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카라의 황궁은 봄빛으로 가득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훈풍은 봄꽃의 개화를 재촉했다. 공사에 공사를 더해 이제는 본궁의 크기보다 넓어진 정원은 만발한 색색깔의 봄꽃 덕분에 마치 무지개가 땅에 내려온 것처럼 보였다.
봄바람이 계절을 앞당긴 것처럼, 아넬의 출산도 예상보다 빨랐다.
5월, 카비르에선 슬슬 더위가 시작될 무렵 아넬이 머무는 황후궁에 산실이 차려졌다. 출산에 들어간 지 겨우 네 시간 만에 아이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자, 산실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자레스가 벌떡 일어나 손수 산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황후는?”
“무탈하십니다, 폐하.”
아넬이 누워 있는 침대 곁에 서 있던 블로자가 얼른 그녀와 자레스 사이를 막아서며 알렸다.
카비르에선 원래 남자는 산실에 들어오지 못한다.
하지만 자레스는 항상 전통을 무시했는데, 그나마 이번엔 네 번 째 쯤 되니 별 일 없을 거라 믿고 출산이 끝날 때까지는 기다려준 거였다.
“폐하. 산후 처리를 해야 하니 모쪼록 나가서 기다려 주십시오.”
“왜 그래야 하는가? 나는 황후가 무사한 걸 눈으로 확인해야겠다.”
“폐하. 마마께서 지금은 정신도 또렷하고 건강하시긴 합니다만, 흘린 피도 지혈을 해야 하고 탯줄 역시 잘라야 합니다. 자꾸 재촉하시면 마마께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관대한 사이야에 비해 블로자는 엄격하고 까다로웠다. 그래서 아랫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자레스는 늘 그녀를 대하기가 어려웠다.
야단맞는 기분이 들어 불쾌했지만, 아넬이 힘들 거라 하니 더 버틸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문 밖으로 물러난 자레스는 30여분이 지난 뒤에야 다시 산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예쁜 황녀님이십니다, 폐하.”
아이를 강보로 감싼 사이야가 다가오며 말했다.
“딸인가…?”
드디어 딸이었다.
아넬과 자레스는 메타의 아이들이 퍼지는 것보다 먼저 칼리크의 아이들로 세상을 채우겠다는 약속을 확실하게 지켰다.
메타를 소멸시킨 그 해에 두 사람은 정식으로 혼인을 했고, 아넬은 카비르의 첫 번째 황후가 됐다.
그 뒤로 아들만 세 명을 뒀는데, 드디어 고대하던 딸을 낳았다. 감격스럽기도 했지만, 딸은 처음이다 보니 철혈의 황제답지 않게 자레스의 어깨가 무거워졌다.
“황후마마를 닮아서 정말 예쁘답니다. 경하 드립니다, 폐하. 드디어 소원을 이루셨어요.”
눈이 안 보이는데 대체 갓난아기가 아넬을 닮았다는 건 어떻게 아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사이야에게 아이를 건네받은 자레스는 그녀의 말이 맞다는 걸 깨닫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이의 머리카락은 풍성한 금발이었다. 갓난아기인데도 머리숱이 많았는데, 신기하게도 아빠를 보려는 건지 잠깐 동안 떴다 감은 눈 역시 아넬을 닮아 신록을 닮은 초록색이었다.
잠시 침묵 속에서 정신없이 딸을 들여다보던 자레스가 아이를 안은 채 아넬에게 다가갔다.
아넬은 지쳐 보이긴 했지만 후련한 얼굴이었다. 표정은 밝았고, 무사히 아이를 낳았다는 뿌듯함에 자레스에게 해맑은 미소를 보냈다.
“당신을 닮았어.”
그녀가 누운 침대 곁에 앉으며 자레스가 아넬에게 아이를 보여줬다.
살짝 목소리가 떨렸다. 아넬과 그 사이에 처음으로 자식이 생겼을 때는 기쁨보다 초조함이 더 컸다.
출산 중에 임산부가 죽는 게 흔한 때였다. 그들의 사랑이 결실을 맺었다는 건 절절하게 행복했지만, 그보다 아넬이 어찌 될까 봐 무서웠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처음으로 딸을, 그것도 이렇게나 아넬을 닮은 아이를 얻자 처음 겪는 경이로움이 넘실거리며 그를 채웠다.
