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길들여지는 밤-26화 (26/67)

26

가현에게 통역사가 부탁했다.

“이분은 정말 호의로 그러시는 거예요 오해하지 마세요. 저쪽 가게에서 입으시면 됩니다.“

가현이 고민을 했지만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오늘은 자신이 아니고 싶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미리 전화해 놓겠습니다.”

묵례를 하고 돌아섰다. 그녀가 한복 대여점에 들어가자 방금 연락을 받았다며 그녀를 안내했다. 생각과 달리 안쪽 고급스럽게 꾸며진 룸으로 들어갔다.

밖에 비치된 옷보다 고가라는 걸 한복을 모르는 가현이 보아도 알 것 같았다.

한복을 입고 옷에 맞게 머리도 손질해 주었다. 여러 장신구가 형형색색 곱게 비치되어 있었다.

“화장도 해 드릴까요? 피부가 좋으셔서 화장은 가볍게 할게요.”

자신이 아니고 싶은 만큼 달라질 수 있다면 환영이었다.

“네, 해주세요.”

꽃으로 수 놓인 신발까지 맞춰 신으니 정말 그럴싸했다.

“어머나, 어쩜 이렇게 고우세요. 정말 잘 어울려요.”

“감사합니다.”

“나중에 우리 가게 모델을 해주세요. 농담 아니고요.”

가게 주인은 가현을 보고 감탄했다. 가게를 나가려는 가현을 붙잡고 한복에 어울리는 가방까지 들려주고는 좋아했다.

가현이 인사를 하고 창덕궁으로 들어갔다.

한복을 입은 사람 중에 단연 돋보였다.

“나쁘지 않네.”

흔하게 입는 대여복과는 달랐다. 가현은 돈 많아 보이던 남자가 비싼 옷을 대여했다 생각해 고마웠다.

외국인들이 자신과 사진 한 장 찍어달라고 여러 번 말할 정도로 가현이 한복을 입은 모습은 눈에 띄었다.

창덕궁 연못가를 지나던 가현이 또 한차례 외국인의 부탁에 함께 사진을 찍었다.

고맙다고 말하는 그들과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좀 전 옷을 빌려주었던 남자와 마주쳤다.

[나랑은 사진 찍기 싫다더니 다른 사람들은 잘도 찍어주네.]

통역사가 예의를 차려 통역했지만, 남자의 퉁명스러운 말투에서 많이 순화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통역사님, 저분 그렇게 말 안 했죠? 저 언어를 몰라도 알겠어요.”

통역사는 당황해 얼굴이 붉어졌다.

남자가 통역사에게 뭐라고 하는지 물었다. 통역사는 난감해하며 그 남자에게 말을 했다.

통역사의 말을 듣고 남자는 밝게 웃었다.

[내가 하는 말 그대로 전해요. 내가 준 옷 입고 다닌 사람 좋은 일만 시킨다고.]

전해 들은 말이 틀리진 않아. 가현이 툭 한마디 던졌다.

“나랑 찍어요. 못 찍을 이유가 없는 것 같아요.”

“자존심이 상하지만 좋아하십니다.”

두 사람은 다정하게 사진을 찍었다. 남자가 불쑥 가현에게 한마디 했다.

[아마드.]

“아마드.”

[내 이름이라고.]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가 말한 것이 그의 이름이었다.

“가현, 정가현.”

[가현?]

어눌한 발음에 가현이 웃었다.

[내가 웃겨?]

아마드의 지시에 작은 말까지 통역하느라 통역사는 고생했다. 투덜거렸지만 자신보다 몇 살 많아 보이지 않는 그는 귀여웠다.

“귀여워요.”

먼저 발걸음을 떼는 가현을 뒤따라오며 남자가 어이없어했다.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아 생각보다 한복이 잘 어울렸다.

[귀엽다니 그런 말은 정말 처음 들어봐.]

“그리고 생각보다 한복이 잘 어울리네요.”

생각지 못한 칭찬에 아마드가 기분이 좋아졌는지 고맙다고 했다.

가현이 그의 단순함에 씩 웃었다.

[너도 정말 잘 어울려. 웃으니까 더 보기 좋아.]

“그렇군요. 안 추워요? 모로코가 더운 나라 아니에요? 추운지 코가 빨개요.”

[아까부터 엄청 추워.]

통역사와 아마드가 이야기를 나누고는 다가와 가현에게 말을 전했다.

“따뜻한 차라도 한잔 마시는 건 어때요? 함께 차 한잔하셨으면 하시는데요.”

“네 좋아요.”

경계심은 어디로 가고 이제는 아마드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즐거웠다.

함께 차를 마신다니 아마드는 기뻐했다.

한 남자는 자신이 무엇을 하든 핀잔을 주는데 한 남자는 자신이 함께해주는 것만으로도 기뻐했다. 지한이 떠올라 가현은 씁쓸했다.

전통차를 마셔보고 싶다는 아마드와 전통 찻집에 마주 앉았다. 그는 추위가 가시니 살 것 같다며 더 밝은 표정이었다.

가현의 앞에 붉은색의 오미자차가 놓여 있었다. 아마드는 대추차를 시켰는데 생각보다 입맛에 맞는다며 좋아했다.

