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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여지는 밤-32화 (3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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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의 식사는 새로웠고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가현은 유난히 맛있게 음식을 먹었다.

“평소에 잘 먹었나? 한정식집에서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평소보다 많이 먹어서인지 지한은 그녀의 먹성에 당황한 것 같았다. 적지 않게 나온 코스 요리를 평소보다 열심히 먹은 가현은

“여기 음식이 제 입맛에 맞나봐요. 평소보다 많이 먹었어요. 데려와 주셔서 감사해요.”

“고마워할 필요 없어. 돈은 정가현 씨가 낼 테니까.”

그다운 대답에 가현은 웃었다. 이젠 감정보다 현실적인 그에게 적응이 됐는지 마음이 상하지도 않았다.

“네, 기억하고 있어요.”

“자, 오늘 말씀드렸던 특제 디저트가 나왔습니다. 평가도 좋고, 감탄해주시면 더 좋고요.”

“평가는 냉정합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겠습니다.”

강 교수는 가슴에 손을 얹고 마음을 진정시키는 제스처를 취해 두 사람이 웃었다.

디저트를 한 입 먹고 가현의 눈이 동그래졌다.

“정말 맛있어요.”

함박웃음 짓는 가현을 보고 지한은 고개를 저으며 커피를 마실 뿐이었다.

“단순해서 어떤 면에서 삶이 심플해지겠군. 부럽다는 말이야.”

또 핀잔이라 생각한다 생각한 지한이 처음으로 오해할 말에 부연 설명까지 붙였다.

이제는 친절한 위로나 설명에 서툰 그를 알았다. 얼마 전 온실에서 우연히 보게 된 지한의 어린 시절 그림일기는 충격이었다. 그전에는 교진과 장원 댁이 지한을 그렇게 감싸는 모습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퍼즐이 맞춰지는 것처럼 그가 어떻게 자랐는지 짐작됐다.

그가 안타까웠고 그를 위로하고 싶었다.

“저… 저는 대표님이 저랑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

“대표님은 늘 자신감 있고 성공하는 삶이니까 걱정도 없어 보였어요. 하지만 대표님 아버님 기일 날도 그렇고 대표님이 어릴 때 행복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니, 솔직히 힘이 되는 방법은 모르겠어요. 그저 옆에라도 있어 드리고 싶었어요.”

지한의 표정이 한순간에 싸늘하게 식었다. 그의 얼굴에 희미하게 비치던 미소는 절대 찾아볼 수 없었다.

“내 과거를 안다는 건가?”

“네?”

“정가현 너 따위가 내 과거를 얼마나 안다는 말이지?”

얼음보다 차가운 목소리가 에일 정도로 가슴을 얼려 욱신거렸다.

그가 냅킨에 손을 닦고는 테이블에 집어 던지고 일어났다.

“내 뒤를 캐고 다녔나?”

“그런 거 아니에요.”

오해라 말하는 가현의 말은 들을 생각도 없었다. 그의 과거를 알게 된 가현에게 화를 낸다. 지한은 예전과 달라진 그녀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쭙잖은 동정은 네가 할 게 아니야.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건 나군.”

달라진 냉랭한 공기에 소름이 돋았다. 그가 가현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내칠듯한 표정으로 선물을 준다는 말이 이질적으로 들렸다.

“조금 있으면 차가 올 거야, 오늘 식사에 대한 대가야. 식사는 끝났어.”

그는 미련도 없이 돌아서 가게를 나갔다. 가현이 입술을 꼭 깨물어봐도 소용없었다.

그는 화가 났고 이미 뱉은 말은 담을 수 없었다.

그가 보낸 차를 타고 간 곳은 편집숍이었다.

“여긴 왜 온 거죠?”

“대표님께서 정가현 씨를 위해 준비한 것입니다.”

편집숍에는 다양한 옷들이 이미 포장된 채였다.

“취향에 맞는 옷이 있다면 입어보시고 선택하세요.”

“이것도 과분해요. 더 필요도 없고요.”

“두 시간 후쯤 집으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

기분은 엉망이었고 가현은 그가 준 선물을 보고 마음이 복잡했다.

집으로 돌아와 부담되는 마음은 더 커졌다. 옷과 그에 맞는 신발과 가방까지 넘치게 많은 선물이 밥값을 대신하기엔 과했다.

가현은 메시지를 보냈다.

[주신 선물 저는 필요 없어요. 너무 과해요.]

[적어도 내 비서가 품위는 지킬 정도는 돼야 해. 받아.]

‘죄송해요.’라고 쓰던 메시지를 지웠다.

자신이 과거를 아는 체하지 않았다면 완벽한 하루였을지 몰랐다. 어설픈 위로가 후회되는 날이었다.

***

가현이 출근했을 때 비서실의 공기는 냉랭했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 있어요?”

“가현 씨, 좋은 아침요. 이건 아니네요. 그게….”

늘 밝은 표정으로 인사하던 박 대리조차 표정이 어두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 직감했다.

“내가 이야기할게. 박 대리.”

“가현 씨 잠깐 이야기해요.”

