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겨우 뱉어내던 숨이 가까워진 얼굴에 턱까지 차올라 단번에 목구멍을 막았다. 참을 수 없는 스킨십을 상상하니 몸이 저절로 움직여졌다.
가현은 남자를 젖 먹던 힘까지 보태 밀쳐냈다. 엉덩방아를 찧은 남자가 비틀거리는 가현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다 더 다쳐요.”
그에게 팔이 잡히자 필사적으로 도망칠 궁리만 했다. 잡힌 팔을 잡아 뜯듯 뿌리치고 죽을힘을 다해 문을 향해 휘청이며 뛰었다.
눈앞이 흐려지는 걸 겨우 다 잡고 커다란 강당 문을 열고 빠져나갔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에 귓가를 윙윙 울리던 사람들의 웅성거리던 강당 소음이 차단됐다.
정신을 산란시키던 소리가 사라지고 복도는 쥐 죽은 듯 조용해 살 것 같았다.
누군가 또 뒤따라올까 봐 겁이 나 필사적으로 뛰었다. 가현은 뛰고 싶었지만, 몸은 생각처럼 움직여주지 않아 대강당에서 멀어지려 쉬지 않고 걸었다. 모퉁이를 돌아 구석진 곳으로 사람들을 피해 달아났다.
분명 순수하게 도와주려는 의도는 알지만, 과호흡은 사라지지 않아 사람이 두렵기만 했다.
한번 엄습한 공포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죽을 거 같은 공포를 뱉어내듯 크게 숨을 뱉어냈지만 소용없었다.
앞도 제대로 보지 않고 휘청이며 걸어가던 가현 앞에 커다란 벽이 나타났다.
벽을 짚은 손에 부드러운 촉감과 온기가 전달됐다.
‘왜일까?’
무엇 때문인지 안심이 되었다. 그래서 더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또 시작인가?”
차가운 겨울바람 같은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온기.
차다 못해 감각이 사라질 정도의 차지한을 마주치고 나니 다행이란 생각이 떠올랐다.
그와 함께 있으니 아이러니하게 힘겨웠던 숨이 잦아들었다.
멱살을 잡듯 그의 재킷 깃을 움켜쥐고는 간절하게 말했다. 숨에 묻혀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최대한 또박또박 뱉어냈다.
“잠시만요. 헉, 헉, 잠시… 이대로 있어 주세요.”
그를 만난 건 행운 같았다. 떨어지면 죽을 것처럼 공포를 잠재울 수 있는 그에게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살려주세요. 후우, 헉, 한 번만 더 살려주세요.”
“…….”
가현은 그에게 매달려 숨을 몰아쉬느라 힘겨워했다.
“키스해달란 말을 참 힘들게 하는군.”
조소가 섞인 그의 조롱은 중요하지 않았다. 살아야 한다는 마음만 가득했다.
도와줄 마음이 없는 그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재킷 앞섶에 매달린 그녀의 행동을 관찰하듯이 삐딱하게 내려다보기만 했다.
한시라도 빨리 공포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가현을 움직였다. 까치발을 들어 그의 입술을 찾아들었다.
지한이 주춤하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지만, 창피함은 생명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가현은 살기 위한 숨을 찾듯 그의 키스에 매달렸다.
“젠장.”
닿았던 입술을 떼어내며 그가 욕지거리했다.
지한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가현의 목덜미를 손으로 움켜쥐고 끌어당겼다.
그가 한 손에 잡힐 듯 가는 목을 고정하고 깊게 가현의 입술을 삼켰다.
그제야 가현의 심장이 정상 작동을 하는 것 같았다. 지한의 키스에는 브레이크라도 있는 것일까.
가현은 그의 재킷 자락에 매달려 더 필사적으로 그의 입술을 파고들었다.
그녀가 적극적일수록 그의 키스는 거칠어졌다. 그럴수록 과호흡은 줄어들고 그의 키스로 힘겨운 숨으로 바뀌어 갔다. 그에게 삼켜진 가현의 입술이 떨어졌다.
늘 그렇듯 축 늘어져 그의 가슴팍에 안겼다. 지한은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늘어진 그녀를 지탱하고 고개를 돌려 천장 모퉁이를 확인했다. 복도 끝 CCTV 위치를 파악하고 재킷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번호를 눌렀다.
“명 비서, 대강당 앞 복도 그리고 13층 비상용 엘리베이터, 임원진 지하 주차장 동선으로 설치된 CCTV 영상 16시 25분부터 이 시간 이후 10분까지 전량 회수해. 지금 즉시!”
그는 곧바로 전화를 끊고 고저 없이 가현을 질타했다.
“정가현 때문에 별 걸 다하는군. 걸을 수 있나?”
“……네.”
못한다고 할 수 없는 고압적인 목소리에 가현은 힘이 실리지 않는 몸을 움직였다.
지한에게 기대있던 가현이 떨어지니 한 걸음 떼기 무섭게 휘청였다. 쑥 아래로 사라지는 그녀의 팔을 잡아 올렸다.
작은 몸이 그의 손아귀에 잡혀 몸을 지탱했다.
