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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가? 제상 차려줄 사람을 귀신같이 뽑았나?”
한참 웃어젖힌 지한이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제상을 노려보며 섰다.
“내가 당신 제사상을 이 집에서 보는 건 오늘까지야. 난 귀신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어. 정말 있다면 제대로 대접 안 하는 걸 알 테니까. 그 굴욕감을 알려주고 싶거든. 당신은 죽어서 슬픈 날이겠지만 나는 가장 홀가분한 날이었어.”
진심이 담긴 목소리는 음산할 정도로 냉랭했다.
“예우도 증오도 여기까지 하지.”
지한은 미련 없이 방을 나갔다.
***
가현도 오늘이 특별한 날이라 들었다.
사용인들의 여러 소문에 귀를 의심하기도 했고, 의아하기도 했다.
여러 소문이 난무했지만 다른 말보다 그의 아버지가 우연한 사고로 돌아가셔서 하루아침에 고아가 된 날이라 했다. 13살의 나이에 도와주는 친척도 없이 아버지의 회사를 지켜내며 지금처럼 키웠다고 하니 안쓰럽고 대견했다.
그가 늦은 퇴근 후 교진은 찾지도 않고 안채로 사라졌다. 오늘따라 저택은 더 조용했다.
지한이 다이닝룸에 나타나 와인을 찾았다.
“벌써 끝나셨습니까?”
“와인 서재로 가져다줘요. 정 실장.”
“네, 대표님.”
그는 평소보다 냉정하게 말하고 돌아섰다.
“진절머리 나는 제사상 정리해요.”
“…….”
교진은 그가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의 뒷모습을 보고 한숨을 푹 쉬고는 와인을 가지러 움직였다.
장원댁 옆에서 일을 돕던 가현도 지한의 태도를 보고 의아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이상할 정도로 평소보다 날이 선 그와 안타까워하는 교진을 보자 궁금했다.
사연이 있다는 건 누가 보아도 알겠는데 누구 하나 똑 부러지게 아는 사람도 알려주는 이도 없어서였다.
아침부터 장원댁이 준비한 제사상을 정리하는 것도 일이었다. 제사 음식을 꺼리는 몇몇 사용인들을 빼고 모두가 늦은 저녁 제사 음식을 야식 삼아 먹었다.
“대표님도 가져다드릴까요?”
“안 드셔.”
이 집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사용인의 말에 가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이곳에서 지낸 사용인과 장 여사가 망설임도 없이 동시에 대답해 서로를 보고 웃었다.
장원댁이 설명을 덧붙여 되물었다.
“대표님은 한 번도 드신 적이 없어. 그리고 이 제사 음식도 올해로 끝이고.”
“제사를 안 지내요?”
“내년부터는 절에 맡기신대. 지금까지 제사를 맡기지 않은 게 기특하지. 하실 만큼 하셨어.“
가득 차려진 음식을 전투적으로 먹던 사용인이 먼저 손을 들었다. 다른 사용인도 한계에 다다라 자리를 떠났다.
“더 먹으면 정말 살찔 것 같아요. 그만 먹을래요.”
“저도요. 전 쉬러 가요.”
“그래 다들 쉬어.”
하나둘 자리를 뜨고 장원댁과 가현만 남았다.
“가현이도 가서 쉬어.”
“정리 도울게요.”
“괜찮아. 여기 있는 것만 정리하면 돼. 치울 것도 없어,”
“저, 궁금한 게 있어요.”
“뭐가 그렇게 궁금한데.”
“장 여사님. 대표님은 왜 아버지 기일은 못마땅해하시죠?”
웃음이 가시지 않던 장 여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우리 도련님은 불쌍한 분이셔. 대표님이 전대 사장님을 미워하는 걸 잘못됐다고 할 수도 없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아들에게 지나쳤고…… 가혹했지. 모르는 게 좋아. 묻힌 일을 지금 와서 들추면 뭐 하겠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장원댁이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벌써 자정이 넘었어. 가현아 낼 출근도 해야 하고 피곤할 텐데 들어가서 쉬어.”
부산하게 움직이는 그녀는 더는 물을 수 없게 만들었다. 가현도 더는 묻지 못하고 따라 일어났다.
가현은 방으로 돌아가 잠을 자려해도 쉬이 잠이 들지 못했다. 결국, 한 시간을 누워만 있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가현은 창가에서 별채 쪽을 응시했다.
환하게 불이 켜진 온실을 보고 용기를 내었다.
가현은 긴 앙고라 카디건을 여미고 온실 문 앞에 섰다.
“아버님의 기일이라 들었어요.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날카로운 조소가 섞인 시선에 가현이 긴장했다. 위로하려고 했을 뿐인데 후회가 되었다.
“네가 무얼 안다고 그렇게 말하는 거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어이없어하는 말은 더 날카로웠다.
“웃기는군. 기억도 못 하면서 남이 죽은 날을 위로해?”
그의 말은 칼이 되어 가현을 상처 냈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는 잔인했다.
“정 가현 정신 차려. 위로가 아니라 죽은 사람까지 챙겨야 하는 이날이 돌아오지 않길 바라는 사람이니까.”
“제…… 제가 주제넘었어요.”
