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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팔짱을 끼고 제대로 물었다.
“뭘 살 건데?”
“대표님이 좋아하는 음식요.”
“언제?”
“대표님 바쁘시니까 대표님이 원하실 때요.”
그의 과거를 알고 난 후 그저 위로하고 싶은데 방법을 알지 못했다.
‘거절이겠지.’
경직된 표정으로 지한에게 또 핀잔 한마디 듣겠구나 생각했다.
늘 겪게 되니 기대하지 않았다.
“한 시간 후에 나와.”
땀을 흠뻑 흘린 그가 시계를 보더니 차지한에게서 절대 들을 수 없는 말을 들었다. 가현은 귀를 의심했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보고 있으니 그가 한마디 했다.
“벌리고 있는 입…… 다물고, 준비하러 가.”
넋을 놓고 있는 바보 같은 표정이었나 싶어 얼른 입을 다물었다.
언뜻 깨달은 가현이 큰소리로 외쳤다.
“오늘 목요일이에요!”
“외근이야.”
오늘이 평일이라 알려 주었지만 망설임도 없이 나온 대답은 절대 차지한이 아니었다.
키가 큰 그가 큰 보폭으로 멀어졌다.
“미쳤나 봐, 밥도 먹자 그러고 회사도 거짓말하래.”
가현이 그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게 보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러다 늦겠어.”
가현이 방으로 뛰어 들어가 옷을 골랐다. 첫 데이트를 하는 소녀처럼 몇 없는 옷을 고르고 또 골랐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옷 중 가장 데이트룩에 가까운 옷은 얼마 전 사용인에게 받았던 흰색 원피스였다.
이 옷을 입은 날 그와 연말 파티에 갔었다.
“데이트에 설렌 여자라고 티 내는 것 같잖아.”
거울 속 모습이 근사해 보였지만, 속마음이 보이는 것 같아 벗고는 고민에 빠졌다.
바지를 입고 나가려니 그건 또 싫었다.
가현은 롱 플레어스커트에 교복처럼 입고 다니던 흰색 블라우스를 입고 하나밖에 없는 검은 코트를 입었다.
“옷이 뭐가 중요해.”
이 집에 올 때만 해도 아무것도 없던 그녀에겐 옷을 고를 수 있는 것도 사치다 싶었다.
다들 회사에 출근하는 줄 알고 인사를 했다.
“가현아, 오늘 늦니?”
“아, 모르겠어요. 내일은 괜찮을 것 같아요.”
오늘은 지한과의 일정도 알 수 없었다. 오늘 일을 말할 수도 없어 가현은 둘러댔다.
“그럼 내일 점심때 회사 앞에서 잠시 볼까?”
“아버지 무슨 일 있으세요?”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교진은 아무 일도 아니라고 푸근하게 웃었다. 가현이 교진을 아버지라 부르면 늘 저 표정을 지어 가현까지 가슴 따뜻하게 만들었다.
“아니야. 따로 밥 한번 먹어본 적도 없고 너한테 밥이든 차든 사주고 싶어서.”
“내일은 괜찮아요. 오시면 제가 밥 사 드릴게요.”
“내일은 내가 사주고 싶어. 가현이는 다음에 사 줘.”
감사한데 오늘 일을 말할 수도 없어 교진과의 대화에 자꾸 거짓말을 해야 했다.
“네, 빨리 가봐야 해요.”
“그래, 잘 다녀오너라. 일 무리해서 하지 말고.”
교진의 걱정에 양심이 찔렸다. 그를 속여야 해 마음에 걸렸지만 지한이 말한 한 시간이 다 되어 얼른 뛰어나갔다.
그가 타고 다니던 세단을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의 차가 서 있던 자리에 흰색 외제 차가 반질반질 윤이 났다.
외제 차를 모르는 가현의 눈에도 쉽게 가질 수 없는 차로 보였다. 지한을 기다리며 차를 구경했다.
고개를 숙여 차를 구경하던 가현의 얼굴이 비치던 창문이 징 내려갔다.
지한이 창문 너머에서 가현을 보고 있었다. 손 한 뼘 거리에서 얼굴을 마주하는 상황이 되어 가현이 눈만 끔벅거리며 몸을 숙인 채 있었다.
“키스라도 해달란 건가?”
가현이 얼른 숙였던 몸을 펴고 섰다.
“그만 구경하고 얼른 타.”
가현은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보조석으로 뛰어갔다.
차에 관심도 없는데 괜히 차를 구경한다고 얼굴을 들이민 것이 후회되었다. 민망해 아무 말도 없이 창밖만 보았다. 그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분명 도심이었는데 어느새 산길을 내달렸다. 한산한 이차선도로 옆 나무 사이로 해가 비쳐 들었다.
“어디 가세요?”
“밥 먹으러.”
“지금 아침인데요.”
“브런치겠군.”
이런 남자였나 싶게 오늘은 자신이 알던 차지한은 없었다.
“바쁘신데 회사 안 가셔도 돼요?”
“바쁘지. 하지만 정가현 씨가 걱정해줄 정도는 아니고.”
차가 멈춰 선 곳은 도심이라 생각지 않은 아름드리나무가 자라고 있는 잘 관리된 한옥이었다.
주차장에는 은은한 주광색 불이 들어오는 사각 박스 간판에 심플하게 ‘오츠’라는 상호가 적혀 있어 가게라는 것을 알았다.
