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지하창고라 창문도 없었고 문을 열고 나갈 방법을 찾지 못해 당황했다.
초조해진 가현은 순간 와인 창고 뒤를 돌아보았다.
갇혀버렸다는 걸 인지하자 가슴이 꽉 막혀 버렸다.
심장이 달리기하듯 뛰기 시작했다. 머릿속은 기억도 없는 순간을 몸으로 먼저 느끼는 것 같았다.
머릿속을 채우는 축축한 기운, 쾌쾌한 곰팡내, 딱딱한 매트리스. 무엇 하나 알고 싶지 않은 불쾌한 감각이 떠올랐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문 열어주세요. 허헉,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란 말을 내뱉고 나자 공포는 배가 되었다.
기억 너머에서 들리는 듯한 탕탕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머릿속을 징징 울렸다.
마음이 다급해 문을 붙잡고 두드려 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제발. 허헉. 숨이 안 쉬 헉헉, 어져요.”
힘에 겨워 가슴을 두드려 보아도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견고한 감옥에 갇힌 것 같아 죽을 수도 있다는 느낌이 온몸의 피를 식혀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가현은 점점 숨이 가쁘고 몸이 무너져 내려 벽을 짚고 겨우 기대어 있었다.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가현의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커다랗고 차가운 손이 자신을 들어 올려 바로 서도록 지탱했다. 마주한 그를 올려다보려 했지만, 시야가 자꾸 흐려졌다.
“허헉, 사… 살려, 헉헉, 주… 세요.”
온몸이 죽은 사람처럼 얼어붙어 가는 듯 오한이 들어 턱이 덜덜 떨리고 숨은 더 가빠졌다.
정신이 아득해져 상대의 얼굴은 확인할 틈도 없었다. 그저 가쁘게 쉬는 숨에 머스크 향이 짙게 느껴졌다.
“왜 이래?”
그가 구원자라도 되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지한의 슈트 앞섶을 잡았다. 뚝뚝 눈물을 떨구며, 숨이 쉬어지지 않아 헉헉거리며 살려 달라는 듯 옷자락을 붙잡는 손이 필사적이었다. 이젠 목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 와중에도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 지한은 고요하기만 했다. 이윽고 낮은 목소리가 와인 창고를 울렸다.
“정신 차려.”
“헉… 허…. 수… 숨이…. 헉헉.”
지한이 가현의 목덜미 뒤를 붙잡고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의해 젖혀져 입술이 벌어졌다. 그 와중에도 그녀의 손은 지한의 옷자락을 놓지 않고 덜덜 떨릴 정도로 꼭 붙잡았다.
지한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입술을 겹쳤다.
깊은 키스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키스인지 인공호흡인지 모를 입맞춤이 빈틈없이 맞물렸다. 숨을 쉬지 못해 휘청이던 몸이 그대로 지한의 품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의 팔에 들려 겹친 입속을 헤집는 뜨거운 기운을 받아들였다. 그의 차가운 손과 식어가던 몸이 그와의 입맞춤으로 생명이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오한은 사라지고 불덩이 같은 뜨거움이 입안으로 전달됐다.
길어지는 키스에 들썩이던 가슴이 조금씩 과호흡 상태를 벗어나고 있었다. 급하게 오르내리던 가슴이 잦아들었다.
아직은 지금의 상태가 힘에 겨운지 지한의 품 안에서 의식을 점점 잃어갔다.
지한이 입술을 떼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성가시게.”
지한이 힘이 빠지는 그녀를 받치고 있던 한쪽 팔로 가현을 안아 들었다.
교진이 가현을 안고 지하실에서 올라오는 지한을 보고 놀라 뛰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서 닥터 불러. 호흡곤란으로 기절했어.”
교진은 대답할 정신도 없이 바로 뛰어갔다.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정신을 잃은 가현을 안고 주방 쪽을 지나 사용인들이 거주하는 숙소 복도를 걸어갔다.
그녀를 안고 가는 지한이 사용인을 향해 먼저 말을 걸었다. 평소 그는 극도로 말을 아꼈고 사용인들과 대화하는 일은 없었다.
“이 여자 방이 어딥니까?”
“아…. 네네, 이쪽으로….”
그의 질문에 사용인이 화들짝 놀랐다.
당황한 사용인이 앞서 걸어가며 안내했다. 복도를 지나 사용인이 열어 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와 협탁, 옷장, 화장대 외에는 눈에 띄는 작은 물건조차 없었다. 단출한 방은 사용하는 사람이 있나 싶을 정도로 휑했다.
지한은 방으로 들어서 가현을 던지다시피 침대에 내려놨다. 둘러메고 있던 짐짝을 내려놓는 것처럼 던져버려 의식이 없는 몸이 침대가 흔들리는 반동에 같이 흔들렸다. 뒤따라오던 사용인이 그걸 보고 놀라 헉 소리를 내었다.
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넣은 지한이 방을 나가면서 문 앞에 선 사용인을 내려다보고 명령했다.
“의사 올 때까지 제대로 숨 쉬는지 확인해요.”
“네, 알겠습니다.”
지한이 휭하니 나간 방안으로 주춤거리며 들어간 사용인은 가현을 바르게 눕혀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녀가 그제야 긴장이 풀려 혼자 중얼거렸다. 혹시나 지한이 들을까 작은 목소리였다.