돌아서는 가현의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가현의 입안을 가르고 들어와 숨이 막힐 정도로 강하게 빨아들였다.
가현이 그의 팔을 붙잡고 힘겹게 그의 키스를 받아냈다. 흡착이라도 할 듯 빨아들이던 입술을 떼어내어 쪽 소리가 나게 떨어졌다.
“내 앞에서 사라지라고 허락하지 않았어.”
“혼자 있고 싶으신 거 같아서…….”
그를 달래 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거친 키스에 가슴을 들썩이던 가현은 험악한 표정을 본 후 놓치지 않고 그를 살폈다.
잘 참고 있던 그를 잘못 건드렸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잠자는 사자를 잘못 건드린 결과처럼 그의 몸짓이 거칠어졌다. 그의 앞에 가현은 먹잇감인 초식동물과 같았다. 그가 사나운 표정으로 피가 철철 흐를 정도로 아프게 비수를 꽂았다.
“넌 그냥 지금처럼 입 다물고 내 밑에서 울어.”
“…….”
“네 소임은 그게 어울려.”
“…….”
가현은 가슴이 먹먹해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처지를 알고 있지만 외면하고 싶었다. 그걸 굳이 펼쳐놓고 파헤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차지한은 잔인하게 생채기 난 상처에 생긴 딱지 앉은 상처를 다시 건드려 피가 철철 흐르게 했다.
지한에게 자비는 없었다. 가현을 온실 바닥에 눕혀 잠옷을 들쳤다.
지한의 표정만큼 포악한 포식자 같았다. 투둑 뜯겨 나가는 속옷을 당기는 힘에 가현이 딸려갈 정도였다. 악력에 몸을 물리려 해도 도망칠 곳은 없었다. 지한은 음습해진 가현에게 침범했다.
“내가 무얼 했다고 이렇게 준비가 되어 있지?”
“으읏.”
“벌써 길들여지면 곤란한데.”
그의 노골적인 말에 가현이 얼굴을 돌려 눈을 꼭 감았다. 지한은 오늘 나쁘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가현의 턱을 움켜쥐고 자신을 보게 했다.
“눈 뜨고 똑바로 봐.”
지한은 그녀로 음습해진 손을 눈앞에 들어 올려 관찰했다. 자신이 흥분했다는 결과물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니 가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정가현이 내 손길에 길여들지고 있다는 증거야.”
“그건 내 의지가 아니에요.”
“네 생각보다 몸이 정직한 거지.”
음습해진 손이 눈앞에서 그의 붉은 혀로 깔끔하게 정돈되었다. 느리게 핥아 올리는 혀가 그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눈을 마주한 채 자신을 먹어 치우는 느낌이었다. 예상 밖의 그의 행동이 어디로 나갈지 알 수 없어 가현은 얼굴을 돌리지 못했다.
“정가현 넌 지금 얼마나 사람 미치게 하는지 모르지.”
근사하게 입꼬리를 올린 지한은 그대로 입술을 겹쳤다. 그의 입 안에서 좀 전까지 핥아대던 맛이 전달됐다.
흥건히 젖은 손이 가현의 봉긋한 살결을 거칠게 매만졌다. 차갑고 축축한 손이 닿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지한은 가현을 다시 다그쳤다.
작은 몸이 지한의 쳐올리는 힘에 위로 밀려 올라갔다. 사정을 봐주지 않는 지한을 그대로 받아내기엔 두려웠다. 몸을 반으로 가를 것처럼 하반신이 부딪치는 소리가 둔탁했다.
깊숙이 파고드는 그의 행동이 성난 황소 같았다.
울먹이는 가현이 지한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매달렸다.
“그래 그렇게 매달려 그리고 놓치지 마.”
골반을 붙잡은 손이 단단했다. 지한은 그대로 깊숙이 가현에게 밀려들었다.
더는 닿을 수 없는 곳까지 밀고 들어와 빈틈없이 서로의 몸이 맞물렸다.
“너무 깊이 들어…. 앗.”
가현은 말을 다 끝내지도 못하고 참을 수 없는 신음을 흘리며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아버렸다. 흐려진 가현의 시선에 지한의 찌푸려진 얼굴이 담겼다.
“미치겠군.”
몇 번을 겪어도 그와의 정사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만큼 강렬해 매번 당황하게 했다. 마음과 다르게 몸은 경직되어 힘을 뺄 수가 없었다. 숨을 헐떡이는 것 외엔 온몸에 힘이 들어가 바들바들 떨었다.
“힘을 빼. 날 죽이고 싶은 건가?”
“나도 그러고 싶지만 마음대로 안 돼요.”
두 사람이 숨을 들썩이며 서로의 몸에 적응하길 기다렸다. 지한이 움직임을 달리했다.
작은 움직임에도 마찰한 몸이 반응해 가현도 처음 들어보는 비음 섞인 신음이 나왔다.
다리를 어깨에 걸쳐 더 깊숙이 뜨거운 열기가 결속됐다.
몸속이 열기로 녹아내릴 것 같은 느낌을 주체하지 못했다.
서로의 체액이 섞여 맞물린 몸이 질척이는 소리로 온실을 채웠다.
길들여지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