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길들여지는 밤-21화 (2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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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님은 평범한 듯 보이지만 보통 분이 아닙니다. 자세하게 말할 수 없지만, 이 나라를 좌지우지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이 되는 분이죠.”

명 비서는 서류를 내려놓고 할 말을 고민했다.

“무엇을 우려하는지 알겠어요. 불법적인 일을 하는지 불안한 거 압니다. 하지만 절대 불법적인 일은 없습니다. 불법적인 일이라면 지금까지 유형 그룹이 이만큼 클 때까지 주위에서 가만두지 않았을 겁니다. ……불안함은 내려놔도 됩니다.”

“가장 걱정했던 부분이었어요. 죄송해요.”

“가현 씨 입장이라면 걱정되었겠어요. 자세하게 설명해주는 사람도 없으니까요. 사장님은 한 기업의 대표가 아니라 업체들을 움직일 수 있는 분입니다. 그만큼 책임감이 강한 분이죠. 가현 씨가 걱정할 문제는 없을 겁니다. 대표님을 믿으세요. 말은 살갑게 하지 않지만, 책임감이 있는 만큼 자기 사람도 챙기는 분입니다. 그렇다”

“……네, 알겠습니다.”

책임감으로 똘똘 뭉친 위험한 남자.

그에게는 수수께끼가 많아 더 호기심이 갔다.

가현은 그가 필요한 사람인 만큼 알 수 없는 그가 궁금했다.

***

아무리 바쁜 사무실이라도 무료해지는 오후는 집중력을 흩트렸다.

“유형 그룹 비서실입니다.”

나른한 오후만큼 서 대리의 목소리도 늘어졌다.

전화를 받은 서 대리의 목소리가 군기가 바짝 오른 군인처럼 변했다.

다른 비서진이 그녀의 반응에 고개를 들었다.

“네, 알겠습니다.”

“서대리, 무슨 일이야?”

“과장님! 표창 그룹 백 회장님께서 10분 후에 도착하신답니다.”

김 과장이 곧장 일어나 지한에게 백 회장의 방문을 알리고 분주해졌다.

전화를 끊은 비서실은 다시 분주해졌다.

“가현 씨, 나 좀 도와줘요.”

서 대리가 탕비실 문을 열고 도움을 청해 가현이 탕비실로 빠르게 들어갔다.

서 대리는 잘 쓰지 않던 다기를 죄다 꺼내어 다기를 데우기 위해 물을 끓였다.

“백 회장님이 누구세요?”

서 대리는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단순하게 말하면 차지한 대표님 위에 실세?”

“네?”

세상 무서울 게 없는 차지한 위에 누가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대표님 아버님이 이 회사의 창립 멤버셨는데 돌아가시고 우리 대표님을 대신해 이 회사 명맥을 이어주신 분이 백 회장님이세요. 어떻게 보면 백 회장님이 우리 대표님 아버지 같은 분이지.”

“그런 분이 계셨군요.”

“그때 백라윤 본부장님 봤죠? 본부장님 아버지세요.”

“아!”

생각지 못한 라윤의 이름을 듣고 그녀가 날을 세우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지한의 옆자리가 자신의 자리라 숨기지 않았던 그녀에게 자신은 분명 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때는 경계하는 그녀를 설득하려 했지만, 지금은 그녀의 우려가 사실이 되었다. 그와는 끈끈하게 이어진 사이라고 하니 그의 주위를 맴도는 가현은 침울해졌다.

조금씩 들려오는 인기척에 탕비실 밖을 확인했다.

백 회장은 기게 좋게 사무실로 들어와 비서실까지 나와 맞이하는 지한과 악수했다.

“오셨습니까.”

“잘 지냈나?”

호방해 보이는 인상에 아들을 대하듯 지한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가현 씨, 차 자기가 가져다드리면 안 될까?”

“제가 해도 될까요?”

중요한 손님이 오면 늘 서 대리가 담당했다. 중요한 자리인 만큼 센스 있게 대처해 대표님의 손님은 서 대리의 몫이었다.

“나 지금 바로 회의 들어가야 해. 벌써 5분 늦었다! 빠질 수 없는 회의여서 이번만 이거 가져만 드리면 돼. 차는 평소 회장님께서 드시던 대로 내가 다 했으니까 이대로 가져다드리면 돼. 가현 씨, 부탁할게.”

말릴 틈도 없이 서 대리는 부리나케 탕비실을 빠져나갔다.

다기가 순서대로 놓인 트레이를 들고 사무실 앞에서 크게 숨을 들이쉬고 노크했다.

두 사람은 가현이 들어오자 하던 말을 멈추었다. 다기가 담긴 트레이를 내려놓자 백 회장이 말을 걸었다.

“차 대표가 병원에 입원시킨 아가씨를 이렇게 보는군.”

“…….”

가현은 백 회장이 이미 자신을 알고 있어 당황했다. 짧게 묵례하자 지한이 차단했다.

“나가봐.”

“네.”

가현이 방을 나가고 지한은 불편했다.

백 회장의 정보력을 생각하면 가현의 존재를 아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한번도 지한에게 정보력으로 압박을 했던 적이 없었다.

백 회장을 향한 알 수 없는 불편함은 처음이라 거북했다.

“아무 사이 아니라더니 사무실에까지 들였냐?”