“이제야 비로소 세계가 완성된 기분이군.”
“딸을 낳아서요? 자레스, 먼저 태어난 세 아이들이 섭섭해 하겠어요.”
“내가 얼마나 딸을 기다렸는지 당신은 모를 거야. 게다가 아넬, 이 얼굴을 봐. 당신을 너무 닮았어.”
그가 감개무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딸이라 기쁜 것도 있지만, 아넬을 닮았기에 아이에 대한 사랑이 더욱 솟구쳤다.
절대 아넬보다 더 사랑하는 존재가 생길 거라 여기지 않았는데, 이 아이는 거의 그녀와 비슷할 정도로 아끼게 될 것 같다는 짐작이 무럭무럭 솟아났다.
“사랑해, 아넬.”
아이를 아넬에게 안겨주며, 자레스가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아넬의 눈에도 살짝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녀도 자레스만큼이나 기뻤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는 것은 아넬에게도 큰 행복이었고, 가족이 늘어갈수록 고독했던 그녀의 삶이 비로소 채워지는 듯했다.
스물한 살로 끝났던 인생이 이제는 그 세월을 훨씬 넘겼다.
이 정도면 됐다던 기쁨은 한없이 늘어만 가면서, 그녀에게 삶의 환희를 안겨줬다.
너무 행복해서 불안할 정도라면 괜한 걱정일까. 아넬은 여전히 건장하고 잘 생긴 자레스의 뺨에 손을 대며 벅찬 눈물을 누른 채 속삭였다.
“세계가 완성되다니요. 칼리크의 아이들로 세상을 채우려면 아직 멀었어요.”
“그런 말 들으면 바로 안고 싶어져, 아넬. 날 자꾸 자극하지 마.”
아이를 가진 동안 자레스가 얼마나 참았는지 아는 그녀가 감히 먼저 그를 도발해선 안 됐다.
앞으로도 당분간은 인내해야 했는데, 아넬의 말을 듣자마자 바로 팽팽하게 당겨진 끈이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크흠!”
마침 그녀가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려는 듯한 블로자의 기침 소리가 들려오는 바람에 어색한 긴장감이 사라졌다.
“자레스. 이제 아이들에게 가 봐요.”
분위기를 바꿀 겸 아넬이 부탁했다.
지금쯤 위로 줄줄이 낳은 세 아들이 처음으로 맞이하는 여동생을 보기 위해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넬을 살피느라 잊고 있던 아이들이 그제야 생각났다.
자레스는 자식들에게 그다지 다정한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선황처럼 자기밖에 모르는 무정한 위인도 아니었다.
다만 아이들보다 아넬이 더 소중할 뿐이었다.
“그러지.”
그녀의 부탁에 비로소 일어난 자레스가 아이를 안은 채 아들들이 기다리고 있는 곁방으로 향했다.
“와아아!”
딸을 안고 방으로 들어서자, 올망졸망 모여 있던 아들들이 일제히 일어나 동생을 맞았다.
아버지는 다정한 어머니와 달리 아이들에겐 늘 어려운 존재였다. 하지만 첫 여동생은 아버지에 대한 껄끄러움을 잊게 만들었다.
여동생을 감싸고 선 오빠들은 벌써 이목구비가 뚜렷한 아이의 얼굴을 보며 신기해했다.
“예쁘다!”
가장 어린 막내아들, 아미르가 먼저 외치자 둘째인 타니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중하게 동생을 들여다보던 첫째 일리크가 이어서 말했다.
“어머니가 작아진 것 같네요.”
일리크의 말이 맞았다. 이제 갓 태어났는데도 생김새가 아넬을 꼭 닮아 신기했다.
아직 갓난아기라 몸집은 작고 눈은 부은 듯 튀어나와 있었지만, 자레스도 오빠들도 이 아이가 커서는 아넬 못지않은 미인이 될 거라는 걸 짐작했다.
“맞아, 맞아! 크면 어머니와 똑 닮을 거야.”
“나, 이 아이가 좋아질 것 같아.”
아넬의 교육 덕분에 아들들끼리도 사이가 좋긴 했지만, 여자 동생이 생기는 건 또 달랐다.
