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길들여지는 밤-4화 (4/67)

04

가현은 비장한 표정으로 슈트 자락을 움켜쥐고 그의 차가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가현은 움켜쥔 옷자락을 놓칠까 걱정되는지 더 단단히 붙잡았다.

라윤은 생각지 않은 여자의 등장에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지한은 큰 변화 없이 그저 가현을 내려다보며 옷자락을 잡은 작은 손을 떼어냈다.

“놔.”

“난 정말 기억이 없다고요. 그러니 작은 거라도 나에 대해 알려줘요. 오늘은 대답을 꼭 들어야겠어요.”

링거대를 잡은 작은 여자가 흥미로운지 라윤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둘을 관전했다.

“무슨 일이길래 상대 여자를 이렇게 화나게 했을까? 다른 사람도 아닌 차.지.한. 대표님께서.”

두 여자가 지한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제야 라윤을 의식한 지한이 시선을 옮겼다.

“백라윤, 내일 일정 확인하고 스케줄 전달할게. 먼저 들어가.”

지한의 단호한 말에 그의 의중을 읽은 라윤은 순순히 따랐다. 하지만 무엇이든 당당하게 의사를 전달하는 그녀는 궁금증에 대한 답을 다음으로 미룬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그래. 오늘은 그만 물러나 줄게. 다음에는 여유 있게 물어볼 거야.”

라윤이 그를 보고 그림같이 미소 지었다. 그녀의 궁금함이 가득한 시선이 가현을 향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차지한과 잘 해결해 봐요. 다음에 우리가 만나게 될 정도의 인연은 아니길 바랄게요.”

시원스럽게 생긴 서구적인 얼굴과 몸매는 자신감 넘치는 행동만으로도 주눅이 들게 했다. 생각도 하지 않은 관계를 염두에 둔 뼈가 있는 말에 가현이 인상을 굳혔다. 라윤은 신경도 쓰지 않고 돌아서 걸어갔다.

“병실로 가지.”

지한이 그녀를 무시하고 성큼 걸어갔다. 병실에 들어선 그가 고압적인 표정으로 소파에 앉았다.

“뭘 원하지?”

짜증이 섞인 목소리는 잘못 말했다가는 본전도 찾지 못할 말투였다.

“잃어버린 제 기억에 대해 말해줘요.”

“할 말이 없어. 널 모르니까.”

가현은 그의 기운에 흔들리지 않고 한발 다가가 물었다.

맨발로 슬리퍼를 신고 링거대를 잡은 그녀는 더 작아 보였다. 지한의 표정은 변함없이 지금 상황을 최대한 참아준다는 듯 턱을 더 꽉 다물었다.

“그럼 저 어디에서 발견했어요?”

“경기도 양평 어디쯤 2차선 도로.”

“양평요?”

가현은 아무리 떠올려봐도 백지 같았다.

“제 옷차림은 어땠어요? 아, 그리고 소지품은 뭐가 있었어요?”

구체적인 질문에 더는 참아주지 못하겠다는 듯 지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못 들어주겠군. 내가 그렇게 한가해 보여?”

“당신이 날 구했잖아요. 당신 밖에 말해 줄 사람이 없잖아요.”

가현이 항변하듯 하는 말에 그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구해? 웃기는군. 넌 내게 깨끗한 물에 생긴 불순물 정도쯤이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당신은 아니라지만 날 여기에 입원시키고 치료해 준 것은 고마워요. 당신이 이렇게 말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니까요. 하지만 당신 말은 지나쳐요.”

보통 그의 아우라에 사람들은 말대꾸하지 못했다. 지한은 조그마한 어린 여자가 꼬박꼬박 따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저 허공에 대고 말하듯 투명 인간 취급했다.

“그딴 질문은 딴 데 가서 해. 세상에 공짜는 없어 고마우면 갚아.”

“나도 신세 지고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어요. 꼭 갚을게요.”

“몸뚱이 하나로 어떻게?”

조롱하듯 하는 말에 얼굴이 홧홧했다. 지한이 병실 문으로 발길을 옮겼다.

“거기 서요. 난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전엔 그쪽 못 보내요.”

최선을 다해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렇지만 작은 그녀가 붙잡은 팔은 생각보다 단단해 오히려 뿌리치는 힘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바닥에 손을 짚고 앉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지한은 차갑게 눈을 내리깔았다.

“네 정체가 무엇인지 알기 전엔 입 다물고 있어.”

서늘한 시선이 그에게 해가 되는 존재라면 죽여버릴 것 같아 소름이 돋았다.

그는 곧장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가현이 자리에 주저앉아 일어나지도 않고 인상을 찌푸렸다.

“나쁜 놈.”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것은 불안하기만 했다. 불안감만큼 그를 향한 적개심은 커졌다.

그래도 그를 이대로 보낼 수 없어 아픈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 뛰어나갔다.

저만치 다른 사람보다 머리 하나가 큰 그를 발견하고 뛰어가다 우뚝 서버렸다.

지한의 모습을 차단하는 검은 양복을 입은 세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온통 검은 정장의 남자들을 보는 순간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헉헉.

“이게, 헉… 아닌 헉헉.”

