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길들여지는 밤-12화 (12/67)

12

“가만 보면 가현 씨가 대표님과도 그렇고 명 비서님과도 그렇고 뭔가 아는 사이 같은데 혹시 낙하산 이런 거야? 우리 막 잘 보여야 하고 그런 집 딸.”

“에이, 아니에요. 저 가진 것도 없는걸요. 저도 그런 집 딸 하고 싶어요.”

웃으며 말하는 가현을 보며 서 비서가 한숨을 쉬었다.

“나도 그런 집 딸 하고 싶다. 혹시라도 우리가 모셔야 하는 그런 위치면 미리 말해. 난 미운털 박히고 싶지 않아.”

늘 사회생활은 처세라고 서 비서는 말했다. 초지일관 그녀의 사회생활 철학이 떠올라 피식 웃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김 과장이 일을 독촉했다.

“일 많지 않아? 잡담은 그 정도로 해. 서 대리는 대표님 연말 참석해야 하는 파티 정리했어?”

“아 맞다. 얼른 마무리할게요.”

가현은 대표실 문을 바라보았다. 생각해보면 두 사람은 금수저에 인물까지 출중해 함께 있으면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커플로 보였다. 잘 어울리는 커플이란 건 인정하지만 마음 한쪽에서 불편함이 불쑥 튀어 올랐다.

가현은 곧 이상해지는 기분을 털어내고 일에 몰두했다.

대표실에 들어선 라윤은 들고 있던 크런치 백을 소파에 내려놓고는 사무실 책상 앞에 걸어가 팔짱을 끼고 섰다.

“나 왔어.”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인사만 할 뿐 사무실은 금세 조용해졌다.

늘 들어오면 지한에게 하고 싶은 말부터 쏟아내던 그녀였다. 지한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 라윤의 질문에 대답하는 데 익숙했다. 그런 라윤이 침묵으로 일관해 지한이 고개를 들었다.

팔짱을 끼고 내려다보는 그녀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왜 말이 없어? 표정은 왜 그렇고.”

“다음부터는 이래야겠다. 그래야 관심을 주네.”

라윤의 말에 지한이 다시 시선을 서류로 가져갔다.

“일하러 온 거 아니야? 할 말 해.”

“일보다 먼저 궁금한 게 있어.”

라윤은 차분하게 물었다. 그녀 성격상 이렇게 묻는다면 대답을 꼭 들으려 할 것이다. 무슨 질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벌써 피곤해지는 기분이었다.

“비서실에 저 여자. 새로 왔다는 인턴. 그때 병원에서 삼자대면했던 그 여자잖아. 여기 왜 있어?”

“그게 왜 궁금해?”

“당연하지 않겠어? 세상에 여자라면 쳐다도 보지 않던 오빠가 한 여자를 상대하고 자신의 사무실에 들였어. 초등학생 때부터 오빠를 봐 왔던 내가 궁금한 건 당연한 거야.”

지한이 양손을 깍지 낀 채 책상 위에 올렸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을 피하지도 않고 라윤이 그를 응시했다.

“백라윤, 궁금한 건 네 자유지만 내가 알려줄 이유도 없어.”

“오빠.”

“네가 날 세울 만큼 중요한 상대가 아니야. 나에겐 필요가치가 있을 뿐이고 감시의 대상 정도야.”

“그게 무슨 말이야 알아듣게 말해 줘.”

“라윤아. 방금까지가 선이야.”

“…….”

지한의 얼굴이 깍지 낀 너머에서 굳어 있었다. 더는 궁금해도 참아야 한다는 경고였다. 라윤이 그 선을 넘어갔다간 그가 어떤 행동을 할지 그녀도 알았다.

“알고 있을 거야. 적정선을 넘으면 내가 잔인해져. 너한테 그렇게 만들지 마.”

라윤이 뽀로통한 얼굴로 물러나지 않고 지한을 뚫어지게 보다가 표정을 풀었다.

“알았어. 냉정하기는.”

지한은 서류에 마지막 사인을 하고 일어섰다.

그러곤 군말 없이 딱딱한 직사각형 테이블에 앉아 미팅을 종용했다.

“일하러 왔으면 일해야지.”

“마지막 질문. 그럼 아무 사이 아니란 거지? 그 정도는 말해 줄 수 있잖아.”

테이블 양 끝에 앉은 두 사람의 시선이 날카롭게 교차했다.

한숨을 쉰 지한이 단답형으로 딱 잘라 대답했다.

“아니야.”

그러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표정으로 회의자료를 펼쳤다.

지한의 성격을 아는 라윤은 단호한 대답을 듣고 표정을 풀었다. 그를 따라 회의 의자에 앉으며 평소의 똑 부러지는 라윤으로 돌아왔다.

전형적인 비즈니스 미팅이 시작되고 직원이 가져다준 커피를 마시며 두 번째 골치 아픈 컨벤션센터 이야기를 시작할 때였다.

지한의 인물은 여자를 불러들였고, 라윤은 늘 주위를 맴도는 여자들에게 날을 세웠다.

자존심이 강한 그녀는 지한이 모르게 그녀들을 쳐냈지만, 늘 불안했다.

미팅하는 지금도 라윤은 그와의 관계를 고민했다.

여자에게 도통 관심이 없어 다행이었지만 자신에게조차 관심이 없는 그는 불만이었다.

일 이야기를 한창 이어가던 지한에게 라윤이 엉뚱한 동문서답을 했다.

“오빠, 이번 연말 삼성동 파티에 나랑 파트너로 갔으면 좋겠어.”