갑자기 여동생을 보호해주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솟구쳤고, 누군지 몰라도 언젠가 여동생을 데려갈 남자에 대한 적개심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벌써 코가 오뚝한 것 봐. 아우, 귀여워.”
“아기는 원래 이렇게 다 예뻐?”
“네가 태어날 땐 전혀 아니었지, 아미르. 난 어머니가 원숭이를 낳은 줄 알고 경악했었어.”
“내가 뭘 어때서!”
이미 열두 살이라, 막내인 아미르와 여덟 살이나 차이가 나는 일리크는 아미르의 항의에 낄낄 웃었다.
그러는 사이 성질 급한 둘째 타니안이 아이를 만지려 손을 내밀었는데, 자레스가 그 손길을 엄격하게 쳐내버렸다.
“갓난아이는 함부로 손대는 게 아니다. 더러운 손으로 만지면 아이가 아프게 돼.”
“병에 걸리면 제가 치료해주면 돼요.”
첫째 일리크가 당당하게 외치자 타니안과 아미르가 부러운 눈으로 형을 쳐다봤다.
아이들을 낳을수록 아넬의 성력은 마치 자식들에게 나눠준 것처럼 점점 사라져갔다.
반면에 첫째 일리크는 어머니의 힘을 이어받은 것처럼 성력이 강했지만, 아래로 갈수록 성력은 점점 약해져서 동생들은 그게 불만이었다.
“불공평해요. 왜 저와 아미르는 형처럼 치유력이 강하지 않죠?”
“첫째가 가장 강한 건 자연의 이치란다, 동생아.”
“그럼 나는 늘 가장 약한 거야? 그런 게 어디 있어!”
사이가 좋다가도 곧잘 아웅다웅 싸우는 아들들이 바로 왁자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그런 아들들의 말싸움을 자레스가 단칼에 잘라버렸다.
“시끄럽다. 어머니가 곁방에서 쉬고 계신데, 여기서 소란을 피울 참이냐?”
그의 일갈에 바로 아이들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아이들의 약점이자 자랑이 바로 아넬이었다. 그들이 조금씩 나눠받은 성력의 근원. 마치 태양처럼 따뜻하고, 우유처럼 부드러운 어머니.
굳이 자레스가 냉정한 위엄을 발휘하지 않아도 아넬을 입에 올리면 소란스러운 아들들은 금세 얌전해지곤 했다.
“성력이 있어도 절대로 쓰면 안 돼. 그건 이미 알고 있겠지?”
“네….”
“성력은 쓰면 쓸수록 수명이 깎인다. 성력이 있다고 함부로 작은 상처와 병에 써대다간, 병으로 죽는 것보다 오히려 더 빨리 죽을 수 있어. 명심하거라.”
“네, 아바마마.”
“절대로 안 쓰겠습니다, 아바마마.”
막내만 불퉁한 얼굴로 대답을 안 했다. 죽음에 대한 인식이 아직 모자라니 남보다 특별한 제 힘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는데, 자레스가 냉정한 눈길로 쏘아보자 결국 아미르도 손을 들었다.
“…안 쓰겠습니다, 아바마마.”
그제야 자레스가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얼굴이 오히려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 쪼그라들었던 아이들의 어깨가 펴졌다.
“여동생의 이름은 제가 짓고 싶어요.”
첫째인 일리크가 입을 열자, 그제야 생각이 닿은 동생들이 앞 다퉈 손을 들었다.
“내가, 내가 지을 거야! 나 좋은 이름 지을 자신 있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이름을 지어줄 거야!”
“동생아. 겨우 네 살짜리가 알면 뭘 안다고 그러니. 작명은 이 작은 형한테 맡기렴.”
“그러는 너도 겨우 일곱 살이잖니.”
맏형답게 점잖게 타이르는 일리크 역시 동생들에게 절대 양보하지 않겠다는 경쟁심이 번뜩였다.
딸의 이름에 대해선 자레스도 이미 생각해 둔 바가 있었지만, 그는 피식 웃기만 했을 뿐 이 작은 소동을 그저 지켜만 봤다.
