”

“…….”

그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악다문 어금니가 도드라져 그의 얼굴을 더 험상궂게 만들었다.

가현은 더는 말도 못 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가현도 백라윤이 지한의 옆에 있는 것이 거슬렸다. 그녀는 자신을 처음부터 의식했다.

지금 지한과 가현의 상황을 생각하면 당연한 경계였다.

그녀와 결혼한다면 가현은 지금까지 그에게서 얻던 안식을 찾을 수 없었다.

‘정가현 정말 이기적이다. 그 사람보다 내가 더 중요해.’

며칠을 고민하고 고민해도 방법은 라윤과의 결혼 외엔 없어 보였다.

그 며칠 동안 본 지한은 방법을 찾으려 노력하는 걸로 보였다. 하지만 백라윤이 만들어 놓은 덫은 쉽게 빠져나갈 수 없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 평정심을 잃지 않는 지한이 대단해 보였다.

가현은 돌이켜 생각해도 백 본부장의 결혼 결심을 무산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방법은 다른 결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자신에게까지 돌아올 차례는 없어 속상했다.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거나 좋은 집안의 여자라면 그 상대가 자신이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욕심이 생겼다.

가현은 힘없는 자신을 탓하며 라윤과의 결혼이 어떻게 될지 지켜보는 방법밖에 없어 우울했다. 그녀와의 결혼이 무마되길 간절히 빌기엔 억울했다.

가현은 문득 죽을 때까지 기억이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 생각했다. 그렇다면 차지한은 꼭 필요한 존재였다. 이기적이라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를 향한 욕심이 쉽게 포기가 안 되었다. 결국 누군가와 해야 하는 결혼이라면 자신이어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가현은 한번은 말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결심하고도 결혼하자는 말이 쉽게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여자가 먼저 프러포즈를 한다고 딱히 자존심이 상하는 건 아니지만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가 아침 식사를 할 때도 회사에서도 그에게 말하는 타이밍을 놓쳤다.

얼굴에 모든 게 드러난다고 말하던 그이니 분명 가현이 할 말이 있다는 건 알아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머뭇거리는 자신을 지나쳤다.

“가현 씨 무슨 일 있어?”

“아니요.”

“며칠 전부터 한숨만 쉬고 있잖아.”

“제가 그랬어요? 별일 없어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김 과장님.”

되려 함께 일하는 김 과장이 가현을 걱정했다. 다른 사람에게 들킨 것 같아 한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그는 명 비서와 서재에서 나올 줄을 몰랐다.

잠자리에 들었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백라윤과 지한이 나누던 이야기만 머리를 맴돌았다.

***

백 회장의 사무실을 찾은 지한은 비서실장과 인사하고 곧장 회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남의 사무실 들어오면서 뭐가 이렇게 당당해?”

“일은 안 하시고 뭐 하십니까?”

“명색이 회장인데 좀 놀면 안 되냐?”

백 회장은 전신 안마기에 앉아 전원 버튼을 누른 참이었다.

“바쁘게 움직이셔야 할 텐데요.”

“그건 라윤이 때문에 힘든 너고.”

안마기에 몸을 맡긴 백 회장이 눈을 감고 대답했다.

“그 일로 이 시간에 연락도 없이 들이닥쳤어? 우리 비서들 놀라게.”

“언제부터 비서들 그렇게 챙기셨습니까?”

“네 놈보단 챙겼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놈.”

백 회장은 핀잔에도 꿈적 않는 지한을 흘끔 보고 다시 눈을 감았다.

“라윤이가 결혼으로 사업 진행에 차질이 생기게 만들려나 봅니다. 회장님은 이걸 묵인하셨고요.”

“나도 원하는 바다. 그냥 해. 딱히 여자 옆에 둘 것도 아니지 않냐, 남자 좋아하는 게 아니라 어딘가 싶다만.”

여자에게 지나치게 관심이 없던 지한을 보고 백 회장은 한때 그의 성 정체성을 의심하기도 했었다. 그게 생각나 지한이 픽 웃었다.

지한은 마사지가 끝나길 기다리며 창밖을 감상했다. 백 회장의 사무실은 경치가 좋았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금싸라기 땅의 거대한 건물 중에서 로열 층에 위치에 있었다.

“경치 구경하러 왔어? 뜸 들이지 말고 말해.”

마사지를 마친 백 회장이 팔을 휘휘 저으며 소파로 와 앉았다.

지한은 백 회장 앞에 서류를 내밀었다.

“뭐야? 불안하게.”

백 회장이 서류를 넘기다 볼에 퉁퉁해져 퉁명스럽게 지한에게 물었다.

“나랑 맞짱 뜨자는 거냐?”

백 회장의 흰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서류에는 알려지지 않은 회사들의 실세가 백 회장이라는 것과 검찰 측에서 구미가 당길 일참만큼 구렸던 과거 행적이 담겨 있었다.

“그러고 싶지 않아서 회장님 찾아뵈었죠. 라윤이를 말려 주십시오.”

두 사람의 시선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길들여지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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