숨이 턱까지 차올라 가슴을 움켜쥐었다. 마음대로 쉬어지지 않는 숨을 크게 내뱉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주위의 시선이, 모두가 자신을 향했다.

세 남자의 시선도 가현을 향해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세상의 모든 공포가 온통 폐로 내리꽂히는 느낌이었다.

가현은 그대로 눈물을 떨구며, 정신을 잃었다. 누군가 자신을 흔들다가 안아 올리는 걸 느끼고 기억은 암전이었다.

***

진료실에 앉은 가현은 침울했다.

“아직 기억은 떠오르는 것이 없습니까? 정신과 선생님께 들은 이야기는 저번 상담 때와 똑같더군요.”

“네. 아무것도요.”

차트를 넘기는 서 닥터가 안경을 들치며 말했다. 입원 후 반복되는 질문에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저 무례했던 지한의 잔상과 검은 정장의 아우라가 떠올라 소름이 돋았다.

없는 기억을 억지로 떠올리니 오히려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것 외엔 몸은 이제 정상입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방어 기전만 남은 거죠. 기억은 일상생활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될 가능성이 커요. 퇴원 후 트라우마로 인한 후유증은 차차 통원 치료를 해 보죠.”

“……전 어디로 가야 하죠? 기억도 없는데 말이죠. 차지한이란 그 사람 좀 만나게 해주세요. 제발요.”

“그분은 만나고 싶다고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절 입원시켰잖아요. 그러니 그분과 이야기해서 퇴원할게요. 꼭 할 말이 있어요.”

구해준 것만으로도 고맙지만, 그밖에 매달릴 사람이 없었다. 염치없어도 돌아갈 곳이 없는 그녀에게 기억을 잃기 전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은 그뿐이었다.

“……환자분 부탁은 전해는 보겠습니다.”

서 닥터와 면담 후 결국 퇴원이 결정되었다. 그저 막막했다.

세상에서 낙오자가 된 것처럼 처참한 패잔병이 된 기분이었다.

무료하게 창가에 서 우두커니 창밖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퇴원은 그녀에게 두려움이었다.

똑똑

지한 외에 병실을 찾아온 이는 처음이었다. 놀란 토끼 눈으로 생각에서 빠져나와 문을 보았다.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자는 낯설지만 온화한 중년 신사였다. 그는 경계심을 사그라지게 할 정도로 푸근한 인상이었다.

병원에서 마주하는 사람들에게 날을 세우던 가현은 어느 때보다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

“누구시죠?”

“저는 차지한 대표님의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정교진이라고 합니다.”

미소를 머금은 그의 표정만큼 목소리도 나쁜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 사람이라면 자기 말을 들어줄 것 같았다.

“차지한 씨, 아니 차지한 대표님을 만나야 해요.”

“많이 바쁘신 분이라 만날 수는 없습니다. 대신 말을 전하러 왔습니다.”

“무슨 말이죠? 제가 만날 수 없어서 편지까지 전달했다고요.”

말투는 친절하지만, 내용은 단호했다.

“대표님께서 아가씨를 거둘 이유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신세를 갚겠다고 하셨으니 유예기간을 주겠다 하셨습니다. 치료비, 입원비 등은 향후 나누어서라도 갚으라 하셨습니다.”

“아.”

역시나 그는 냉정했다. 기억을 잃은 사람의 처지 따위는 그에게는 고려할 여지가 없는 사람이었다.

“제가 듣기로는 아가씨가 기억을 잃었다고 들었습니다.”

“아… 네. 맞아요.”

조심스럽게 말하는 그는 배려심이 있었다. 그의 윗사람인 차지한과 다르게….

처음 마주한 그가 자신의 처지를 안다고 생각하니 머쓱했다.

차지한,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네 정체가 무엇인지 알기 전엔 입 다물고 있어.’

고압적이던 목소리와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어느 것 하나 호의적이지 않은 남자는 길잃은 강아지 같은 신세인 자신을 경계했다. 생각이 많아지는 그녀의 표정을 읽었는지 교진이 달래듯 말했다.

“퇴원 수속은 진행 중입니다. 가져가실 짐이 있다면 도와드리겠습니다.”

“챙길 짐도 없는걸요. 전 이곳을 나가면 갈 곳도 도와줄 사람도 없어요. 절 도와주세요. 제발요.”

“…….”

눈물이 그렁그렁한 가현은 결국 그 앞에서 눈물을 떨궜다. 세상에 혼자 남겨진 느낌은 지독하게 외로웠다. 교진은 조심스럽게 다가와 손수건을 내밀었다. 가현은 받지 않으려 했지만, 교진이 손에 손수건을 쥐여주었다.

“대표님은 나쁜 분은 아니지만, 주위에 대표님을 노리는 분이 많죠. 그래서 아가씨를 더 경계했을 겁니다. 아가씨를 보니 제 딸이 생각나는군요.”

교진은 딸을 바라보는 눈으로 가현을 보았다.

“제가 한동안 생활할 수 있는 돈을 빌려 드리겠습니다.”

“돈보다 전 앞으로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해요. 청소라도 좋아요. 아니면 허드렛일이라도 하게 해주세요.”

가현은 교진의 손을 잡고 애절하게 부탁했다. 간절한 가현의 모습에 교진은 한참을 고민했다.

길들여지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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