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길들여지는 밤-16화 (1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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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이름 부르는 남자를 로비에서 분명 만났어요.”

“또 그 이야긴가? 믿어주면 뭐가 달라지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얼굴이 차갑게 쏘아봤다. 그의 말처럼 달라지는 건 없어도 환상을 본 건 아니라 말하고 싶었다. 기억을 잃었지만, 헛것을 보는 정신이상자는 아니라고 그를 설득하고 싶었다. 이 세상에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다시 기억을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대표님이 지어주신 이름이지만…… 정말 저를 아는 사람 같았어요. 제 얼굴을 재차 확인하고 아는 체를 했어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사라진 남자를 어떻게 찾을 거야. 지겹군.”

지한은 접촉해 있던 가현이 귀찮다는 듯 떼어내어 밀어냈다.

가현도 지금의 스킨십이 원했던 것은 아니지만 물건처럼 밀쳐지니 사람으로 존중받지 못하는 듯해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기억을 찾고 싶으면 노력을 해.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고.”

“…….”

누구는 기억을 찾고 싶지 않을까.

누구보다 간절히 원하는 건 자신이었다. 그를 원망 가득한 눈으로 보아도 소용없었다. 그가 잘못한 것은 없으니 원망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그는 가현을 추운 정원에 혼자 두고 저택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에게 안겨 사라졌던 한기가 드레스를 차려입어 드러난 살결에 닿아 추위를 몰고 왔다.

덜덜 떨리는 몸이 마음과 다르게 흔들렸다.

***

다음날 출근한 가현을 기다리는 건 인트라넷의 메일이었다.

그룹의 대대적인 신입사원을 뽑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운 좋게 가현도 신입사원 교육을 받게 되었다.

“가현 씨 2박 3일이야?”

“네.”

“요즘 회사가 바빠서 연수원에 가진 않나 보다. 나 신입사원 입사했을 때는 연수원 가서 재미있었거든.”

“전 회사에서 하는 게 좋아요.”

일상에서 벗어나는 변수는 불안만 더했다. 가현은 다행이란 생각을 했지만 조금 걱정되었다. 사람들이 많은 곳은 아직 겁이 났다.

10시부터 시작되는 신입사원 교육에 참석했다.

대강당 앞이 붐빌 정도로 많은 사람을 보고 당황했다. 신입사원을 얼마나 뽑았는지 이 회사 규모가 얼마인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최대한 사람들이 뜸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리를 찾아 앉았다.

사회자의 회사 소개가 끝나갈 때쯤 회사 대표인 차지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의 관심이 젊은 CEO인 그에게 쏠렸다. 앞에 앉은 임원진과 악수하는 그는 존재만으로 눈길이 갔다.

최근 그가 이끌던 유형 그룹 성공 신화가 방송을 타면서 모든 걸 다 가진 그에게 세간의 관심이 향했다. 그는 강단 앞자리에 앉았다.

옆에 앉은 여자 둘이 호들갑을 떨며 알고 지내던 지인처럼 속삭였다.

“혹시 대표님 좋아하세요?”

“설마 그쪽도요?”

“당연히 관심 많죠. 정말 멋있지 않아요? 회사도 좋지만 전 차지한 대표님 때문에 이 회사에 지원한 것도 있어요.”

“저랑 같네요. 저 얼굴이 어떻게 현실에 있을 수 있을까요. 보기만 해도 설레요.”

두 사람의 대화를 무시하려 해도 속닥거리는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사회자가 그를 소개하고 곧 그가 강단에 올라섰다. 그의 사소한 움직임조차 우아했다. 단상에 선 그가 시선을 고정하지 않고 대강당을 훑어보았다.

“유형 그룹을 이끌어갈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유형은 지금까지 혁신적인 노력으로 진보와 우리만의 경제 신화를 이루어내고 있습니다. 그 행보에 함께 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우리 회사는 여러분의 능력을 원합니다. 직급과 차별을 두지 않고 여러분의 능력을 보여 줄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고정관념을 뛰어넘어 자기 능력을 보여준다면 유형은 그 성과를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많은 활약을 기대합니다.”

가현은 필요 가치를 따지는 그다운 환영사라 생각했다.

무료하게 듣고 있던 환영사 중간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눈을 돌리지 않고 가현을 보았다. 우연이라 생각하고 눈길을 돌렸지만, 다시 그에게 시선을 주었을 때 알았다. 지한의 시선이 가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부담스러운 눈길에도 이어지는 그의 말에 더 시선을 피하지 못했다.

“유형은 유용한 인재를 발굴하고 그들과 함께 성장하려 합니다. 저는 효율성을 중시합니다. 여러분의 노력과 효율성을 보여준다면 유형과 함께 성장할 것을 약속합니다. 깨어 있는 젊은 기업에 여러분의 열정을 보여주십시오.”

그의 강단 있는 인사말에 신입사원들이 박수로 화답했다. 그가 가현과 눈을 마주한 채 옅게 웃었다. 그것만으로도 옆에 있던 직원들은 녹아내렸다. 가현은 그의 웃음이 자신을 향한 비웃음 같아 껄끄러웠다.

그가 단상을 내려가고 큰 회사답게 많은 절차가 이어졌다. 대강당을 나온 시간은 5시 반이었다.

