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길들여지는 밤-25화 (2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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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세요?”

“가현아. 자고 있어? 어제 집을 비워서 잘 있었나 해서.”

“네, 저 몸살기가 있어서 자다 깼어요. 나갈게요.”

“아니야. 더 자렴. 저녁때 부르게 쉬어.”

교진이 돌아오자 안심이 되면서도 차지한은 어디에 있는지 궁금했다.

가현은 씻지도 않고 잠을 청했다는 걸 알았다. 이불을 들어 몸을 확인했다. 어제의 일이 꿈이 아니라는 흔적들이 하반신에 가득했다.

맥이 풀려 침대에 얼굴을 묻었다.

“어떡하지.”

아무리 고민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욕실로 들어가 거울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 타인이 벌거벗은 몸을 본 것처럼 거울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피했다.

“어떻게 무슨 일이야.”

쇄골부터 가슴께를 지나 온통 물린 자국으로 가득했다.

봉긋한 정점은 부풀어 올라 쓰라리기까지 했다.

그의 손에 거칠게 잡혔던 손목은 멍이 들어 있었다.

어느 곳 하나 성한 곳이 없어 민망함보다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난감했다.

“앞으로 어떡하지?”

가현은 욕조에 주저앉아 무릎을 감싸 안았다.

따뜻한 물이 차올라 온몸을 가라앉혔다.

순간순간 어제의 일들이 떠올랐다.

지한이 얼굴 옆에 쏟아놓았던 콘돔이 찢기는 소리를 처음에는 횟수를 세었다.

도통 적응되지 않는 부피감이 가현을 침범해 다그칠 때는 머릿속이 모두 비어버렸다. 여러 번 반복되니 그에게 매달려 신음을 흘리는 자신조차 인식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아침에 홀로 온실에서 깨었을 때 옆에 쏟아져 있던 콘돔은 없었다.

밤부터 시작해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을 온실 창가에 세워져 보았다. 뒤에서 한쪽 팔로 끌어안은 손은 봉긋한 살결을 움켜쥐고 지탱시킨 채 거칠게 가르며 가현을 탐했다. 휘청이는 시선에 붉어지다 밝아지는 새벽하늘을 보고 있었다. 그쯤 정신을 잃었던 것 같았다.

“오늘은 이 정도 하지.”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를 끝으로 잠에 빠져들었다.

***

아침에 깨었을 때 통증이 가시지 않아 자꾸 어제의 정사가 머릿속을 채웠다.

교진을 찾으러 응접실로 향했다. 그를 찾아 다닐 때 눈앞에 불쑥 봉지 하나가 시선에 들어왔다.

눈앞에는 호두과자라고 쓰여 있었다.

가현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식어서 다시 데워줄게.”

“식은 것도 잘 먹어요.”

“제대로 먹어야지.”

잊지 않고 가현이 말했던 선물을 사 온 교진기분이 좋아 보였다.

교진이 오븐에 데워온 호두과자는 정말 맛있었다.

전날 저녁부터 점심까지 먹은 것이 없으니 당연했다. 맛있게 먹고 있는 가현에게 우유를 따라주며 왜 아침도 안 먹었냐며 걱정했다.

“어젯밤에는 아무 일 없었지?”

형식적인 질문인데 대답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아무 일 없었다고 하기엔 가현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자신이 매달린 것인지, 그가 자신을 유린한 것인지 분간도 되지 않는 정사가 다시 떠올라 얼굴이 붉어졌다.

“네…… 아무 일 없었어요.”

“정말 아무 일 없었나?”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사레가 들려 콜록콜록 기침했다.

“괜찮아?”

심한 기침에 교진이 등을 두드려주는 사이 지한이 투명 물잔을 그녀의 앞에 내려놓았다.

기침하며 그를 올려다보니, 다른 물잔을 든 그가 먼저 물을 마시고 있었다.

울컥울컥 목울대가 움직이는 걸 멍하니 보고 있었다.

“얼른 마셔.”

그치지 않는 기침이 걱정되어 교진은 재차 물을 권했다.

기침이 잦아들 때까지 지한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제 좀 괜찮나? 잠시 서재로 와 할 말이 있어.”

“…….”

‘무슨 할 말이 있을까?’

불안하지만 교진이 앞에 있는데 지목해 찾았으니 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가현이 노크하기 전 긴장된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지한은 서재로 들어온 가현은 보지도 않고 물었다.

“몸은?”

“…….”

“대답.”

“네. 괜찮아요.”

“괜찮다니 다행이군. 난 다음에도 봐줄 생각이 없거든.”

‘다음?’

어제 같은 정사를 또 하겠다는 거야?

가현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그를 보았다. 서류를 넘기며 시선을 주지 않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놀란 눈이 그의 의도를 이해하고 불안하게 흔들렸다.

말을 못 하고 당황하는 기색에 지한이 덧붙였다.

“어제 나에게 널 팔았어? 기억하나?”

