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길들여지는 밤-33화 (3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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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현이 로비 소파에 앉은 노신사를 보고 뛰어갔다.

“아버지! 많이 기다리셨어요? 오셨으면 연락을 하시죠.”

“일할 시간인데, 전화를 왜 해.”

일찍 도착한 가현을 보고 시간을 확인한 교진이 놀라며 말했다.

“점심시간 전에 내려온 거야?”

“아니요. 12시 땡 할 때 내려왔죠.”

가현이 웃으며 교진의 팔짱을 꼈다.

“드시고 싶은 음식 있으세요?”

“그건 내가 물을 말이다. 내가 사주기로 했잖니.”

“전 뭐든 좋아요!”

두 사람은 퓨전 한정식을 먹으며 행복한 식사를 했다. 교진이 가현을 챙기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묻고 싶은 게 있다.”

가현이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으려다 멈추고 교진을 어리둥절하게 보았다.

“난 네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최근에 네가 대표님과 있는 걸 봤어.”

“아.”

“예전과는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어. 네 표정이 너무 밝았거든.”

가현은 혼란스러웠다. 자신과 지한의 일은 아무도 모를 것으로 생각했다. 예상하건대 명 비서 정도로 생각했다.

아버지라 생각하는 분이 알고 있다니 난감했다.

교진의 눈은 걱정이 가득했다.

“난 너를 딸이라 생각한다. 나에겐 대표님도 중요해. 두 사람이 정말 행복하길 바란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하는 행복… 난 말리고 싶구나.”

“저도 그분과 평생 행복한 미래를 꿈꾸지는 않아요.”

가현은 두 사람이 함께하는 끝은 생각할 수 없었다.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의 미래가 겹치는 접점이 없어서였다.

그의 곁에서 트라우마를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런 그를 지금 떠나야 한다면 그건 두려웠다.

“하지만 알고 싶긴 해요. 대표님의 과거를요. 왜 아버지께서 그렇게 반대하시는지 말씀해 주세요.”

“대표님은 어머니와 함께 가정폭력에 시달렸어. 친아버지인 유형 상사의 사장님은 그런 분이셨지. 대표님의 어머니는 항상 대표님을 방어해 주셨지만, 병을 얻으시고 멀리 떠나셨단다. 그 후론 사모님께서 돌아가신 것도 대표님 탓이라고 손을 대셨지.”

예상했던 말인데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난 아픈 아내와 사별하고 뒤늦게 딸을 이곳에 데려왔다. 사장님은 대표님과 내 딸이 친해지는 걸 좋아하지 않으셨어.

하루는 효은이가 잘못한 일을 대표님이 대신했다고 했던 일로 며칠을 먹이지도 마시지도 못하게 했어. 위험한 상황까지 가서 결국,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단다.”

“맙소사.”

“대표님은 그 힘든 환경을 이겨내면서 효은이를 두둔했어. 고마웠지만 걱정되었단다. 그렇게 1년 후에 급성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대표님은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어. 효은이가 떠나고 나서 온실에 스스로 틀어박혀 밖으로 나오지 않았지. 그렇게 일주일 만에 밖으로 나온 대표님은 변해 있었어. 어머니가 떠나고 효은이가 떠나고 집에서 의지하던 많은 사람이 그만둘 때마다 대표님은 마음이 사라진 것 같이 생활했어.”

가현은 지한의 마음이 이해되었다. 모두가 자신의 곁을 떠나가 어린 가슴에 남았을 상처를 알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중요한 순간이면 그는 늘 온실에 있었다. 온실은 그에게 감옥이자 자신이 피신할 수 있는 유일한 은신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온실을….”

생각이 많아지는 가현의 표정을 보고 교진도 안타까워했다.

“대표님이 6살 되던 해부터 유형 상사에서 시작해 유형 그룹이 될 때까지 이곳에서 일했단다. 누구보다 그분을 잘 알고 그분을 아끼지만…….”

교진은 차분하게 과거를 이야기하며 얼굴색이 어두워졌다.

“대표님은 상처가 많은 분이야. 너 또한 상처가 많잖니, 따듯한 사람을 만나야 해.”

교진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이미 너무 멀리 가버린 마음을 되돌리긴 어려웠다.

“얼마 전에 말씀드린 적 있죠. 와인 창고랑 회사에서도 제가 트라우마로 과호흡이 오면 그걸 잠재울 수 있는 사람은 대표님뿐이었어요.”

“그분 옆에서 넌 행복해질 수 없어.”

“이건 행복의 문제가 아니에요. 전 대표님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트라우마를 대표님이 잠재울 수 있다면 다른 사람도 될 줄 알았어요. 하지만 안됐어요. 대표님이 유일해요.”

“난 네가 상처받는 게 싫단다.”

교진의 마음이 전해져 그를 설득하던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그에 대한 마음이 커지자 불행했던 그의 과거가 안타깝고 더 알고 싶었다.

지금까지 지한에 대한 감정을 누군가에게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무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누군가는 들어주길 바랐다.

처음으로 말하려니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만큼 신중하고 말하고 싶다는 생각에 차분해졌다.

“……처음엔 대표님이 싫었지만, 어느 순간, 그분이 이미 마음에 들어와 있었어요. 그분의 상처도 아픔도 안타까워요.”