“세상에 아픈 사람을 던지고 난리야.”
다른 사용인들이 집안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눈치를 보다가 가현의 방을 기웃거렸다.
“무슨 일이야? 이 아가씨는 왜 이래?”
“나도 모르겠어, 대표님이 안고 들어오더니 침대에 냅다 집어 던지는 거 있지.”
“뭐? 아픈 사람을 왜 집어 던져?”
“그러게. 정 실장님이 감싸고 돌길래 무슨 사인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닌가 봐.”
“무슨 일인지 몰라도 이 아가씨도 사연이 많나 봐. 쯧쯧.”
***
정신이 들었을 때는 천장 구석 벽지에 작은 얼룩이 희미하게 진 익숙한 방이었다. 자신을 걱정스럽게 내려다보는 교진을 보고 정신을 잃었다는 걸 알았다.
“괜찮아요? 가현 씨!”
“네, 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죠?”
“대표님이 이곳까지 안고 왔어요.”
가현의 마지막 기억은 와인 창고였다. 머리를 스치는 장면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입속을 가르고 들어왔던 두텁고 말캉한 혀가 자신의 혀를 내리누르고 숨을 불어넣었다.
숨을 가득 채우던 머스크 향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공포스러운 감각을 앗아갔다.
붉어진 얼굴을 감싸며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큰일 날 뻔했어. 와인 창고 문이 가끔 말썽인 걸 내가 깜박해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정 실장님 잘못 아니에요.”
“서민호 교수님께서 매달 먹는 약과 신경 안정제를 따로 주셨어요. 이건 가장 안 좋을 때 먹으라고 하셨던 약이에요. 좀 쉬어요.”
“네, 감사해요.”
약을 꺼내어 확인시킨 교진이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어깨를 토닥였다. 그가 방을 나가고 혼자 남은 가현은 한숨을 쉬었다. 자꾸 키스가 머릿속에 떠올라 평소보다 부푼 입술을 매만졌다.
“미쳤어! 정말.”
그렇게 지한과의 마주침을 피하며 며칠이 지난 때였다.
지한과 명 비서가 이른 오후부터 서재에 틀어박혀 일만 하던 날이었다.
일이 바쁜 교진은 외근을 나갔고, 사용인들조차 조만간 있을 연말 만찬으로 유난히 바쁜 날이었다.
장 여사님은 멋들어진 다과 음식을 만들어 아일랜드 식탁에 내놓았다.
하나같이 먹음직스럽게 플레이팅한 음식은 몇 번을 보아도 미슐랭 점수를 받은 레스토랑의 음식처럼 탐스러워 보여, 가현은 이를 황홀하게 보고 있었다.
“가현아, 이거 대표님 일하시는 서재에 가져다주는 것만 해줄 수 있을까? 다들 너무 바빠서 말이야.”
“네? 대표님께 제가 가져다드려도 돼요?”
음식은 멋져도 그 음식을 자신이 그에게 가져간다 생각하니 벌써 긴장됐다.
“지금 너무 바빠서 말이야. 노크하고 들어가서 놓고만 나오면 돼.”
“……네.”
마지못해 은쟁반에 담긴 다과를 들었다.
그와 마주치는 것이 못내 걸렸다.
서재 문 앞에서 심호흡을 한 뒤 문을 두드렸다. 몇 초간의 텀을 두고 명 비서가 문을 열었다. 가현이라 생각지 못했는지 명 비서가 당황했다.
“무슨 일이죠?”
“아… 여기 일하시는 분들이 바빠서 제가 대신 다과를 가져왔어요. 가져다드리라고 해서요.”
명 비서는 옆으로 비켜서며 들어올 수 있는 길을 터주었다.
서재 가장자리 넓은 테이블에는 수백 장의 A4용지가 쌓여있고 노트북과 서류들이 즐비했다.
사용인들이 하는 말을 얼핏 듣기로 연말이 가까워져 오면 서재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는 사람 몇몇이 살다시피 한다고 들었다.
가현은 다과를 놓을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명 비서는 소파 앞 테이블을 가리켰다.
테이블 위에 다과를 세팅하고 정중앙 넓은 테이블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지한은 누가 차를 가져왔는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 사이 지한과 두 명의 남자들이 함께 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지한은 조금 날카로워진 목소리로 직원이 해 놓은 일을 따지고 있었다.
“이 장부와 박 비서가 한 금액 차이가 상당해. 이걸 나에게 마무리한 결과라 가져왔나?”
차를 내려놓다 본 화면상에는 수십 줄의 끝도 없는 숫자들이 현란하게 쓰여 있었다.
기억은 없어도 신기하게 안개가 가득한 머릿속에 그 현란한 숫자들이 한순간에 정리되어 계산되었다.
자신도 모르게 화면을 보며 입으로는 계산된 숫자를 읊었다.
모두의 시선이 가현을 향했다. 가현 자신도 중얼거린 걸 그제야 알아채고는 얼른 은쟁반을 들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나가 보겠습니다.”
빠른 걸음으로 문으로 향하는 가현을 지한의 목소리가 잡아 세웠다.
“어떻게 계산했지?”
뒤를 돌아보자 의심의 눈초리가 가현을 훑었다.
길들여지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