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걱정하지 마세요. 거저 신세 질 생각 없어요.”
인사를 꾸벅하고 대표실을 나왔다. 일하던 비서실 직원들이 표정이 좋지 않은 가현에게 다가왔다.
서 대리가 먼저 물었다.
“혹시 대표님이 안 좋은 말 했어요?”
“아니에요.”
“아니긴 얼굴이 안 좋은데? 잊어버려요. 우리 대표님이 얼굴은 잘생겼는데 말은 참 못되게 하거든요. 그래도 뒤끝은 없어요.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요.”
“서 대리.”
김 과장이 말이 길어진 서 대리를 말렸다. 서대리도 아차 싶었는지 하던 말을 끊었다.
“네, 그만할게요.”
“대표님이 살가운 분은 아니에요. 공사 구분 확실하시고 일에서는 철두철미한 분이니까 일만 열심히 하면 별문제 없을 거예요.”
“네, 열심히 할게요.”
“인사가 늦었죠. 난 김수진 과장, 이쪽은 서이경 대리, 이쪽은 박기완 대리, 나머지 비서실 직원들은 외근 중이라 들어오면 인사해요.”
“잘 부탁드립니다.”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가현을 세 사람이 환영했다.
“환영합니다. 가현 씨, 제가 가현 씨 들어오기 전까지 막내였어요. 혹시 모르는 거 있거나 힘든 일 있으면 말해요.”
“또 또 어린 친구만 보면 이러지. 박 대리.”
“제가 언제요?”
“나한테는 안 이러잖아.”
서글서글한 웃음으로 가현을 반기는 박 대리에게 서 대리가 따지고 들었다.
“서 대리는 전우죠.”
박 대리가 동기인 서 대리에게 농담을 던졌다. 두 사람의 장난에 김 과장이 되려 창피해하며 말했다.
“못 말려. 둘 다 일해요. 가현 씨는 명 비서님이 따로 지시한다고 했어요. 그 전에 부서 안내와 알려주는 건…….”
“제가 하겠습니다.”
김 과장이 지시도 하기 전에 박 대리가 먼저 나섰다.
‘저 봐 저 봐.’하며 서 대리가 눈을 흘기며 핀잔을 줬지만, 박 대리는 웃기만 했다.
“그래요. 박 대리가 수고해요.”
“네!”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기다렸지만, 명 비서는 나올 기미가 없었다.
박 대리가 회사 안내를 해주겠다고 해 비서실을 벗어났다.
“여기 일이 많아요. 막내라서 할 일도 있고요.”
“다 그렇죠.”
“혹시 힘든 일 있으면 말해요. 적극적으로 도울게요.”
착하게 생긴 얼굴에 서글서글한 웃음이 참 잘 어울렸다. 그의 호의가 고마워 환하게 웃었다.
둘이 웃으며 복도를 지나다 한 무리의 남자 직원들과 마주쳤다.
“박 대리, 어디가? 어, 이분은 누구시고.”
“비서실에 인턴으로 출근하게 된 정가현 씨예요.”
“인턴?”
“잘 부탁드립니다. 정가현 입니다.”
인턴인 어린 가현을 본 남자 직원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야, 역시 새로운 뉴페이스가 오니까 회사가 달라 보이네.”
“그러다 성희롱으로 신고당해. 우리 회사 심한 거 알지?”
“내가 언제 그저 정가현 씨를 환영한다는 말이지!”
복도가 왁자지껄했다.
그리고 그 순간 훈훈한 분위기에 찬바람이 쌩하니 부는 느낌이 들었다.
가현을 마주 보고 있던 남자 직원들이 90도로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일제히 하는 인사에 박 대리와 가현이 돌아보고 고개를 숙였다.
“일 안 합니까?”
“일해야죠. 이제 갑니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못마땅한 목소리에 남자 직원들이 먹고 있던 커피를 옆 쓰레기통에 버리고 서둘러 인사를 하고 눈앞에서 사라졌다.
“박 대리.”
“네, 대표님.”
“오늘 재무제표 가져오기로 하지 않았나? 이제 한 시간 남았는데.”
“네, 지금 가서 보고자료 올리겠습니다.”
박 대리가 먼저 자리를 떠나자 가현만 남게 되었다.
지한이 한소리 할 것을 기다렸지만, 그는 쏘아볼 뿐 말이 없었다. 가현은 어색하게 인사를 꾸벅했다.
“비서실에 가 있겠습니다.”
지한이 가현에게 다가왔다.
“정가현.”
“네.”
“여기서 오래 일하고 싶으면 눈치껏 행동해. 신경 거스르지 말고.”
그는 뒤돌아서 복도를 걸어 지나갔다.
가만히 숨만 쉬어도 거스른다고 말하는 차지한. 삐딱한 저 사람에게는 어떻게 해도 호감을 줄 수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
사무실로 들어오는 한 무리의 남자 중 마지막에 들어오는 남자의 인상이 유난히 거슬렸다. 개기름이 줄줄 흐른다는 게 딱 이 사람을 보고 한 말 같았다.
겉이 번지르르한 고지국 의원은 포마드 머리를 흐트러짐 없이 반질반질하게 넘기고 가슴에는 번쩍이는 금빛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있었다.
“김 비서 오늘 데이트 있나? 점점 예뻐지네. 서 비서는 더 섹시해졌어.”
능글거리는 웃음으로 비서실 여직원들에게 성희롱 발언을 던지는 꼴은 굴지의 기업인 비서실이 아니라 시골 다방 마담을 상대하는 것처럼 저급했다.