작은 것에도 즐거워하는 그가 부러웠다.

“아마드, 오늘 감사해요. 여기 오기 전에 슬펐거든요. 그래서 여기 오게 됐는데 당신 때문에 너무 즐거웠어요.”

[내가 행운을 불러오지.]

그의 자신감에 가현은 또 한 번 웃었다.

[정말이야. 날 만난 덕분에 앞으로도 행복한 일이 많을 거야.]

“나도 믿고 싶어요. 정말 행복해졌으면 좋겠거든요.”

가현은 아마드와 헤어지고 옷을 반납하려고 한복 대여점으로 향했다.

“이건 그분이 대여가 아니라 구매하신 옷입니다.”

“네? 이 한복 비싸지 않아요?”

“비싸죠. 520만 원이나 하는 한복인걸요.”

눈이 휘둥그레져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보았다. 가격을 알고 나니 함부로 만지는 것조차 부담스러웠다.

“탈의하시면 포장해 드리겠습니다.

“이거 돌려주고 싶은데요.”

“그분 연락처를 모릅니다. 나중에 여자분에게 주라고 하셨어요.”

탈의 후 한복을 챙겨 들고 한복 가게를 나왔다.

몇백만 원짜리 한복이 공짜로 손에 들려 얼떨떨했다.

그렇게 가현은 도망치듯 시작된 일탈을 마무리했다. 한 번도 그의 울타리를 벗어난 적이 없던 가현에겐 즐거운 일탈이었다. 어쩌면 그를 벗어나는 게 더 행복할지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의 처지는 다시 그의 울타리로 들어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

교진이 아침부터 서재로 지한을 찾아왔다.

다른 날과 달리 달갑지 않은 표정이었다.

“대표님, 오늘 선대 사장님 기일입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제사 준비는 장 여사가 저녁쯤 마무리할 예정입니다.”

지한이 인상을 구기며 참아지지도 이해되지도 않는 마음을 이야기했다.

“그 제사 말입니다. ……난 별 의미 없습니다. 감정 없는 나를 잘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죽은 귀신이 돼서까지 꼴도 보기 싫은 인간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는 건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아요. 과연 장원댁이 차린 그 진수성찬인 제상을 받을 가치가 있는 인간이었다고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지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입고 있던 옷을 정리하고 서재를 나가려 했다.

따라가며 평소 말이 많지 않던 지한이 쏟아내는 말을 묵묵히 들었다. 그가 다시 냉정한 표정을 찾고는 교진에게 감정을 추스르고 평소처럼 말했다.

“이 집에서 그 사람의 제사는 올해까지입니다. 내년부터 절로 보낼 테니 그렇게 알아요.”

“그래도 대표님.”

놀란 교진은 그를 설득하려 시도했지만 이어지는 그의 말에 입을 닫았다.

“그 빌어먹을 인간이 죽은 후 19년을 제사를 지냈어. 장원댁과 정 실장 덕분인 건 알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

지한이 말을 마치고 벌컥 문이 열렸다. 명 비서가 서재로 들어오려다 두 사람의 심각한 분위기에 주춤했다.

“명 비서, 오늘 제사 다음 해부터 조원사에 맡긴다고 연락해. 출근하지.”

“네…… 알겠습니다.”

복도로 걸어 나가며 지한이 서재에 선 교진에게 쐐기를 박았다. 평정심을 되찾은 얼굴에는 일말의 자비도 없어 보였다.

“그러니 토 달지 말아요.”

***

저녁 늦게 퇴근한 지한은 제삿날이면 교진이 안내하던 방으로 향했다.

거한 제사상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상 앞에서 구경하던 지한이 제상 앞에 놓인 소파에 앉았다.

제사상을 신경도 쓰지 않고 다리를 꼬아 앉아 넥타이를 빼냈다.

소파에 깊이 기대며 제사상을 쏘아 보았다.

“자식은 내가 아니라 정 집사와 장원댁이 해야 했어. 안 그래?”

죽은 이에게 하는 말이라 생각되지 않는 지한이 제상으로 다가와 자조하듯 혼자 중얼거렸다.

“돌이켜보면 당신이 뽑았던 사람들이 지금도 날 지키고 있어.”

상 옆에 놓인 작은 도기 술병을 든 지한이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빈 술잔에 맑은 청주를 따랐다.

상체만 숙인 그는 제사를 지내는 예의 따위는 지킬 생각이 없어 보였다.

따르던 술잔에 술이 넘쳐 상위를 흘러 적셨다.

“사람 하나는 귀신같이 뽑았어, 차 사장. 이건 그에 대한 고마움.”

부모가 아닌 남에게 하듯 호칭까지 차 사장이라 말했다. 지한에게 연민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경멸에 가까운 표정이 지금을 참아 내는 것 같았다.

작은 술병에 술을 다 비워내어 옻칠이 된 상위가 술로 흥건해졌다. 스며들지 못하고 반질반질한 상위를 춤추듯 흔들렸다.

지한은 옆에 놓인 여분의 청주 병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술병 그대로 몇 모금 넘긴 그는 개운한 표정으로 다시 소파로 가 앉았다. 탁 소리가 나게 술병을 앞 테이블에 놓고는 조롱하듯 웃었다.

길들여지는 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