밖에서는 그저 수수한 한옥이었지만 내부는 모던한 현대건물에 맞먹을 만큼 모든 시설이 현대식으로 갖춰져 있었다.
“오랜만에 오셨습니다. 차지한 대표님.”
한 남자가 다가와 자리를 안내했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어요.”
“번잡한 곳은 딱 질색이야. 기억도 잃었는데 아는 곳도 없잖아?”
“대표님 좋아하실 곳이 어디일지 고민했는데 다행이에요.”
어련할까 싶었다. 일 외에 사람과의 접촉을 싫어하는 그이니 당연했다. 어쩌면 트라우마가 있는 자신만큼 사람을 의도적으로 꺼릴지 모른다.
갤러리처럼 꾸며진 곳은 전시장인지 레스토랑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좌석은 많아 봐야 세, 네 개 정도로 보였다.
벽면 한쪽이 통창인 앞 좌석에 앉았다. 창 가득 늦겨울을 견디고 있는 정원수들이 보기 좋게 자리 잡고 있었다. 겨울에도 푸르른 소나무에 며칠 전 내린 눈이 얼어 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아침이라 아직 실내가 따뜻하지 않습니다. 추우실 것 같아 가지고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은 프랑스입니다. 괜찮으십니까?”
“좋군요.”
가현이 추워 보였는지 지배인은 담요를 가지고 왔다.
“옷은 그것밖에 없나? 늘 보던 옷이군.”
“네? 아닙니다.”
“…….”
몇 벌 없는 옷이 부끄럽지는 않았지만, 그가 지적하니 신경이 쓰였다.
지한은 아침을 한식 위주로 먹었지만, 오늘만은 달랐다. 처음 보는 이름도 모르는 음식들이 코스별로 나왔다.
“와, 다 처음 보는 음식이에요. 색도 모양도 너무 예뻐요,”
“오늘은 프랑스 가정식이군. 이곳은 매일 음식이 달라. 나라별 가정식과 그에 어울리는 퓨전 음식이 함께 나오지.”
“그럼 이게 프랑스 가정식인가요?”
“맞아.”
비프 부르기뇽, 라따뚜이, 샐러드 하몽 등등 여러 음식이 테이블 위를 가득 채웠다.
친절한 지배인은 음식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옆에서 커피를 마시던 지한이 오늘따라 지나친 친절에 한마디 했다.
“강 교수님 오늘 여기서 강연하십니까? 학교 학생들은 알아서 독학하라고 제가 직원에게 하는 것보다 더 독하게 말씀하시던 분이 말입니다. 아니면 정가현 씨가 마음에 드십니까?”
“오늘 두 분 때문에 기분이 좋습니다. 물론 정가현 씨도 전 친해지고 싶은 분입니다. 여기 오시는 분들은 해외 음식이라면 물리게 드시고 다 전문가 수준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제가 할 일이 없죠. 제 학생들도 고정관념이 있고요. 함께 오신 아가씨처럼 제 음식 이야기에 즐거워하시고, 경청해 주신다면 몇 시간이고 이야기할 수 있죠.”
그는 기분 좋게 웃으며 가현의 방문을 반겼다.
“교수님이세요? 그래서 음식에 대해 해박하시군요! 전 교수님 말씀 너무 재미있어요.”
“저도 오늘 즐겁게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가현 씨라고 했나요?”
“네, 정가현입니다.”
“정가현 씨 덕분에 기분 좋은 하루를 시작했으니 좋은 음식으로 대접하겠습니다. 기대하십시오, 다음에 또 방문해 달라는 뇌물입니다.”
눈을 찡긋한 그가 자리를 떠나고 지한은 중얼거렸다.
“강 교수가 오늘처럼 신나 보이는 것도 오랜만에 보는군.”
“전 어떤 것보다 사람들이 절 반겨주면 좋아요. 기억 잃고 사람들조차 절 피한다면 너무 외로울 것 같거든요.”
가현은 아련하게 창밖을 바라보며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다들 너무 관심이 많아 탈 같은데. 이 음식 비싸. 언제 다 먹을 거야?”
“아! 여기 얼마예요?”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음식값을 물어보는 가현을 보고 지한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가 돈을 받을 주인도 아닌데 가현은 자신이 꼭 바가지를 쓴 것 같았다.
“설마 대표님 가게는 아니죠?”
“이런 가게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어.”
딱 잘라 말하니 오히려 안심됐다. 기억을 잃은 후 가현의 모든 세상이 그의 그늘인 건 싫었다.
얼마 전 일탈 이후 가현은 자신의 상태가 걱정됐다. 그에게 모든 것을 의지할까 봐 최대한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보려 노력 중이었다.
“다행이에요.”
“왜 다행이지?”
“제가 사드리기로 한 밥이니까요.”
“걱정하지 마, 계산은 정확해야지. 이건 정가현 씨가 계산해야 해.”
“네, 감사하네요.”
내 돈을 써 밥을 사는 걸 감사해야 하는 분위기가 우스웠다.
가현이 소리 내 웃었다.
“뭐가 재미있어?”
“제 돈을 주고 밥 사드리는 걸 감사하는 게 웃겨서요.”
“내가 누군가에서 밥을 사게 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야.”
그는 농담이 아니었다. 자못 진지한 눈매로 가현을 지긋이 보았다.
“이유가 없는 밥을 받을 이유도 없다고 생각해. 그것도 사적인 자리에서 더군다나 여자에게 밥을 사게 하는 건 처음이군.”
그의 인생에 처음을 가현과 한다는 말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길들여지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