밤을 지새운 정사는 그와의 관계를 온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저 그가 머릿속을 들어차게 했던 스킨십과는 차원이 달랐다. 차지한의 눈빛이 바뀌었고 어쩌면 자신도 그를 보는 눈빛이 바뀌었을지 몰랐다.

그가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가현은 발이 떨어지지 않아 숨을 고르고 천천히 책상으로 다가갔다.

“대답.”

“……네, 하지만.”

“지금 와서 발뺌하려고?”

“아니에요.”

지한은 가현이 어색하게 서 있는 책상으로 그녀를 밀었다. 가현이 책상에 바짝 붙어 서 있었다.

지한이 가현을 들어 책상에 앉혔다. 롱스커트를 입은 그녀의 다리 사이에 지한이 자리 잡았다.

가현은 그가 또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긴장했다.

지한이 가현의 눈을 응시하고 다리를 타고 손을 올렸다. 점점 위험한 선을 넘어 손이 타고 오를수록 가현의 눈이 커졌다. 놀란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익숙한 손길로 자극점을 건드렸다.

가현의 눈이 흐려지는 걸 보고는 그가 해사하게 웃었다.

“이곳은 참 길들이기 힘들어.”

그의 앞에 그가 끌어올린 다시 사이가 그대로 노출됐다. 그 와중에도 길들이겠다는 살점을 농밀한 눈빛으로 자극했다.

“읏.”

“극단적인 방법을 써 달래도 봤지만 아직은 나에게 너무 적응을 못 하고 있어.”

민망할 정도로 노골적인 말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해 가현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가 농밀하게 탐하던 손길을 눈앞에 들었다.

이 남자의 행동은 예측이 되지 않아 그 앞에 서면 백지장이 되었다.

자신을 무너뜨리던 손끝 너머로 그의 붉은 입술이 야하게 벌어졌다.

가현은 더는 볼 자신이 없어 그를 피해 방을 뛰어나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위험한 남자를 건드렸다.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에게 길들여지면 벗어나기 힘들어.’

스스로 수렁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수렁은 다름 아닌 하데스가 다스리는 지옥일지도 몰랐다.

***

가현은 방으로 돌아와서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이 남자는 자신을 노리개로 삼겠다, 노골적으로 말했다.

답답한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정 실장님, 저 잠시 외출하고 올게요.”

“혼자 괜찮겠어?”

“괜찮아요. 회사도 혼자 가잖아요. 살 물건이 있어서 금방 올게요.”

“조심해서 다녀와.”

가현은 그가 이해되지 않아 무작정 외출을 강행했다. 한 번도 회사 외에 외출해본 적이 없었다. 회사든 저택이든 그의 울타리 안에 있었다. 마치 자신이 야생에서 잡아 길든 농장 동물처럼 느껴졌다.

무작정 걷다 버스를 탔다.

어디로 갈지 몰라 버스가 달리는 창밖을 구경했다. 생각지 않게 창덕궁이라 안내 방송이 나와 급하게 벨을 누르고 내렸다. 현실에서 도피하기엔 고궁이 딱이라 생각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창덕궁 문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 보였다.

자신과 동떨어진 그들을 멍하니 보고 있던 가현에게 남자 한 명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뒤에는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은 외국인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이쪽을 주시했다. 가현은 트라우마로 검은 정장의 남자를 보면 경계했다.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한복 입고 함께 사진 찍어 주실 수 있을까요? 사례는 충분히 하겠습니다.”

“네? 무슨 말씀인지…….”

가현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복이야 대여를 하면 되지만 사진을 함께 찍어달라니.

‘변태인가.’

모호한 말들에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도망가려는 방어기전이 발동해 도망칠 자세로 긴장했다.

“오해하기 딱 좋죠.”

가현의 경계하는 반응을 보고 남자도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안다니 이상한 사람은 아니구나 싶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설명하자면 저는 통역사입니다. 지금 모로코에서 오신 분을 가이드하고 있습니다. 이분께서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고 싶어 하시는데 연인이 보기 좋아 함께 사진 찍을 사람을 찾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분께서 여성분이 마음에 든다고 하시네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하다고 해야 할까요? 이건 아닌 거 같고…. 저는 그럴 마음이 없어요.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지나쳐 걸어가는 그녀에게 외국인 남자가 불쑥 말을 걸었다.

옆에 있던 통역사가 빠르게 한국말로 전했다.

정장 차림이 깔끔했다. 아랍계 남자로 보이는 그는 생각보다 키도 크고 나이도 많지 않았다.

[나와 사진은 찍지 않아도 되니 한복은 입어요. 이미 돈은 치렀으니까.]

반응이 없는 가현에게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한복 입으면 입장료도 공짜라던데. 그쪽이 안 입으면 이건 그냥 날리는 거야.]

돈이 많아 보이는 외국인 남자의 현실적인 말은 생각지 못해 눈여겨보았다.

길들여지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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