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억울하기도 해서 툭툭 말했다.
“그냥 계산됐어요.”
“…….”
지한이 옆에 있던 직원에게 지시했다.
“테스트해 봐.”
“30억 7억 2천 6백… 더하기 56억 4억 ….”
이런 숫자들이 더하기 곱하기에서 점점 수식까지 더해 끝도 없이 나열되었다.
자신도 신기했다. 머릿속에 계산기가 있는 것처럼 손쉽게 계산이 되었다.
“30만 2천 6백 7십 오.”
남자의 테스트 숫자들이 나열되자 곧바로 가현의 입에서는 답이 나왔다. 직원이 살짝 당황하며 지한에게 고개를 끄떡였다.
가현은 기억을 잃고 전문 서적이며 여러 가지 자료를 찾아 닥치는 대로 자신이 무슨 병인지 조사했었다. 기억을 잃으면 생각지 않은 부분이 활성화되어 예전에 없던 능력이 발휘되기도 한다고 했다. 어쩌면 숫자에 월등한 능력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판단했다.
“기억이 떠올랐나?”
그의 서늘한 눈에는 의심이 가득했다.
소매를 걷어 올린 지한이 에스프레소 커피잔을 들고 물었다.
“아니요.”
“그런데 이런 계산은 된다?”
의심이 가득한 물음에 가현이 빠르게 대답했다.
“그냥 머릿속에 숫자들이 계산돼요.”
자신이 말하고도 좀 멍청한 대답이라 생각이 들어 손에 들고 있던 은쟁반을 움켜쥐었다. 해리성 기억상실증을 이겨내려 책에서 봤던 설명을 덧붙였다. 자신이 생각해도 그것밖에 설명이 되지 않았다.
“기억을 잃으면 생각지 않은 능력이 월등히 향상되기도 한다고 들었어요.”
“…….”
지한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지긋이 가현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어떤 거짓말도 들통날 것 같은 저승사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가봐.”
잔뜩 긴장하고 있던 가현은 그가 의심스러운 눈빛을 빨리 거두어 의아했다.
가현은 서재를 나와 주방으로 뛰어갔다. 장원댁이 교진과 이야기 중이었다. 두 사람을 보고 가현이 환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제가 잘하는 걸 찾았어요! 정 실장님 오셨어요.”
“다과 가져다주고 쟁반 들고 도망이라도 갔나 했네. 무슨 말이야?”
장원댁이 툭 농담을 던졌다.
“뭘 찾았다는 거죠? 잘하는 게 뭐죠?”
교진은 가현이 신난 이유를 물었다.
“제가 숫자 계산이 빠르더라고요.”
“잘됐네. 여기 있으면서 늘 시무룩해서 걱정했더니 오늘이 제일 표정이 밝아.”
장원댁의 말에 얼굴을 문지르며 겸연쩍어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자신이 잘하는 것을 찾은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날이었다.
“저도 잘하는 걸 찾아서 기뻐요.”
누군가 주방으로 들어오는 인기척이 들렸다. 명 비서가 가현을 불렀다.
“가현 씨, 대표님께서 오시랍니다.”
“네? 네.”
차지한이란 존재만으로 긴장되었다.
서재 옆에 딸린 그의 휴식 공간으로 사용 중인 문을 노크했다.
“들어와.”
낮은 목소리에 가현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가현이 들어갔을 때, 처음으로 지한이 느른하게 쉬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리클라이너 소파에 기대어 온 더 락 잔을 들고 있었다.
가현이 들어오자 시선도 주지 않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기억이 없어도 특정 뇌는 활성화 될 수 있다? 서 탁터가 그러더군. 흥미롭기는 하지만 마음에 들진 않아.”
그는 자신이 서재를 나온 잠깐 사이 서 닥터에게 확인을 했을 터라 짐작했다.
“알고 있어요. 절 못마땅해하신다는 걸요.”
그에게는 여전히 냉랭한 한기가 느껴졌다. 가현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저승사자 같은 그에게 감춘다고 해서 통하지도 않았다.