“그건 연민이야.”

“연민도 동정도 사랑의 다른 모습일 수 있어요.”

“이런. 그런 감정에 널 걸지 않길 바란다. 대표님은 좋은 분이지만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들 사람은 아니야.”

“제가 대표님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 걸 알아요, 하지만 그분을 사랑하게 됐어요.”

“떼어놓지 말라고 화라도 내면 좋겠구나. 이렇게 차분하면 반대도 함부로 못 하니 말이다.”

교진은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며 한숨을 쉬었다.

***

라윤은 지체하지 않고 백 회장을 움직였다.

마주하는 저녁 식사 중 대화가 차지한을 누가 더 좋아하느냐 대결하는 것 같았다.

“라윤아. 너 싫다는 놈인데 이렇게까지 해야 하겠냐?”

“차지한이 아닌 다른 사람 사윗감으로 차세요?”

“이건 뭐가 이렇게 질겨? 이래서 내가 스테이크를 안 좋아해.”

”……찾아봐야지. 남자는 그놈이 그놈이야.”

“아버지가 오늘 한식 말고 양식으로 저녁 준비하라고 하셨어요.”

음식 타박 한번 없던 백 회장이 유난히 툴툴거렸다. 퉁명스럽게 말하는 아버지를 보고 그녀는 단번에 눈치챘다. 백 회장 또한 사윗감으로 그를 탐냈었다.

자신보다 사람에 더 까다로운 백 회장을 알고 있어 라윤이 웃었다.

“말씀은 그러시면서 아니잖아요. 저도 그래요. 저 지한 오빠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어요.”

“너 어릴 때 얼마나 노래를 불렀는지 우리 집에서 일하던 네 보모가 놀렸잖아. 기억나?”

“보모만 알면 다행이죠. 제 주위 사람들은 지한 오빠가 결혼한다면 저와 한다는 걸 기정사실처럼 생각해요.”

라윤의 얼굴 한번 안 붉히고 한술 더 뜨는 농담에 백 회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이, 내 딸! 백라윤. 넌 배알도 없어? 차지한 그 자식이 좋아도 내 딸 이렇게 자존심 상하게 하는 건 나도 싫다.”

“그런 자존심이랑 차지한이랑 바꿀 수 있다면 난 얼마든지 바뀔 거예요.”

라윤은 어떤 말을 해도 바뀔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백 회장은 포기하다시피 진지해졌다.

“그래도 싫다면 어쩌려고. 싫다는 남자는 잡을 수 없어. 라윤아.”

단호하게 말하는 라윤보다 더 단호하게 백 회장이 충고했다. 딸이 상처받는 게 싫은 마음은 당연했다.

하지만 라윤은 쉽게 포기하기엔 너무 오래 품었던 마음이었다.

“제가 가진 모든 걸 동원해 지한 오빠를 붙잡아 볼 생각이에요. 그게 안 된다면 포기할게요. 그러니 아버지가 도와주세요.”

“네가 이렇게 열심인 게 지한이 그 녀석이 아니라면 얼마나 좋았겠냐.”

“아버지 닮아 차지한이 좋은 걸 어떡해요.”

“이 녀석 애비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어. 도와는 줄 테니 지한이를 설득하는 건 네 몫이다.”

“감사해요. 아버지.”

라윤의 진지한 부탁에 이기지 못한 백 회장이 돕겠다고 약속하자 그녀도 그제야 안심했다.

며칠 후 백 회장은 라윤을 돕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라윤의 생각보다 백 회장의 지원은 막강했다. 지한을 지켜줬던 능력이니 그를 끌어내릴 능력도 그에게는 충분했다.

아침 일찍 라윤은 지한의 대표실을 찾아왔다.

“결혼 생각해봤어?”

라윤은 아침 인사를 하듯 결혼 생각을 물었다.

“백라윤, 이젠 지겹지 않아?”

지한은 지겹다는 듯 테이블에서 멀어져 라윤을 보았다.

“아니, 난 오늘을 고대했는데 지겹다니 섭섭하네.”

“다시 말하지만, 결혼은 안 해.”

라윤이 팔짱을 끼고 그가 앉은 책상 앞에 앉았다.

“컨벤션센터 건설 이후 진행은 취소야. 우리가 손들면 착공 날짜에 못 맞춰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겠지. 회사 이미지에도 타격이 크겠네.”

협박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니 지한도 피식 웃었다.

“……회장님도 아시나?”

“당연히 알고 계셔.”

라윤이 다리를 꼬고 앉아 지한이 평소와 다른 모습으로 말이 많아지는 걸 즐겼다.

“이 정도에 끄떡도 않을 차지한이라고 차선책까지 알아서 척척 해주셨지. 역시, 아버지 말처럼 이쯤은 예상했나 보네. 그럼 이건 어떨까?”

“어떤 일로 날 곤란하게 하려고.”

지한은 노련한 사업가답게 여유 있는 태도로 라윤을 협상테이블에 앉혔다. 그제야 라윤은 만족하는지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모로코 입찰 건.”

지한의 미간이 깊게 팼다.

“오빠 표정을 보니 내가 제대로 잡았나 보다.”

라윤의 얼굴에는 그림 같은 미소가 걸렸다.

길들여지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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