“능력이 필요해 들인 것입니다.”

“그럼 아무 사이 아니다?”

“네, 그렇습니다.”

“적당히 데리고 노는 거야 뭐라고 하겠냐.”

백 회장은 서글서글한 인상이지만 눈빛만은 남달랐다. 질문에 대답하는 지한을 면밀히 살폈다.

그의 대답에 원하는 답을 얻었는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라윤이가 저 여직원 때문에 날을 세우는 거 아니냐?”

“그런 것 같습니다.”

“난 결혼 찬성.”

“저 같은 놈에게 라윤이를 맡기실 수 있겠습니까?”

“미친놈들 넘쳐나는데 이왕이면 사업해서 평생 힘들지 않게 먹여 살릴 보장이 되면 됐지. 그런 놈에 너는 적격이고.”

“잘못 판단하셨습니다. 다시 생각하십시오.”

“이 자식, 훈계질은. 내 심장은 가끔 고장이 나도 아직 이 머리는 쌩쌩해.”

서로 농담인 듯 무거운 이야기를 해온 두 사람이었다. 지한은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라윤을 말려달라 종용했다.

“제가 어떻게 커왔는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회장님 비즈니스에 냉혹하신 분이지만 자식과 가족은 아끼시는 걸 압니다. 그러니 아무 상관 없는 저도 거두셨겠죠.”

“아는 놈이니 말로만 하는 아들 말고 진짜 가족 하자는 거다.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니야.”

“……회장님. 저는 평범하지 않습니다. 라윤이에게는 평범한 행복이 필요하지, 저와 엮여서 좋을 게 없습니다.”

백 회장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걸 몇 번 보지 못했다.

세상 아쉬운 것 없는 백 회장이 자식을 위해 부탁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한은 들어줄 수 없어 곤란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게 네 뜻이냐?”

“네, 그렇습니다.”

단호한 대답에 백 회장이 한숨을 푹 쉬었다.

“어릴 때부터 라윤이는 웬만해서는 고집을 피우지 않았어. 하지만 한번 결심한 건 나조차 말릴 수 없었지.”

“그건 회장님을 닮았죠.”

“욕이냐? 칭찬이냐?”

털털한 백 회장의 질문에 두 사람은 웃었다.

“그 녀석이 이 정도로 고집을 피우면 난 말릴 수 없다. 난 반대할 이유도 없고. 네 녀석이 마음을 바꿔주는 게 가장 쉬운 방법이지.”

“…….”

지한의 마음을 알아도 팔이 안으로 굽는 것처럼 백 회장도 자식 편을 들었다.

“난 네가 사위가 되는 걸 라윤이 만큼이나 반긴다. 그래서 말리지 않을 생각이다.”

지한은 예상했다는 듯 차분한 표정이었다.

“그 녀석은 쉽게 마음 바뀌지 않을 거다. 그걸 해결하는 것도 네 놈 능력이야.”

“제가 상처 주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지한이 농담처럼 받아쳐 백 회장의 장난기가 발동했다.

“네 놈 끌어다가 평생 상처를 준 만큼 갚게 해야지.”

”결국 소기에 목표는 이루겠군요.“

“입장이고 뭐고 그 방법이 제일 쉽긴 하겠다.”

털털한 성격만큼 백 회장은 껄껄 웃어 젖혔다.

앞에 놓인 청록색 다기의 차가 식기 전에 그가 차를 마셨다.

“라윤이는 즉흥적이지 않아. 너에 대한 마음은 더 그렇지. 그러니 심사숙고해 주길 바란다.”

“알겠습니다.”

백 회장은 무거운 숙제를 주고 지한의 사무실을 나섰다.

***

구정 설 연휴라 다들 들떠 있었다. 사용인들은 설 휴가 채비를 하느라 조용하지만 어수선했다.

휴가 갈 생각은 하지 않고 요리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장원댁은 연휴 동안 혼자 있을 차지한 걱정이 태산이었다.

“연휴에 사용인들을 다 보내면 식사에 청소에 집 안 정리는 어떻게 하시려고 다 보내시나 몰라. 나라도 남으면 좋은데 꼭 갔다 오라고 하시고 어휴.”

장원댁은 팬 웍을 화려하게 돌리며 혼자 중얼거렸다.

“매년 설에 다 휴가를 보내요?”

“응, 원체 번잡한 건 싫어하셔서 정 실장님은 가족들도 돌아가시고 여기가 집이니 정 실장님 있다고 설 휴가를 죄다 보내시지.”

장원댁 음식 준비를 돕느라 테이블에 앉아 마늘을 까고 있는 가현도 갈 곳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테이블 가득 잡채에 나물, 산적까지 설 분위기 물씬 나는 음식들이 용기마다 소담하게 담겨 있었다.

모락모락 음식이 식어가는 향이 무척이나 좋았다.

“음식 몇 가지 남았어요?”

“이제 하나 남았어. 우리 도련님이 좋아하는 육전.”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행동이 자식을 챙기는 어머니 같았다. 장원댁은 늘 차지한 편이니 놀랍지도 않았다. 눈앞에 유리 용기에 담긴 많은 음식이 걱정됐다.

“이걸 누가 다 먹어요?”

“도련님, 정 실장님 외에 올해는 가현이 너까지 있는데 이 정도는 돼야지.”

길들여지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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