“이 집에서 청소하는 것보다 더 빨리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주면 할 의향이 있나?”
“네? 어떤 일이죠?”
“숫자에 특화된 능력을 이용하겠다는 거야.”
“저를요?”
“난 사업가야. 너를 거저 먹여 줄 마음은 없어. 그러니 밥값 해.”
가현은 놀랐지만 그래도 좋았다. 자신이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했고 자신이 누군가에게 쓸모있는 존재가 된 것 같았다. 가현은 새로운 대륙을 발견한 것처럼 희망이 샘솟았다. 지한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고 생각하던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며 그에게 의지를 다져 대답했다.
“네. 저도 누군가에게 빚지고 살기 싫어요. 시키시는 일은 할게요.”
“…나가봐.”
가현이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가려 하자 지한이 한마디 덧붙였다.
“이 집으로 기어들어 온 쥐새끼인지 아니면 정말 사고였는지 아직 널 백 프로 믿지 않아. 그러니 처신 똑바로 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독설을 내뱉는 그를 보고 긴장했다.
***
다음날 출근하던 지한이 교진에게 지시했다.
“정가현 씨, 회사 비서실로 출근시키세요.”
갑작스러운 지시에 교진이 놀랐다. 그는 커프스가 불편한지 고쳐 채웠다. 교진은 가현의 상태를 생각해 지한을 설득하려 했다.
“…아직 후유증으로 쓰러질 때가 있습니다. 무리 같은데요.”
“걱정하지 말고 통보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딱 잘라 말하는 그를 거역할 수 없었다. 교진은 지한을 배웅하며 얼굴색이 어두워졌다.
교진의 걱정은 모르고 가현은 뛸 듯이 기뻐했다.
간간이 일을 시킬 것으로 생각했지, 회사에 출근해 일을 시킬 줄 몰랐던 가현은 꿈만 같았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교진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괜찮겠어요? 난 무리라고 봐요.”
“괜찮아요. 정 실장님. 저 정말 기뻐요. 언제까지 쓰러지는 게 무서워서 이렇게 살 수는 없잖아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눈을 접으며 웃는 가현은 정말 잘 해내리라 다짐하며 웃었다.
다음날, 주방으로 나온 가현은 차려입은 정장이 어색해 자꾸 손으로 쓸었다.
베이지색 치마 정장을 입은 가현은 회사에 갓 입사한 신입사원처럼 잘 어울렸다.
그녀를 보는 장원댁이 함박웃음을 지었고 교진은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저… 어때요?”
“어머나, 정말 직장 다니는 사람 같네. 인물이 훤해.”
“가현 씨, 잘 할 수 있겠어요? 차 대표님께서 지시하셔서 어쩔 수 없지만, 아직 후유증 증상도 있는데 말이죠.”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에 가현은 눈을 접으며 웃었다.
“여기에 와서 편하게만 지냈잖아요. 제가 잘하는 일을 하게 돼서 기뻐요. 평범한 사람들처럼 회사에 다니게 됐다니 꿈만 같아요. 후유증은 최대한 티 안 나게 노력해 볼게요.”
의욕이 가득한 가현을 보고 반쯤 안심한 교진은 새 핸드폰과 봉투를 내밀었다.
“이건 가현 씨 앞으로 개통한 전화예요. 일하면 핸드폰이 필요할 거예요. 그리고 이건 체크카드와 한 달 쓸 용돈입니다.”
교진은 차마 받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가현의 손에 이것들을 쥐여주었다.
“이거 받아도 돼요? 폐만 끼치는 것 같아요.”
“지난달 가현 씨가 일한 월급 여기다 넣었어요. 공돈 아니에요.”
교진이 늘 빚진 것처럼 미안해하는 가현을 설득했다.
“일하다가 안 좋으면 명 비서에게 말하거나 나에게 전화해요.”
“네, 그럴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들떠있는 가현은 평소보다 활달해져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유형 그룹 빌딩을 올려다보는 모습이 꿈만 같았다. 회사 로비에 들어서자 지금 제 상황이 실감이 났다. 거대한 빌딩 전체가 유형 그룹 본사 건물이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최상층에 있는 비서실로 향했다.