‘다행이다.’

첫날은 무사히 넘어갔다고 생각하니 긴장이 풀려 파김치처럼 진이 빠졌다.

“내일도 잘 넘겨야 하는데.”

혼자 중얼거리며 오늘 받은 커리큘럼을 꼼꼼히 읽었다. 아무리 봐도 둘째 날이 걱정이었다.

이튿날은 생각보다 교육 일정 강도가 높았고 업무와 사회생활에 관련된 강연을 두루두루 수행해야 했다. 가현에게 제일 난관은 팀워크 작업과 레크레이션에 가까운 프로그램이었다.

팀워크 작업을 진행하는 중간중간 한 남자 직원이 가현에게 유난히 친절했다.

부담스러웠지만 조금 곤란하고 긴장되는 상황이 되면 그가 도와주어 잘 넘길 수 있었다.

고마운 마음에 쉬는 시간 음료수를 사서 건넸다.

“좀 전에는 감사했어요.”

“이런 거 안 주셔도 되는데 잘 마실게요.

“사람들이 많으면 긴장되는데 덕분에 팀 작업은 잘 마무리 했어요. 감사합니다.”

돌아서는 가현에게 다음을 말하는 남자는 호감이 있어 보였다.

“다음에는 제가 사 드릴게요.”

“…….”

웃으며 말하는 남자에게 대답 대신 목례를 하고 돌아섰다.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니 새로운 인연을 만드는 것이 두려웠다.

다시 신입사원 교육은 시작되었다.

가벼운 프레젠테이션 과제는 괜찮았다. 문제는 신입사원 동기들과의 친목과 친밀감을 위한 프로그램이 문제였다.

“이번에는 우리 유형 그룹의 유능한 인재분들의 순발력과 단결력이 얼마나 좋은지 한번 테스트해 보겠습니다. 릴레이 경기!”

사회자는 마이크를 그대로 든 채 속삭이듯 농담을 했다.

“아시죠? 어떤 것보다 우리 신입사원분들의 단결력과 순발력이 임원진 분들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걸요.”

그의 농담에 장내가 웅성거리며 웃었다.

그 속에서 단 한 사람, 같은 팀원 남자 직원이 혼자 진지했다.

“자자, 우리 팀이 이번에 1위를 해봅시다.”

처음부터 1등에 열을 올리던 직원 한 명이 다른 신입사원들을 재촉했다.

“다른 팀 안 보입니까? 우리가 이러다 제일 저조하겠습니다.”

팀을 이끄는 역할을 자처하는 그 직원은 약간 짜증을 섞어 말했다.

“그래요, 우리도 이번에 잘해 봅시다.”

다른 직원도 그에게 동조하며 팀원들을 독려했다. 팀원 모두의 손을 억지로 끌어 하이 파이브를 하며 의지를 다졌다.

원치 않는 스킨십은 모든 신경이 곤두선 심장을 더 세차게 뛰게 했다. 작은 움직임에도 숨을 몰아쉬는 가현을 옆에 있던 또래 직원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몸 안 좋아요?”

“아, 괜찮아요.”

가현이 참아 내며 그에게 웃어 보였다. 들키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참으면 오늘 하루의 일과가 끝난다는 마음만 가득했다.

시간을 최대한 줄이기 위한 역할 분담을 했다. 이미 사람들은 릴레이로 하는 과제를 연습하느라 바빴다.

남자 직원이 많아 여자 직원은 팀에 두 명뿐이었다.

상대 여자 직원보다 상대적으로 가벼운 가현이 장대 위 과자를 입으로 먹는 수행에는 적합했다.

키가 크고 몸집이 큰 1등에 열을 올리던 남자 직원과 한 팀이 되었다. 남자의 어깨에 올라타 장대 위 과자를 먹기만 하면 된다고 마음을 다졌다.

‘한 번만 참으면 돼.’

그러나 자꾸 실패하는 팀원들 때문에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여러 차례 반복되어 심장은 널을 뛰었다.

상대 팀원은 1등에 집착하다 보니 호흡으로 힘든 가현을 기다려 주지 못했다. 가현은 더 상태가 나빠졌다.

남자는 자신의 마음만큼 따라주지 않는 가현을 강제로 끌었다. 가슴을 옥죄이는 숨이 더는 참지 못하고 눈앞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결국, 강당 바닥에 쓰러진 가현이 식은땀을 흘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팀원들과 신입사원 교육을 주최하던 인원들이 달려왔다.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덮치는 그림자가 더 숨을 옥죄었다.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것도 여의찮았다.

거칠어지는 숨소리에 친절했던 남자 직원이 옆으로 다가왔다. 그는 손가락을 맥박이 뛰는 목에 가져다 댔다.

가현은 호흡을 체크하는 남자의 손길에 소름이 돋았다. 과호흡은 그의 손길에 더 거칠어졌다. 가현은 그만두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목소리는 숨 쉬는데 가로막혀 틈도 주지 않았다.

“119에 연락해 주세요. 호흡이나 맥박이 좋지 않아요.”

가현의 목을 젖힌 남자의 얼굴이 점점 가현의 시선에 다가왔다. 가현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길들여지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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