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길들여지는 밤-6화 (6/67)

06

뒤돌아보니 명 비서가 씌워주는 우산을 쓴 지한이 살기가 가득한 눈으로 가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비가 와서 비를 피하려던 것뿐이에요.”

“과연 비뿐일까?”

문 앞 몇 개의 계단을 천천히 걸어 올라와 가현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눈앞에서 꺼져.”

그의 말에 대답도 못 하고 가현은 빗속을 뛰어갔다.

그와 마주하는 것보다 비에 맞아 감기에 걸리는 게 백번 나을 것 같았다.

***

며칠 만에 정원에 나와 바깥바람을 쐬었다.

“며칠 사이 더 추워졌네.”

해가 지고 있어 기온이 급격히 떨어진 정원이 휑하게 느껴졌다. 뺨이 찬 기운에 소름이 돋아 걸치고 있던 숄을 여며 잡았다.

정원을 가로질러 크리스마스트리를 꾸밀 알록달록한 볼과 예쁜 장식들이 가득한 상자를 들고 지나는 교진과 마주쳤다. 무거워 보여 얼른 뛰어가 여러 겹 쌓아 옮기던 짐을 나눠 들었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왜 나왔어요? 아직 감기 기운 있을 텐데, 일 끝났으면 쉬지, 그랬어요.”

“이젠 괜찮아요. 이 정도는 들 수 있고요.”

소나기를 맞았던 날, 결국 지독한 감기에 걸려 며칠을 끙끙 앓았다. 꿈에서조차 차지한이 나타나 꺼지라고 소리쳐 깨곤 했다. 며칠 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난 가현은 여전히 초췌한 얼굴이었다.

장식품들이 가득한 상자 하나를 넘겨받은 가현은 씩씩하게 걸어갔다.

이제는 제법 친해진 교진이 친근하게 말했다.

“아가씨.”

“그렇게 안 부르시면 좋겠어요. 저 부담스러워요.”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니 이름을 부를 수도 없고, 어떻게 부를까요?”

“아 맞다.”

교진이 다정하게 물었지만, 가현이 살짝 침울한 표정이 되었다.

“슬프라고 한 말은 아니에요.”

“알아요. 제 이름이 필요하단 생각도 못 했어요. 여기 와서 너무 편하게 지내서요.”

사용인들은 낙하산인 가현을 멀리했다. 호칭도 깍듯이 아가씨라고 불러 이름도 필요치 않았다.

“이름이 없으면 어때요? 다시 기억하면 되고 이름은 지으면 되죠. 제 딸은 이름이 있어도 곁에 없어 불러줄 수도 없는걸요.”

“저도 우울하시라고 한 말이 아닌걸요.”

교진에게 죽은 딸이 있다는 말은 들었다. 그녀가 살아있다면 지한의 나이 정도라 했다.

“이젠 익숙해요.”

“정 실장님이 제 이름 하나만 지어주실래요? 따님이 살아있었다면 제 나이 정도라고 하셨잖아요. 딸이라 생각하고 이름 지어주세요.”

“제가요?”

난감한 교진이 되물었다.

“전 기억도 없어요. 여기서 의지할 사람도 정 실장님과 장 여사님밖에 없고요.”

새빨갛게 노을이 지는 하늘이 해가 곧 사라질 듯 절정에 달해 물들어있었다. 교진은 고민하는 눈치였다. 이름은 쉽게 지을 수 있는 게 아니라며 혼잣말하고는 어느 때보다 고심했다.

“지나? 유진? 이건 아닌 것 같고.”

기대가 가득한 눈빛에 섣부르게 이름을 내뱉은 교진도 더 진지하게 고민했다.

“가현이는 어떻습니까?”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짐을 든 두 사람이 돌아보았다.

정원을 걸어 들어가던 지한이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교진 옆에 선 가현이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일찍 퇴근하셨습니다. 대표님.”

“집에서 일해야 합니다.”

가현은 비 오는 날 마주친 이후 처음 대하는 그가 어색해 아무 말도 못 했다. 차가운 눈빛에 다른 이를 주눅 들게 만드는 남자라 더 그러했다.

온화한 미소로 지한을 대하는 교진이 대단하게 보였다.

“그럼 다과라도 준비할까요?”

“괜찮습니다.”

생각해보니 그는 늘 반말이었지만 교진에게는 깍듯했다. 교진에게 한 질문에 대답을 못 들어선 지 한 번 더 물었다.

“정가현. 정효은과 느낌이 비슷하군요.”

그는 상대의 마음은 생각지도 않고 쌩하니 가현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제야 가현이 교진의 얼굴을 살폈다. 괜히 자신이 이름을 지어달라 했나 후회했다.

“괜한 부탁을 한 것 같아요. 정 실장님. 죄송해요.”

잔인한 남자였다. 상대의 상처를 생각한다면 죽은 딸을 그리워하는 아버지에게 이러지는 못할 것이다. 따지려는 가현을 옆에서 교진이 말렸다.

“난 괜찮아요. 대표님의 뜻은 상처를 주려는 게 아니에요. 난 많이 불러보지도 못한 딸아이 이름이지만 가현이라는 이름을 써도 괜찮다면 좋아요.”

“네? 전 상관없지만…. 그래도.”

지한을 감싸고 도는 교진이 이해되지 않았다. 궁금한 것을 못 참는 것이 병인지 기억에 없는 자신은 참 호기심이 왕성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더는 참지 못하고 발걸음을 옮기는 교진을 따라 걸으며 물었다.

“장 여사님도 실장님도 저렇게 냉정한 분을 왜 두둔하세요?”

“대표님을 아니까요.”

