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바닥에 닿는 이끼가 등을 간지럽혔다. 점점 힘을 잃고 나른해졌다. 지한은 그걸 가만두지 않았다.
가현을 들어 지한의 허벅지에 앉혔다.
그의 몸에 내려 앉혀져 더 속으로 파고들었다.
아무리 몸을 들어 올리려 해도 힘이 빠진 몸은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의 어깨를 잡고 겨우 버텼다.
“혼자 잠들어 버리면 안 되지. 아직 난 만족 못 했어.”
그가 혼이라도 내는 것처럼 허리를 튕겨 자극은 배가 되었다.
“아앗. 안 돼요.”
“조금만 자극해도 이렇게 신음을 흘리면서 안되긴. 정말 야한 몸이야.”
앉혀진 가녀린 몸이 그의 움직임에 흔들려 그를 유혹하듯 했다.
“눈앞에서 이렇게 자극적으로 움직이면 가만있을 수가 없잖아.”
눈앞에 흔들리는 봉긋한 정점을 머금고 빨아들였다. 어깨를 짚고 있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파들파들 떨었다.
뜯어낼 듯 그녀의 몸에 흔적을 남기고 거친 몸짓으로 파정했다.
평소 철저하게 피임 도구를 사용했던 그가 오늘은 화가 폭발해 아무렇게나 탐했다.
“더는 못 하겠어요.”
“못한다면서 이렇게 허리를 흔들어 대나?”
노골적인 말들이 가현의 입을 막았다.
끝나기 무섭게 다시 그녀의 자극된 몸을 단번에 꿰뚫고 들어와 탐하기를 반복했다.
가현은 더는 저항할 힘도 없어 지한의 움직임에 방향을 잃고 흔들렸다.
참아지지 않는 졸음과 거친 정사에 가현은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잠깐의 잠에서 깬 가현은 눈꺼풀이 무거워 눈이 떠지지 않았다. 몸이 공중에 뜨더니 등에 느껴지던 작은 돌과 이끼가 느껴지지 않고 부드러운 촉감이 안온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위로 포근한 천이 덮이기까지 했다.
지한이 자신을 안아 소파에 누인 것으로 생각했다. 몸은 움직여지지 않고 그저 소리에 집중했다.
인기척으로 알 수 있었다. 분명, 자신이 누운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지한은 자신이 잠든 것으로 생각해 조금 편하게 행동하는 것 같았다.
“미친 새끼, 누굴 보고 누굴 떠올리는 거야.”
혼잣말의 뜻은 온전히 이해되지 않지만, 그가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란 건 알 것 같았다.
“정가현, 넌 그냥 내 노리개만 해. 의미 만들지 말고.”
그의 말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는 미련도 없이 일어나 걸어갔다. 조금 후 온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눈물이 또르르 눈가를 타고 흘렀다.
그가 사라지고 온실은 온기를 잃은 것 같았다. 마음이 추운 것일까 괜한 서늘함에 무릎을 가슴에 당겨 안아 얼굴로 파묻었다.
“못됐어. 그렇게 말 안 해도 되잖아.”
한참을 서럽게 울어도 서러움은 가시지 않았다. 노리개라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가 필요한 건 자신이니 어쩌면 이용하고 있는 건 자신일지 몰랐다. 이제는 자동 반사적으로 불안한 마음이 들면 그가 떠올랐다.
그와의 정사는 어쩌다 보니 이곳에서만 했다.
다른 것은 신경 쓰지 못할 지경이 돼서 한 번도 온실을 자세히 보지 못했다. 오늘은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똑바로 누워 잘 자란 온실 속 나무 꼭대기를 보았다. 가현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몸을 움직여 잠옷과 카디건을 챙겨 입었다.
온실 바닥에 누워 그와 관계하면서 얼굴을 돌렸을 때 보았던 공간이 생각났다.
그곳을 찾아 걸었다. 온실은 어지간한 작은 온실보다 훌륭하게 꾸며져 있었다.
그녀가 찾던 공간을 발견하고 나무 사이를 걸어 들어갔다. 온실 구석에 한사람이 앉기에 딱 맞는 곳이 있었다. 이곳에 앉으니 안에서 밖을 확인할 수 있지만, 밖에서는 누가 있는지 알 수 없어 아늑했다.
누가 가둔 것은 아니지만 쪼그려 앉아 있으니 적당한 은신처 같았다.
앉은 곳 옆엔 야자나무가 있었다. 나무 둥치가 큰 나무는 왠지 든든했다. 그곳 아래 반쯤 흙에 파묻힌 이상한 물건이 있었다. 흙에 묻혀있는 오래된 깡통 상자를 꺼냈다. 오래된 고급 과자 상자였다.
귀퉁이가 조금 찌그러져 잘 열리지 않아 있는 힘껏 뚜껑을 열었다. 상자에 담긴 물건이 투두둑 떨어졌다.
접힌 몇 장의 종이와 장난감, 알 수 없는 아이의 물건들이었다.
접힌 종이를 펼치고 가현의 동공이 커다래졌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아빠가 많이 화가 났다. 엄마가 보고 싶다.]