중후한 인테리어에 압도당해 엘리베이터 앞에서부터 침을 삼켰다.
비서실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을 때 예쁘장한 여자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비서실에 볼일 있으세요?”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비서실로 출근하라고 통보받은….”
가현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치마 정장을 완벽하게 차려입은 단발머리 커리어우먼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어머나! 정말 비서실 인원을 충원했네요. 얼른 들어가요.”
“아, 저….”
그녀가 가현을 끌어 비서실 안으로 들어갔다. 도도하게 생긴 인상에 차려입은 옷차림 때문에 함부로 말도 걸기 힘들었던 모습과는 반대였다. 그녀의 친화력은 최강이었다.
“과장님! 글쎄, 우리가 그렇게 노래 부르던 직원 오늘 출근했어요. 이름이 뭐예요?”
그녀가 옆에서 얼굴을 내밀며 물어왔다. 예쁘게 생긴 얼굴에 친근함까지.
긴장하던 가현은 그녀 덕에 마음이 놓였다.
“정가현입니다.”
“이름도 예쁘네요. 이 피부 봐. 나이는요?”
“서 대리, 첫 출근 한 사람에게 그만해. 이쪽으로 오세요.”
명 비서 다음으로 비서실을 이끌어온 김 과장이 가현을 차분하게 불렀다.
“미안해요. 서 대리가 너무 반가워서 그런 거니까.”
“아닙니다. 반겨주셔서 감사해요.”
가현이 미소를 지으며 김 과장에게 인사했다.
“비서실 인원이 부족해서 충원해 달라고 했지만 쉽지 않았어요. 대표님이 사람 뽑는데 까다롭고, 워낙 극비사항을 요하는 일도 많아요. 일이 많기도 해서 사람을 구하지 못했죠. 명 비서님께 어제 통보는 받았어요. 인턴은 생각지 않았지만, 성실히 일하면 정직원이 될 겁니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인턴이라도 금방 나갈 생각하지 말고 일해봐요.”
그녀의 말을 듣고 가현의 노예계약이라 말해 주고 싶었다.
김 과장은 인턴을 뽑아준 것에 불만인 것 같았지만, 나갈 수도 없는 노예계약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들에게 상세히 설명할 수 없지만, 일이 생겨 행복한 건 알려주고 싶었다.
“전 오래 일하고 싶어요.”
“환영해요. 가현 씨. 정말 나이 몇 살이에요? 피부 너무 좋아!”
옆에 선 김 과장이 못 말리겠다는 듯 웃었다. 나이를 생각지 못한 가현이 우물거리고 있을 때 명 비서와 지한이 들어왔다.
모두가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지한이 사무실을 스쳐 지나갈 때 그녀를 호출했다.
“정가현 씨 들어와.”
지한의 부름에 가현이 곧바로 뒤따라 들어갔다.
명 비서가 지한의 옷을 받아 스타일러스에 넣었다. 그는 컴퓨터 앞에 앉아 업무 준비를 하며 줄줄 말했다.
“나이 23, 학교는 장한 대학교 졸업, 가족관계 아버지에 외동딸. 이거 외에 뭐가 더 필요하지?”
“나머지는 제가 정리해 사원이력서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가현을 세워놓은 채 명 비서에게 물었고, 명 비서는 들고 있던 파일을 가현에게 건넸다.
“이건 정가현 씨 신상 이력서입니다. 참고해서 회사에서 물으면 이 신상으로 말해요.”
“…네.”
파일에는 그녀의 신분증과 사원증이 꽂혀 있었다.
신분증까지 만들 수 있다면 이 남자는 못 하는 게 무엇일까 싶었다. 할 수 있다면 사람 하나쯤 쉽게 죽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거기 계속 서 있을 건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여기 데려다 놓은 값을 해.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비서실이 아니니까.”
넋 놓고 파일을 보고 있으니 지한이 또 비수를 꽂았다.
길들여지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