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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여지는 밤-5화 (5/67)

05

“한가지 약속할 수 있을까요? 저는 대표님의 집에서 일합니다. 그저 제 권한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사용인 정도입니다. 그곳에서 있었던 어떤 일도 외부로 옮기지 않는다는 것이 전제입니다.”

“그런 약속이라면 잘 지킬게요. 할 수 있어요!”

생각해보면 어린 아가씨가 의탁할 곳도 없이 길거리로 내몰린다면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대표님의 허락은 제가 받겠습니다. 대신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생활하는 겁니다. 아가씨가 기억을 찾을 때까지 만입니다.”

“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교진의 표정도 함께 밝아졌다.

***

저녁이 되자 지한의 저택은 분주해졌다.

덩달아 가현도 우왕좌왕했다. 이곳이 일반적인 집이 아닌 건 집 앞에 도착했을 때부터 알았다.

성문이 연상되는 높이 치솟은 쇠문이 양옆으로 자동으로 열리고 제법 긴 거리를 차가 달려간 곳에는 넓은 정원과 크고 작은 건물 세 채가 있는 저택이었다. 심상치 않은 집은 집주인이 돌아오는 시간이 되자 다시 범상치 않아졌다.

사용인이 지한의 퇴근 시간에 맞춰 문 앞에 늘어섰다. 교진이 가현에게 다가왔다.

“이쪽으로 오세요. 제 뒤에 서 있어요.”

“네.”

그의 귀가는 연락했던 시간보다 늦어졌다.

교진의 뒤에 서 있던 가현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매일 퇴근하실 때 이렇게 하나요?”

“아닙니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입니다.”

가현이 바로 수긍하자 교진이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지한의 큰 체격이 저 멀리서부터 예사롭지 않게 다가왔다. 그의 허락도 받지 않고 이곳에 와 있으니 그가 어떻게 나올지 상상되어 긴장됐다. 멀리서부터 그의 시선이 가현에게 꽂혔다. 그것이 고스란히 느껴져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사용인이 고개 숙여 인사하는 걸 보고 가현도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지한의 걸음이 교진 옆에 멈췄다. 가현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질문은 교진에게 향했다.

“왜 불청객이 이 집에 있습니까?”

“사용인이 부족해 제가 고용했습니다.”

눈이 마주친 가현은 그의 눈에 얼어붙었다. 대답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교진은 적의가 가득한 목소리에 흔들리지 않고 차분하게 답했다.

“정 실장님께 지시한 내용은 달랐을 텐데요.”

그의 시선이 교진을 향했고 자신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아랫사람을 향한 목소리가 차게 식어 있었다.

“지시하신 말은 전달했습니다. 사용인의 고용은 다른 문제입니다.”

“…….”

지한이 가현에게 다가와 내려다보았다.

“능력이 좋아.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와 있지?”

“갈 곳이 없어요. 일해야 신세 진 빚을 갚을 수 있어서…….”

그의 표정에 말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목을 조인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살기가 가득했다. 호불호가 정확한 눈빛이 자신을 혐오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 집을 제 발로 나가는 게 신상에 좋을 거야.”

낮게 깔린 중저음이 경고했다.

다음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교진에게 시선이 향했다. 교진을 향한 눈빛은 차가워도 다른 사람을 대할 때와는 달랐다. 지한이 숨을 크게 내쉬고는 안채를 향해 걸어갔다.

“정 실장님, 서재에서 이야기합시다.”

“네, 곧 가겠습니다.”

지한이 자리를 뜨자 사용인들이 빠르게 삼삼오오 자리를 떠났다.

“저 아가씨가 누구길래 두 분이 저러시지? 대표님이 정 실장님께 저러는 거 처음 봐.”

모두가 가현을 흘끔거리며 귓속말했다. 이 집의 주인 말고도 적은 이미 많았다.

교진의 등 뒤에 서 있던 가현이 다가와 사과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곤란하게 만들었어요. 차지한 대표님 성격에 괜찮을까요?”

“이건 내가 결정한 일입니다. 별일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가현은 자신을 안심시키는 교진이 걱정되면서 자신의 처지가 어찌 될지 불투명해 보였다.

“방에 가 있어요. 오늘은 피곤할 테니 좀 쉬어요.”

안채로 걸어가는 교진을 보고 가현은 한숨을 쉬었다. 교진에겐 미안하지만, 가현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교진이 잡아준 손은 동아줄과 같았다. 제발, 차지한의 마음이 움직이길 바랄 뿐이었다.

서재에 앉은 지한의 표정이 못마땅했다.

“저 여자는 안 됩니다. 그 측은지심은 이럴 때 발휘하는 게 아닙니다.”

“불행한 일을 당한 기억을 잃은 어린 아가씨일 뿐입니다. 대표님께 해가 되지 않을 사람이니 보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해가 되었다면 그렇게 보내지는 않았겠지요.”

“…….”

“그렇다면 사용인으로 고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교진의 말이 맞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상황을 봐줄 만큼 인심이 좋지 않았다. 난데없이 눈앞에 나타난 여자가 거슬렸다.

“제가 원치 않는다면요?”

“제가 보증해도 안 되겠습니까?”

지한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한참을 고민했다. 교진은 아버지를 모시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지한의 뜻을 어긴 적이 없었다. 늘 자신이 우선이었던 그가 왜 이토록 그녀를 두둔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처음 보는 사람입니다. 정 실장님이 이러시는 걸 본 적이 없고요.”