김 과장은 자리를 옮겨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당황스럽겠지만 서 대리가 가현 씨 진행 중이던 자료를 빼돌려 일참 그룹에 넘겼어요.”

“네? 서 대리님이 어떻게…… 왜요?”

“자세한 건 나도 몰라요,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던 것 같은데 산업스파이는 중죄예요. 회사에서 처분이 있을 거예요.”

서 대리는 비서실의 분위기 메이커였다. 늘 사람들을 웃게 했고 활달한 그녀가 왜 이런 일을 벌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 서 대리가 한 일로 밝혀지지 않았다면 가현 씨가 의심받았을 거예요.”

“제가요? 대표님께 듣기론 일부러 정보를 노출했다고 했어요.”

“맞지만. 그게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어요.”

“그렇군요.”

난감하다 못해 슬펐다. 의지했던 동료가 믿지 못할 사람이라니 가슴이 아팠다.

회의실에서 나오는 명 비서 뒤로 서 대리가 창백한 얼굴로 뒤따라 나왔다. 서 대리는 사람들과 눈을 맞추지 않았다.

명 비서가 김 과장을 불러 자리를 떠나고 서 대리는 자리로 돌아가 짐을 정리했다.

어떤 이도 먼저 그녀에게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가현은 먼저 서 대리에게 다가갔다.

“서 대리님,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예요.”

“가현 씨도 들었지? 미안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에겐… 미안해야지. 가현 씨가 만든 자료 손댄 건 나니까.”

“저, 서 대리님 의지 많이 했어요. 이유가 있는 거죠? 피치 못할 이유요.”

“……그렇다고 내 잘못이 용서되는 건 아니야. 앞으로는 사람을 너무 믿지 마. 이렇게 안 좋게 떠나게 돼서 아쉽네. 그래도 대표님께서 이 일에 대해 더는 거론하지 않고 묻어주신다고 해서 감사했어.”

가현은 그녀의 쓸쓸한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가현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자리에서 멍하니 있는 사이 서 대리가 인사를 하고 비서실을 나갔다.

“서 대리도 안 됐어. 어머니가 그렇게 쓰러지지 않았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몇 년을 함께 일했는데 제대로 힘이 되어주지도 못했네.”

김 과장이 4년을 함께한 서 대리를 안타까워했다.

아침부터 무거운 분위기에 비서실은 더 조용했다.

가현이 모로코 입찰 건으로 지한에게 최종자료를 가지고 들어갔다.

“모로코 입찰 공사에 필요한 경비 최종자료입니다.”

“실수는 없겠지.”

“네, 명 비서님께 목록을 확인했습니다.”

지한은 꼼꼼하게 자료를 검토하고 애매한 목록들을 한 번 더 확인했다.

가현은 용기를 내어 지한을 불렀다.

“대표님.”

“할 말 있으면 해.”

“서 대리 이야기를 오늘 들었어요.”

자료에서 눈을 떼지 않던 그가 서 대리라는 말에 얼굴을 들었다. 날카로운 눈매가 호의적이지 않았다.

“서 대리, 사정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4년간 비서실에서 성실히 일했고요.”

“그래서.”

그가 구구절절하던 말을 끊었다.

“몇 달 되지 않았지만, 그분은 지금 일에 자부심이 있었어요, 그런 사람이 산업스파이 같은 행동을 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는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가현을 지켜보기만 했다.

“이번 일은 대표님께서 미끼를 던지셨던 것이고 일부러 노출하신 정보이니 용서해주시면 안 될까요?”

“할 말 다 했나?”

“…….”

“나 모르나? 내가 들어줄 거라 생각하나?”

“알아요, 알고 있지만 그래도 부탁드리고 싶어요.”

“네 앞가림이나 잘해. 대표 비서실은 개인적인 사정이 있다고 눈감아줄 수 있는 곳이 아니야. 규모가 작지 않은 그룹은 더군다나 극비인 일을 처리하는 중요한 부서야. 고작 개인사로 회사의 중요정보를 넘길 사람이라면 또 다른 일이 생겨도 당연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지.”

“…… .”

“내가 용서할 차원을 넘은 일이고 정보를 노출 시켰어도 산업스파이가 누구인지는 알지도 못했어. 그걸 잡는 것도 이번 일의 성과야.”

지한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 화가 나 있었다. 더는 말하지 못하자 가늘게 늘어진 눈으로 가현을 쏘아 보았다. 더는 자비 따위는 없다고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이쯤에서 덮는 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이야. 더 할 말 없으면 나가 봐.”

이럴 때 차지한은 냉정하게 이성적이고 반박할 허점도 없이 논리적이었다.

그에게 한마디 대꾸도 못 하고 고개 숙여 인사하고 돌아섰다. 대표실을 나가는 가현에게 쐐기를 박았다.

“정가현 가진 것도 없이 남 걱정은 적당히 해.”

“알고 있지만 전 대표님과 달라요. 나가보겠습니다.”

가현은 무거운 마음으로 오전을 보내고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일어났다.

길들여지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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