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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적으로 노크만 한 라윤은 허락도 없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자신의 사무실 같이 거침이 없었다.
당당한 모습은 언제나 그녀를 더 빛나게 했다. 그걸 알아보지 못하는 건 늘 지한뿐이었다.
“무슨 일인데 이렇게 들이닥쳐?”
“오빠 나랑 이야기 좀 해. 안녕하세요. 명 비서님.”
반기지 않는 목소리에 화답하듯 라윤도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고 표현했다.
“네 안녕하세요. 백 본부장님.”
“조금 후에 하지. 나가봐.”
보고받던 지한이 손짓해 명 비서를 물렸다. 라윤이 지한에게 다급하게 들이닥칠 때는 늘 백 회장의 소식이었다. 그의 질문이 화를 부추겨 라윤은 더 저기압이었다.
“회장님께 무슨 일 생겼어?”
“오빠는 아버지가 아니면 나랑 할 말이 없지.”
“왜 날이 서 있지? 백라윤. 네가 급하게 날 찾을 때는 회장님 일이었으니 하는 말이야.”
잠시 생각한 라윤이 소파를 손으로 짚고 미간을 살포시 찡그렸다. 표정이 더 좋지 않았다.
“내가 지금까지 선택을 잘못했구나! 오빠를 찾아올 명분을 아버지로 만들었으니까.”
라윤이 타이 블라우스 소매를 살짝 밀어 올리며 지한의 책상 앞으로 왔다.
“이젠 그렇게 안 하려고. 나랑 결혼하자.”
“…….”
지한은 라윤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라윤은 날카로운 시선이 부담스러워도 피하지 않고 당당한 요구라는 반응이었다.
지한은 흔들리지 않고 차분하게 물었다. 라윤을 달래려는 의도가 분명해 보였다.
“전자는 이해했는데, 후자는 왜?”
“노선 확실히 하겠다고.”
“일전에 결혼에 대한 내 의견은 명확히 말했다고 기억하는데 백라윤이 갑자기 이러는 이유는 뭐야?”
“오빠는 결혼하지 않겠다지만 여자의 촉은 무시할 수 없어. 이왕 할 결혼이면 난 오빠와 할 거야. 다른 사람은 내 예비 신랑 후보에 없어.”
라윤이 단단히 벼르고 온 것 같아 지한이 만년필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빠에게는 어떤 선택지가 있는지 모르지만, 오빠의 차선책도 나여야만 해. 다른 여자가 오빠 옆에 있다면 내가 참을 수 없을 것 같아.”
“난 집착하는 여자 취미 없어. 오히려 싫어한다.”
라윤은 자존심에 상처를 내는 말은 귓등으로 듣고 단단히 결심한 태도였다.
“아버지 사업 일부 승계받을 준비를 하고 있어.”
“그건 백 회장님 건강을 생각해도 외동딸인 너를 위해서도 파장을 줄이는 좋은 결정이야.”
“고맙게 생각해. 아버지 생각 바꾸시는데 오빠가 설득했다는 걸 알아.”
백 회장의 건강 상태는 언론에 알려진 것보다 심각했다. 사업의 규모를 생각하면 하루아침에 그가 사라지면 그 파급은 머리가 아플 정도였다. 승계자는 결국 라윤이었고 백 회장을 닮은 똑똑한 그녀라면 가능하다 판단했다. 충분히 백 회장이 살아 있을 때 자리를 공고히 할 수 있다며 백 회장을 설득한 이는 지한이었다.
지한은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은 모르는 일이란 제스처를 취했다.
“사업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에서 오빠 사업이 평범하지 않은 사업도 있던데. 확인한 바로는 아버지의 도움 없이는 힘들었던 사업도 있었어.”
“그래서.”
동생을 대하던 눈빛에서 달라졌다. 날카로운 눈빛이 냉혹한 사업가로 돌아왔다.
“이걸 사용하게 만들지 안았으면 좋겠어.”
“그걸 빌미로 결혼이라도 강행해 보겠다는 건가?”
“만약 오빠가 단칼에 지금 내 제안을 거절한다면 방금 말한 사업을 이용할 용의 있어.”
지한이 라윤이 선 옆의 책상에 걸터앉아 팔짱을 꼈다.
“백라윤.”
“또 무슨 말로 설득하려고? 해 봐.”
라윤도 팔짱을 끼고 책상에 걸터앉아 눈높이가 맞춰진 그를 보았다.
“왜 나를 지목한 거야?”
“오빠 처음 봤던 초등학교 6학년 때 이후로 차지한이 아니면 내 눈에 차는 남자는 없었으니까.”
망설임도 없는 라윤의 고백은 차지한에겐 타격이었다.
“괜한 걸 물었군.”
“나 아직 말 안 끝났어. 오빠와 내가 아버지 덕분에 만나 이후 오빠는 여자에겐 관심도 없었어. 제일 결정적인 이유는 어떤 여자에게도 호의적이지 않았어. 하지만 유일하게 나는 오빠가 잘해주는 여자였어.”