“효은이를 기억하시지요. 그 아기가 아무 일 없이 자랐다면 저 아가씨의 나이일 겁니다. 저는 기억을 잃고, 안타까운 사람을 도울 작은 권한이 있어 그걸 이용했을 뿐입니다.”

지한은 침묵을 택했다. 교진은 그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교진을 못마땅하게 보고 있던 지한도 그의 성정을 잘 알았다. 이렇게 고집을 부린다면 제아무리 강한 지한이라 할지라도 못 말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교진이 고집을 꺾어주길 바랐지만, 이번엔 자신이 져줄 차례였다.

그 여자를 내보낼 빌미는 차고 넘치게 많으니 한발 물러나기로 했다.

지한이 승낙을 돌려 말했다.

“정 실장님은 마음이 약한 게 탈입니다.”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진이 옅게 미소 지으며 한발 물러서 준 지한에게 감사를 표했다. 지한의 마지막 경고는 자비가 없었다.

“만약 문제를 일으키면 곧바로 내보내겠습니다. 실수한다면 용서는 없습니다.”

***

가현은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다.

갑자기 고용된 가현을 낙하산으로 생각해 사용인들은 텃세를 부렸다. 그도 그럴 것이 지한은 사람을 쉽게 신뢰하지 않아 집안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은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 그만큼 그들의 복지를 챙겼고 넉넉히 임금을 지급했다. 한창인 꽃다운 20대 사용인은 찾아보기 힘든 곳이 지한의 저택이었다.

“저기, 장 여사님이 와보래요.”

쌀쌀맞게 말하는 그녀는 대답도 듣지 않고 쌩하니 가버렸다.

가현은 청소도구를 내려놓고 주방으로 갔다. 장원댁이 환하게 웃으며 가현을 식탁에 앉혔다.

“배고프지? 이쪽에 와서 앉아.”

“네? 점심 먹었는걸요.”

“제대로 먹지도 않았잖아. 이거 먹고 내 심부름 하나만 해줘.”

푸근한 인상의 장원댁은 이 집의 주방 살림을 도맡아 했다. 이 집에서 일하는 사람 중 가현의 사연을 아는 교진 외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사용인들의 텃세에 점심때도 그녀가 한소리를 했었다. 먹음직스러운 훈제 연어가 올려진 연어 샐러드를 테이블에 놓았다.

“와, 너무 맛있어 보여요.”

“눈치 보지 말고 다 먹어. 여기 사람들이 쓸데없는 소문으로 엉뚱한 말 해도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사용인들이 점심을 먹으며 옆에 있는 가현에게 핀잔주듯 한 말을 들었던 모양이다.

“들으셨어요? 모르고 한 말이라 생각해요.”

“여기 있는 사람 중에 내가 나이로 넘버 투야. 다른 사람들 엉뚱한 말 하면 나한테 말해.”

“…….”

자신의 편에 서서 싸워줄 것처럼 말해줘서 진심으로 고마웠다. 하지만 오버해 하는 행동과 말에 웃음이 나서 풋 웃고 말았다.

“죄송해요. 하신 말씀에 웃은 게 아니에요. 혼자라 생각했는데 제 편이 되어주신다는 말에 고맙고….”

“알아. 사람이 살다 보면 별일이 다 있어. 걱정하지 마. 누구는 기억 땜에 괴로워하고 살잖아. 그냥 잊고 싶은 기억 잠시 내려놨다고 생각하면 되지 뭐. 다 떠오를 때 되면 싫어도 생각날 거야 그러니 마음 편히 먹고 지내.”

“감사합니다. 정말 막막했는데 말씀 들으니 힘이 나요.”

훈제 연어 샐러드를 입에 가져갔다. 달큰하고 쌉싸름한 소스 맛이 어우러져 감칠맛이 돌았다.

마음이 담긴 음식은 배가 아닌 마음을 채웠다.

기분 좋은 식사 후 장원댁은 멀리 떨어진 창고에 짐을 정리해 달라 부탁했다.

무겁지는 않지만, 소쿠리와 몇 가지의 주방용품이 제법 컸다.

물건들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오자 하늘이 심상치 않았다.

먹구름이 무겁게 수분을 머금고 금세 바닥으로 떨어뜨릴 것 같았다.

“비 온다는 말은 없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소나기가 세차게 쏟아졌다. 여름도 아닌데 피할 틈도 주지 않고 추위를 머금은 비가 바닥으로 내리꽂히듯 쏟아졌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앞이 뿌옇게 변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건물을 향해 뛰어가던 가현은 마침 외떨어진 출입 금지 건물 앞이었다. 비를 피할 곳도 마땅치 않아 작은 문 앞에 섰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집을 안내하던 장원댁이 당부만 할 뿐 알려주지 않은 작은 건물이었다.

작은 건물의 반은 유리로 둘러싸인 온실 같았다. 세찬 소나기에 사연이 많을 것 같은 건물을 돌아보았다.

‘저기는 차 대표님만 출입하는 곳이니 가지 말아요.’

차지한이란 남자는 비밀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원댁이 당부한 말이 떠올랐지만, 추운 날씨에 비까지 맞으면 분명 감기에 걸릴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 문 열면 곤란할 텐데.”

서늘한 음성이 겨울비보다 차게 가현을 향했다.

길들여지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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