“여러 가지로 거슬려, 정가현.”
지한은 가현을 부축해 걸었다.
“죄송해요.”
“미안한 줄 알면 최대한 똑바로 걸어,”
그녀의 걸음 속도가 성에 차지 않았는지 지한은 결국 가현을 안아 들었다.
“걸을 수 있어요.”
“그 속도에 맞추다 회사 직원들이 다 보겠어.”
지한은 빠른 걸음으로 건물 가장 외진 곳에 있는 전용 엘리베이터를 탔다.
숨은 잦아들었지만, 가현은 그의 목덜미를 꽉 끌어안았다. 그에게서 나는 체향이 필요했다.
“이제 과호흡은 괜찮지 않나?”
핀잔을 주는 말에 가현이 변명하듯 말했다. 그 말에도 지한은 조소를 섞어 입꼬리를 올렸다.
“아직…… 불안해요. 다 끝나지 않은 그 느낌이 무서워요.”
“……얼마나 나에게 더 빚을 지려고 이러지. 평생 나에게 너를 바쳐도 모자란다고 생각 안 하나?”
“…….”
지한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길가에 쓰러진 자신을 구했고 거처를 해결해 주었고 이제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가현은 비아냥거리는 날카로운 말에 상처가 나면서도 통증은 생각할 틈이 없었다.
가시지 않은 공포와 가시지 않은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강당에서 자신을 도우려 한 남자는 분명 선의였다. 사심 없이 아픈 자신을 도우려는 행동이었지만 가현의 상태는 더 나빠지기만 했다. 하지만 늘 칼날 같은 말로 찔러대는 차지한 이 남자가 자신의 상태를 잠재울 수 있다니 당황스러웠다.
처음 지한이 도와준 후 가현은 생각했었다. 그 순간 다른 사람이 있다고 해도 괜찮을 거라고.
하지만 차지한이 아닌 사람은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자 혼란스러웠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온 지한은 곧장 차로 향했다.
가현을 태운 차량이 망설임도 없이 유형빌딩을 벗어나 내달렸다. 가현은 생각에 빠져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고 얌전히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슬픈 일이다. 기억이 사라질 거면 공포감까지 다 사라지지 떠오르지 않는 기억에 트라우마까지 너무했다.
기억 너머에 도사리고 있는 공포는 늘 언제 튀어 오를지 몰랐다. 가현은 자신의 인생을 생각하니 억울했다.
가현은 가슴이 답답해 당장 차에서 내리고 싶었다.
“차 세워주세요. 잠시만요.”
“…….”
지한은 별 반응이 없었다. 가현의 말을 무시하는 그에게 몸을 틀어 다급하게 부탁했다.
“제발, 부탁이에요.”
지한은 그녀 쪽으로 시선도 주지 않고 갓길로 핸들을 꺾어 급하게 차를 세웠다.
가현은 차가 멈추자 주저하지 않고 빠르게 문을 열고 차에서 벗어났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로 들어와 과호흡과는 다르게 숨을 턱 막히게 했다. 차디찬 난간을 잡고 다리 위 저편을 보고 숨을 크게 쉬었다.
답답한 마음만큼 인상을 써도 달라질 것이 없었다.
“이 불안한 머릿속을 비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혼자 자조하듯 중얼거렸다. 맑은 하늘에 어느 때보다 붉게 물든 노을이 내려앉아 서쪽 하늘을 이글이글 물들였다.
넋을 놓고 그걸 바라보았다.
“잊게 해줘?”
“네?”
뒤를 돌아보자 지한이 차에서 내려 가현을 보고 있었다.
차가운 공기와 대조되게 이글거리는 붉은 태양이 그의 얼굴까지 물들였다.
“네 머릿속 공포, 사라지게 해줄 수 있다고.”
그의 제안은 솔깃했다. 유일하게 자신의 과호흡을 잠재울 수 있는 남자.
그의 말은 희망 같았다.
순간 며칠 전 회사 직원들과 나누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최근 개봉했던 지하세계에 관한 영화가 초 히트라며 나왔던 이야기였다. 그 영화의 주인공 하데스.
그의 얼굴은 사람을 홀릴 정도로 잘생겼지만 무서운 표정을 한 가혹하고 냉정한 신이라 했다. 땅속에 매장된 보물들의 소유자로 부의 신 플루톤이라고도 불렸고 보통은 저승을 다스리는 왕이라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떠오른 건 차지한이었다.
노을빛을 받은 냉정하게 잘생긴 그의 얼굴에 하데스가 겹치는 환상을 본 것 같았다.
그의 제안이 궁금하고 유혹적이지만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어떻게 말인가요?”
그의 제안이 궁금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가현은 한 가지를 잊고 있었다. 하데스는 제우스와 대지의 신 데메테르의 딸 페르세포네를 납치하여 아내로 삼았다.
위험해도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가현에게 가장 간절한 것을 주겠다는 남자를 거부할 수 있을까.
“사라지게…… 해주세요.”
어떤 늪으로 끌어들일지 모르는 위험한 차지한은 그 순간 유혹적인 하데스였다.
길들여지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