다급하게 다른 종이도 펼쳤다. 아이의 그림일기에는 화가 난 도깨비 같은 형상과 날개를 달고 웃고 있는 여자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분명 그림일기를 쓴 아이는 학대를 받은 것이 분명했다. 도깨비가 휘두른 방망이에 울고 있는 아이를 보자 간담이 서늘해졌다.
이곳에 갇혔던 일기와 아버지에게 체벌을 받고 이 온실에 방임된 시간을 그린 그림일기였다.
두려움과 어둠에 떨었을 아이의 모습이 떠올라 온몸에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친부에게 겪은 일이라면 아이는 누구에게 기대어 살았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가현은 온실을 둘러보았다.
이 온실은 지한의 어머니가 만들었다 했다. 그리고 이곳은 지한 외엔 들어올 수 없다.
이 그림일기의 주인공은 유추가 되었다. 이 온실의 주인. 한 시간 전까지 자신을 거칠게 다루었던 차지한.
생각지 않게 그의 과거를 알게 되었다.
아직도 이곳은 그만 드나들 수 있고 좋은 일이 있거나 나쁜 일이 있을 때 그가 숨어드는 곳.
가현은 기억을 잃고 이만큼 불행한 운명을 견디는 건 자신뿐이라 생각했다. 차지한을 보면 늘 승승장구했고 잘 사는 것 같아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틀렸었다.
그도 잘살고 있기보단 견디고 있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때였다. 차지한이 가현의 마음에 들어온 것은 …….
***
검은 양복을 입은 덩치 큰 남자들이 고개를 숙이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남자 앞에서 잔뜩 긴장해 있었다.
“젠장, 또 유형에게 밀렸어? 등신 새끼들.”
최치수는 부하를 줄 세워놓고 목소리를 높였다.
모로코 국영기업은 한국업체를 지목한 것처럼 2차 입찰을 한국에서 진행한다고 공표했다. 파격적인 진행에 한국기업은 감사함을 표했고 모로코 심사단에게 로비하려는 기업들의 눈치작전은 군사작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치열했다.
세 개의 기업 중 유형 그룹과 일참 기업은 가장 치열한 경쟁업체였다. 모로코 국영사업의 2차 입찰에 참여한 두 업체의 로비로 일참 기업을 이끄는 치수는 화가 나 있었다.
“경수야. 뭐하냐? 이래서 입찰 제대로 하겠어.”
줄 서 있는 남자 중 한 명의 뺨을 후려쳐 얼굴이 돌아갔다. 남자는 차렷 자세로 치수의 따귀를 그대로 받아냈다.
한쪽 볼이 붉게 부풀어 올라서야 치수가 멈추었다. 그래도 화가 삭여지지 않는지 협탁에 놓인 전화기를 내동댕이쳤다.
최치수 이사라는 명패를 들고 남자들의 눈앞에 휘둘렀다.
두려워 몸을 사리는 남자들을 보고 그걸 내리치려다 말고 남자들의 배를 돌아가며 명패로 꾹꾹 눌렀다. 남자들이 밀렸다가 얼른 제자리로 돌아와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번에 유형 차지한 그 새끼보다 한발 늦으면 니들 뒈질 줄 알아. 알았어?”
“네, 형님.”
“이 새끼들, 형님이 아니라 이사님!”
“네!! 이사님.”
“꺼져! 새끼들아. 대가리 구멍 나기 싫으면.”
일사불란하게 무리의 남자들이 사라졌다.
“한심한 새끼들 어떻게 한번을 빨리 못 움직여. 깡패 새끼들이 근성도 없어.”
치수는 흐트러진 옷이 답답해 뜯어내고 소파에 앉았다. 비서인 진환이 치수에게 다가와 서류를 건넸다.
“이건 뭐야?”
“이번 입찰금액 산출을 마쳤습니다.”
서류를 들여다보는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해되지 않는 서류를 집어 던지며 역정을 냈다.
“뭐가 뭔지 알 게 뭐야! 그래서 얼만데? 이딴 서류 말고 심플하게 말해.”
“결론만 말씀드리면 얼마 전 유형 그룹에서 입찰금액을 산출하는 일을 도맡았던 여직원을 알아냈습니다.”
“그래서.”
“여직원이 이 사업의 심각성을 모르는 것 같아. 보안이 허술한 틈을 타 자료를 빼냈습니다.
“그래? 그 새끼들은 얼마라는데?”
“7,600억 원 정도로 추정했고 저희 측에서는 7,800억으로 입찰 할 예정입니다.”
산업스파이로 자료를 빼돌린 것을 자랑스럽게 말했다.
“조 비서가 이번에 한 건 했네! 로비를 거지같이 해서 열받았는데 내 밑에 이런 인재도 있어야 내가 회사 운영할 맛이 나지. 회장님한테 이번에 면이 서겠다. 잘했어.”
“감사합니다.”
치수의 표정이 한결 풀렸다 다시 심기가 불편해졌다.
“이 새끼들 이번에 콧대를 꺾어주겠어. 그런데 모로코 단장은 어떤 놈이길래 알 수도 없는 거야?”
“그게 아직 파악이 안 되고 있습니다.”
입찰에 참여한 업체에 산업스파이를 심어 편법으로 이득을 취하는 것이 거리낌이 없었다. 그는 그것이 사업을 잘하는 방법이라 말하는 족속이었다.
길들여지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