온화한 미소를 지은 교진은 옆에서 따라오는 가현을 보고 물었다.

“더 알고 싶어요?”

“네, 당연히 궁금해요.”

“차 대표님과 제 딸 효은이는 짧지만 1년 정도 친구처럼 친하게 지냈어요. 제 딸이 죽고 나서 오래 슬퍼한 사람도 저와 차 대표님이었죠. 그리고 대표님 아버님이… 아닙니다.”

말을 하려다가 멈춘 교진은 오해를 풀려 노력했다. 그가 차지한이란 남자를 아끼는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차 대표님은 아픈 마음을 헤집으려는 게 아니에요. 오해하지 마십시오. 제가 효은이를 늘 그리워하는 걸 알고 계십니다. 아가씨가 이 집에 오고 한번은 그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저와 아가씨가 부녀 같다고. 생각해보니 저도 아가씨를 보며 제 딸을 떠올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도련님도 정말 딸처럼 지냈으면 하셨나 봅니다.”

“그렇군요. 저도 정 실장님이 제 아버지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정가현이란 이름 정말 써도 될까요?”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제가 그 이름 쓰면 말 낮춰주세요.”

짐을 들고 비장하게 조건을 제시했다.

“…그래요.”

교진이 잠시 뜸을 들여 한 대답에 뽀로통하게 표정을 지었다. 여전한 존댓말에 대한 불만이었다. 뒤늦게 눈치챈 교진은 웃으며 말을 놓았다.

“그러자.”

“네.”

그제야 함박웃음을 짓는 가현은 정가현이란 새로운 성이 생겼다.

***

연말이 다가오자 밥 먹듯 자정을 넘겨 귀가하던 지한이 오랜만에 제시간에 귀가한다고 통보했다. 덕분에 늦은 오후부터 사용인들이 분주했다.

가현은 장원댁을 도왔다. 손이 빠른 그녀가 와인에 곁들일 요리를 뚝딱 만들어내는 걸 옆에서 눈이 휘둥그레져 구경했다.

“여사님 음식은 마치 미슐랭 받는 그런 레스토랑 음식 같아요.”

“그렇게 보여? 내가 이래 봬도 한식, 중식, 일식, 양식까지 다 자격증이 있다니까. 그중에 야식이 가장 전문이야.”

그녀의 농담에 까르르 웃는 가현에게 장 여사는 웃으며 약속했다.

“다음에 기쁘거나 슬픈 일 있을 때 말해. 먹고 싶은 야식 멋지게 만들어줄게.”

“네, 약속하셨어요.”

“내가 두말은 안 하지.”

겉치레 없이 친해진 두 사람의 대화는 편안했다.

“내일 우리 손주 생일이라서 빨리 음식 만들고 가야 해. 하필 도련님은 오늘 일찍 들어오신담.”

“다른 분께 맡기고 가시죠?”

“우리 대표님이 내 음식 아니면 입도 안 대려고 한다고. 우리 도련님 음식인데 내가 해 드리고 가야지.”

교진도 장 여사도 어째서 얼음같이 차가운 차지한이라면 껌뻑 죽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가끔 도련님이라 부르는 호칭으로 두 사람이 어릴 때부터 그의 집에서 일했다는 걸 알 수 있는 정도였다.

마지막 음식을 마무리한 장 여사가 예쁜 사기그릇에 멋지게 음식을 플레이팅 한 후, 장 여사는 호탕하게 인사를 하고 주방을 나갔다.

배턴 터치를 하듯 교진이 주방으로 들어와 바쁘게 움직였다.

“차 대표님께서 오실 시간이 다 되어서 와인을 챙겨 와야 해요. 여기서 트레이에 옮겨 담아요.”

교진은 여전히 말을 놓지 못하고 존댓말과 반말을 오고 갔다. 이제는 가현도 포기하고 반말이 더 많아지길 바라며, 주방에서 나가려는 교진을 붙잡았다.

“정 실장님 제가 가져올게요.”

“괜찮아요. 위치도 모르는데 와인 창고가 꽤 넓어서 말이야.”

“바쁘시잖아요. 전 여기에서 할 것도 없이 있는걸요. 위치만 알려주시면 도와드리고 싶어요.”

교진이 눈을 접고 온화하게 웃었다.

“그럼 부탁할게.”

“네. 도움이 돼서 저는 더 좋아요. 얼른 다녀올게요!”

뛰다시피 지하 와인 창고로 갔다. 와인 창고는 가현이 생각한 것보다 넓었다. 이곳의 저택 규모에도 놀랐는데 와인 창고라고 다를까 싶었다.

“들어가서 오른쪽으로 들어가라고 했지.”

교진이 알려주었던 위치를 더듬어 찾아갔다. 와인 창고보다는 꼭 유명 와이너리처럼 오크통이 몇 개 쌓여있고 누가 보아도 비싼 와인을 모아놓은 선반에는 따로 온도 조절이 가능하게 되어 있었다.

“얼마나 비싼 와인인 거야?”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선반에 놓인 르누아 와인 병을 들었다.

“이게 그 와인인가?”

언젠가 사용인들이 대화하는 걸 들었다. 지한이 와인 마니아라서 와인 창고에 값비싼 차 한 대와 맞먹는 몇억 원 하는 와인이 있다고 했었다.

이름을 꼼꼼히 확인하고 병을 들고 와인 창고 입구를 찾아 나왔다.

하지만 와인 창고 입구 문을 당겨 보아도 도통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 한번 문을 당겨도 되지 않자 와인 병을 근처 선반에 올려놓고 두 손으로 세게 당겨 보았다.

“이 문이 왜 이래?”

공포가 엄습했다.

길들여지는 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