“백 회장님은 고아가 된 날 조건 없이 아들처럼 대해주었고 넌 여동생처럼 나를 따랐기 때문이야.”
“우리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야. 난 친오빠로 오빠를 본 적이 없어.”
“라윤아, 난 널 여동생으로 생각해. 만약 사업을 끌어들여 날 협박한다면 우리는 끝이 좋지 않을 거야.”
“그럼 오빠가 한발 물러나면 되겠네.”
지한은 말이 통하지 않는 라윤 때문에 웃음이 나왔다.
“내 선은 거기까지야. 널 동생으로 생각하는 호의적인 선.”
“나에게도 한계점이 있어. 그건 오빠가 내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 호의적일 때 그 선을 넘은 건 오빠야.”
지한이 미간을 찌푸리고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마. 난 화나니까.”
라윤은 지한보다 더 심각하게 지적했다.
“저 문밖에 있는 정가현, 오빠 연말 파티의 파트너.”
후하고 지한이 숨을 내쉬었다. 뭐라고 말해도 눈앞에서 정가현의 존재가 사라지지 않는 한 라윤은 가현을 향해 날을 세울 것 같았다.
“오빠는 내 선을 넘었어. 잘 생각하고 대답해. 아주 신중하게.”
검은 슬랙스를 입은 그녀가 또각또각 하이힐 굽 소릴 울리며 문으로 걸어갔다.
“분명 긍정적인 답변이 되어야 해. 내가 나쁜 패를 쓰지 않게 하려면 오빠에게 달렸어.”
“결혼은 구걸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야.”
“구걸이든 어떤 것이든 난 상관없어.”
물불 가리지 않는 불나방이 제일 무서운 법이었다. 라윤이 이렇게 막무가내로 결혼을 협박까지 하며 강행하리라 생각해보지 않았다.
생각지 않은 큰 변수는 지한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라윤이 사무실을 빠져나가고 지한이 책상에 걸터앉은 몸을 일으켰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백라윤, 많이 컸네.”
방심한 사이 허를 찌르고 들어올 만큼 라윤은 이제 순진한 동생이 아니었다.
***
가현은 그의 밑에서 일하는 것에 불만이 없었지만 여러 아리송한 업체들을 발견하고 찜찜했다.
알 수 없는 출처와 묘한 업체명은 차지한이 그저 유형 그룹 대표로만 일하지 않는다는 걸 짐작케 했다.
누구에게도 섣불리 말할 수 없었다. 가현이 맡은 일은 그의 비서실에서 공식적으로 다루는 일이 아니었다. 상의할 사람도 없어 궁금증은 입도 마음도 무겁게 묻어야만 했다.
우연히 티브이에 나오는 업체 이름이 익숙했다.
[오늘 삼중 기업의 탈세가 검사의 압수수색으로 드러났습니다. 삼중 기업은 경기도 조직폭력배 중 하나였던 장형원에서 시작해 기업으로 탈바꿈한 건실한 기업으로 성장한 바가 있습니다.]
‘삼중 기업? 깡패?’
깡패였던 집단이 회사로의 탈바꿈으로 거대기업이 되어 생긴 탈세가 주 내용이었다. 회사의 배경을 듣고 나니 제 일이 더 의심스럽고 불안했다. 가현은 자신이 알고 있는 회사들을 찾아보았다.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 기업도 있었고 나온 기업들 또한 평범하게 드러난 기업이 아니었다. 약간은 음지에 가까운 일을 하는 업체라 짐작했다.
가현의 일은 명 비서가 지시했다.
계약직이라도 가현이 무슨 일을 하는지 비서실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묻지 않았고 다른 일은 시키지도 않았다.
일주일에 한 번은 명 비서의 업무 지시를 받는 공식적인 미팅을 했다.
바쁘게 서류를 확인하며 미팅 중 가현이 용기를 내었다.
“저. 명 비서님. 질문이 있어요.”
“뭡니까? 하세요.”
“제가 맡은 일이 평범하지 않다는 건 일을 하면서 알 수 있었어요.”
“무슨 뜻이죠?”
명 비서는 서류를 넘기던 손을 멈췄다. 그가 그렇게 행동하니 물어보는 가현은 긴장이 되어 테이블 밑 손을 맞잡았다.
“비서실에서 제가 하는 일을 아는 사람은 명 비서님뿐이니까요. 얼마 전 뉴스에서 제가 맡은 일에 언급됐던 회사명이 나왔어요,”
“삼중 기업?”
“네, 삼중 기업요.”
“혹시 이 말 다른 사람에게 했습니까?”
“아니요. 함부로 말하면 안 될 일을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명 비서의 표정이 심각했다.
“다행이네요. 가현 씨가 맡은 일은 우리 회사에서 극비입니다. 이건 비서실에서 다룰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부서를 만들어 다루기에는…… 위험합니다.”
여운이 남는 위험하다는 말에 생각이 많아졌다.
차지한이란 남자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베일에 싸여 상대를 긴장시키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남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나아가니 명 비서의 말들에 가현의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그의 말은 무거웠고 자신이 하는 일에 긴장이 될 정도로 명 비서의 반응은 심각했다.
길들여지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