“대표님께서는 외부 일정으로 십여 분 후에 도착하십니다. 고 의원님 들어가시죠.”
“그래. 어? 저 친구는 누구지? 신입사원인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자 가현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인턴입니다.”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답게 걸어가면서도 가현을 보고 관심을 보였다. 보다 못한 명 비서가 고 의원을 비서실 옆 회의실로 재촉했다.
고 의원이 자리를 뜨자 비서들이 양팔을 쓸며 인상을 썼다.
“저 의원님은 여자만 보면 싸구려 농담이야. 능글거리며 쳐다보면 소름이 돋아요.”
“정말 엮일까 겁난다. 가현 씨도 조심해요.”
“네.”
비서실 선배들이 하는 말에 그저 웃으며 대답했다. 가현은 눈에 띄지도 않는 자신이 엮일 일이 뭐가 있나 싶었다.
고 의원에게 차를 가져다준 비서실 서 비서가 진저리를 치며 짜증을 내었다.
“내가 대표님을 잘 만났지. 대학 동기들 이야기 들어봐도 우리 대표님처럼 공사 구분 확실한 분은 흔치 않더라고요.”
“맞아. 좀 느슨하면 좋겠다 싶다가도 공사 구분 확실해서 좋다니까.”
잠시 생각을 하던 김 과장이 웃으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는데 우리 대표님 비주얼이면 공사 구본 못 해줬으면 싶지 않아?”
“아하하 그건 맞아요. 우리 대표님 얼굴에 능력에, 그 정도면 구분하는 게 섭섭하죠.”
객관적인 시선으로 차지한은 인물 출중한 젊은 CEO에 능력 또한 둘째가라면 서러울 남자니, 그녀들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냉기 흐르는 행동과 말을 생각하니 고개가 저어졌다.
지한은 오늘따라 외부 일정이 길어져 사무실에 도착이 늦어졌다.
그만큼 고지국이 사무실에 머무르는 시간도 길어져 신문에 차가운 수건에 요구하는 것도 많아 비서실은 귀찮아하고 있었다.
비서실 인원들도 지한의 강도 높은 업무 때문에 일과가 만만치 않게 바빴다.
서 비서는 총무팀 회의에 참석했고 김 과장은 임원 회의 진행을 위해 미팅이 있다 했다. 사무실에 덩그러니 가현만 남아 명 비서가 오전에 주었던 일을 하는 중이었다.
“직원들도 없는데 인턴이 너무 열심히 일하는 거 아니야?”
언제 나왔는지 고지국이 가현의 낮은 파티션에 팔을 올리고 능글거리며 말을 했다.
가현도 그의 말에 주위를 둘러보고는 대답했다.
“아… 비서실 일이 많아서요.”
“커피 더 주겠어요? 불러도 사람이 와야지.”
“죄송합니다. 금방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빠르게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커피를 내려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고마워요. 여기서 일한 지 얼마나 됐지?”
“이주 되었습니다.”
“아직 많이 배워야겠군요. 앞으로 자주 봅시다.”
“…….”
느낌이 좋지 않은 사람이었다. 비서실 사람들이 왜 싫어하는지 짐작이 되어 얼른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회의실을 나와 숨을 내뱉었다. 비서실의 일과가 유난히 많은 날이었다.
특별인턴인 가현에게까지 업무가 밀려들었지만 싫지 않았다.
오히려 쓸모있는 사람 같아 기분이 좋았다. 마무리되지 않은 업무를 끝내려 처음으로 야근을 택했다.
“가현 씨 안가?”
서 비서는 오늘 데이트가 있다며 화장에 공을 들였다. 거울로 화장을 꼼꼼히 확인하며 힐긋 가현을 보았다.
“오늘 야근하려고요.”
“여기 일 많은 거 알잖아. 그렇게 하루에 다하려고 하면 매일 야근이야 적당히 하고 들어가.”
“네, 한두 시간만 하고 가려고요.”
“난 먼저 갈게.”
“네, 데이트 잘하세요.”
외근한 인원은 바로 퇴근을 했을 테고 사무실에 남은 사람은 가현 하나였다. 숫자들에 파묻혀 사무실 문이 열리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을 때였다.
“요즘 인턴들은 너무 열심히 하네.”
가현의 책상 앞에 선 고지국 의원이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놀란 가현이 벌떡 일어나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늦은 시간에 어쩐 일로….”
“사무실 직원들은 다 퇴근했어요?”
“…네.”
“차 대표님과 긴히 할 말이 있어서 조금 있다가 오시겠지.”
“아… 네.”
“우리 차 대표님이 사람을 잘 뽑았어. 커피를 너무 먹어서 그런데 차라도 가져다주겠어요?”
“네 그러겠습니다.”
가현을 칭찬하던 고지국이 앓는 소릴 하며 자신의 사무실처럼 지시하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너무 자연스러운 그의 태도에 탕비실로 들어가 다기에 녹차를 넣고 우려내어 회의실로 가져갔다.
차를 내려놓는 가현에게 회의 의자에 한껏 기댄 고지국이 웃으며 물었다.
“뭐라고 불러야 하나 우리 인턴은?”
“정가현입니다.”
“이름도 얼굴만큼 예쁘네. 우리 가현 씨는 몇 살이지?”
두 번째로 나이를 질문받았다. 이곳에 출근하면서 직원등록을 위해 임의로 결정한 나이를 대답했다.
“…23살입니다.”
“아이고 제일 좋을 때인데 여자로도 물이 오를 나이고 말이야.”
느물거리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길들여지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