컨벤션 돔 공사로 시간도 늦춰지고 골치 아프게 돈이 많이 들어가고 있었다. 심각하게 논의하던 일 사이에 라윤의 엉뚱한 대답이었다. 지한이 그녀를 쏘아보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백라윤 집중 안 해?”

“하고 있어. 하지만 이것도 중요해.”

단단히 결심한 라윤이 물러나지 않았다.

“나 일 이야기하는데 딴소리 하는 거 싫어하는 건 누구보다 잘 알 텐데.”

“알아. 하지만 연말 파티 중 가장 중요한 자리야. 파티 파트너 오빠 없잖아.”

확신하는 목소리에 지체하지 않고 대답했지만 라윤이 모를 리 없었다.

“있어.”

“거짓말.”

“있으니까 일에 집중해.”

“작년 기억 안 나? 오빠 파트너 없이 와서 다들 말도 많고 탈도 많았어.”

“그래서.”

“내가 오빠한테 어떤 마음인지 알잖아.”

라윤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나치게 명확한 고백이었다.

“사무실에서 고백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못할 건 뭐야? OK만 한다면 백번이라도 할게,”

“라윤아. 지금같이 하는 너, 매력 없어. 그만해.”

잔인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남자. 저 견고한 유리 벽을 깨고 그를 가지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매력이 없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고 있으니 화가 나야 하는데 라윤은 오히려 그를 더 가지고 싶었다.

“오빠. 진짜 말 못되게 하는 거 알지.”

“그런가.”

“알면서 하는 거 다 알아.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바빠도 이 일 마무리 하고 싶으면 미팅 한 번 더해. 말 못되게 한 벌이야.”

“백라윤.”

지한이 나직하게 부르는 이름에 라윤이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나도 바빠. 그러니 오늘은 더 말 보태지 마.”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 미련 없이 크런치 백을 들고 인사를 건넸다.

“미팅 일정 다시 잡을게. 연말 파티 파트너는 다시 생각해봐.”

“…….”

“나 갈게.”

지한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라윤을 쏘아보았다. 라윤은 그의 표정은 살피지도 않고 곧바로 나왔다.

사무실을 나온 라윤의 눈에 띈 건 가현이었다.

눈도 돌리지 않고 또각또각 가현에게 다가갔다.

“명함 있어요?”

“네, 그건 왜…….”

비서실 모두의 시선이 두 사람을 향했다.

가현은 집중되는 시선이 부담되지만 피할 수도 없어 주춤 일어나 서랍 속에 있던 명함을 꺼냈다. 내미는 명함을 건네받은 라윤이 명함을 긴 손가락 사이에 끼워 들고 가현의 이름을 읊조렸다.

“정가현. 이름 예쁘네요.”

“감사합니다.”

“이제야 그쪽 이름을 알았네. 그 정도 존재감은 나에게 없길 바랐는데.”

고저 없는 목소리에 표정도 없이 내뱉는 알 수 없는 혼잣말이 심상치 않았다.

“제 명함은 왜 달라고 하셨죠?”

“이게 필요할 날이 있을 것 같은 느낌?”

라윤이 인상을 살짝 쓰다가 뒤돌아서 비서실 직원들에게 물었다.

“차지한 대표님, 새로 온 비서실 신입사원에게도 쌀쌀맞나요?”

김 과장이 눈치껏 에둘러 말했다.

“여전하십니다. 특별 대우야 차 대표님께는 없죠.”

“다행이네요.”

만족스러운 대답에 라윤이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었다.

“다들 안녕히 계세요. 정가현 씨 명함 고마워요.”

“…….”

가현은 대답 없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연락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만약을 위해.”

“본부장님, 다음에 뵙겠습니다.”

“다음에 또 보죠.”

그녀가 방을 나가고 김 과장이 가현을 회의실로 불렀다.

“가현 씨, 혹시 백라윤 본부장님과 어떻게 알죠?”

“우연히 마주쳤을 뿐이에요. 알고 말 것도 없고요.”

“대표님이든 백 본부장님이든 보통 분들이 아니에요. 그분들에게 눈 밖에 날 일은 만들지 말아요. 여기 비서실 일이 호락호락하지 않은 건 알죠?”

“네.”

“가현 씨 오래 보지 않았지만, 나도 대표님 밑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봤어요. 가현 씨가 좋은 사람인 건 알겠어요. 오래 함께 일하고 싶고요.”

“감사해요. 과장님. 저도 이곳에서 오래 일하고 싶어요. 조심해서 행동하겠습니다.”

“그래요. 힘내요.”

늘 정도를 지키던 김 과장은 속이 깊은 사람이었다. 구구절절 말하지 않아도 아랫사람을 챙겼다. 인턴이라도 비서실 식구로 챙겨주는 그녀가 고마웠다.

***

서재로 들어오는 지한을 따라 명 비서가 뒤따라 걸으며 다급하게 말했다.

“파트너 따윈 필요 없어.”

“대표님, 파트너 동석인데 예의상 파티에서 정한 규칙은 지켜야 하지 않습니까?”

“다들 일은 제대로 하지 않고 놀 궁리만 하지?”

“파티도 사업의 일환입니다. 누구보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지한은 듣기 싫어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를 나와 걸어가고 있었다. 그의 미간이 찌푸려져 펴지지 않았다. 애가 닳은 명 비서가 뒤따라 나오며 그를 설득하고 있었다.

“쓸데없는 시간 낭비야. 그리고 지금 파트너를 구할 수도 없어.”

“백라윤 본부장님이 오늘 아침에도 연락이 오셨습니다.”

그가 삐딱한 표정으로 멈춰 서 명 비서를 보았다.

길들여지는 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