자기들끼리 입씨름을 하던 아들들은 결국 각자 이름을 열 개씩 정해 와서, 그 중에서 어머니의 선택을 받자는 나름 현명한 타협안을 냈고, 그러자 곧 사전을 뒤지기 위해 일제히 도서관을 향해 달려갔다.
“얼마나 든든한 황자들인지요, 앞으로도 카비르의 미래는 밝을 거예요.”
“저 철없는 것들이 든든하다고?”
샤이야의 칭찬에 자레스가 되물었다.
“폐하께서는 어린 황자님들한테 너무 엄격하세요. 어릴 적에 너무 고생을 하셔서 그런가 본데, 황자님들이 얼마나 똑똑하고 씩씩한지 폐하께서도 아셔야 해요.”
“아넬을 닮았다면 그렇겠지.”
“황자님들은 죄다 폐하를 닮았어요. 다들 잘 생겼고, 듬직하기도 하죠. 다행히도 황녀님은 황후마마를 닮아 아름다우시니, 다 두 분의 복입니다.”
“아들놈들은 만져봤으니 안다 치고, 이제 갓 태어난 이 아이가 황후를 닮은 건 어찌 아는 거지?”
“냄새를 보면 알아요, 폐하. 이렇게 달콤하고 예쁜 냄새는 황후마마 이후로 처음인 걸요. 제가 단언하는데, 황녀님은 황후마마 못지않은 미인이 되실 거예요.”
이럴 때 보면 사이야는 마치 예언자 같다.
그런데 실제로 사이야의 짐작은 틀린 적이 없었고, 그녀의 지혜는 항상 도움이 됐다.
딸이 아넬을 닮아 아름다워질 거라니, 아넬 앞이 아니면 잘 웃지 않는 자레스가 모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그대에게 상을 줘야겠군, 사이야.”
“당연한 걸 말했다고 상을 주시면 안 돼요, 폐하.”
“그럼 새 칭호를 내려야겠군. 진실의 수호자, 사이야.”
“감사히 받겠습니다, 폐하.”
빙긋 웃는 사이야의 눈이, 마치 앞이 보이는 것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
아이의 시간은 어른보다 훨씬 빠르게 지나갔다.
한 달 넘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딸은 어머니인 아넬의 풍성한 모유를 들이마시면서 점점 포동포동해졌고, 안 그래도 뚜렷하던 이목구비는 더욱 그녀를 닮아갔다.
여동생의 이름을 짓기 위해 오빠들이 매일 다른 이름을 들고 왔다.
자레스 역시 가끔 심각한 얼굴로 딸을 들여다보는 게, 내심 이름을 두고 자식들과 경쟁을 하는 게 틀림없었다.
서운하다 싶을 정도로 아들들에게 무심했던 자레스의 태도가 딸에게는 다른 걸 보면, 앞으로 그는 드러내고 딸을 편애할 게 틀림없어서 아넬은 벌써부터 걱정이 됐다.
“아넬.”
오전 회의를 마친 자레스가 점심을 틈 타 그녀를 찾아왔다.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던 아넬이 그가 나타나자 옷을 추스르려는 것을 자레스가 손을 저어 말렸다.
“보기 좋으니 가리지 마.”
“자레스.”
그의 눈이 번뜩이는 게 위험해보였다. 수유는 아이에게 생명을 나눠주는 신성한 일이건만, 자레스에겐 가슴을 드러낸 아넬의 모습이 다르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그 치고는 정말 오래 참긴 했지만, 지금 자레스를 자극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아넬은 굳이 수유를 멈추고 옷매무새를 다듬은 뒤 칭얼거리는 딸을 안았다.
“갓난아이도 다 알아들어요. 제발 이상한 말 좀 하지 말아요.”
“당신은 늘 나를 나쁜 남자로 만드는군.”
그게 불만인 것처럼, 자레스가 굳이 밀어내는 아넬을 무시한 채 그녀 곁에 앉았다.
이 정도쯤 인내심을 보였으면 칭찬을 좀 해줘도 될 것을, 아넬은 항상 그가 무한한 참을성을 가진 줄 안다.
맹세하건대, 자레스의 인내는 세계가 멸망할까 봐 아넬이 그를 밀어낼 때 다 바닥이 났다. 아넬도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지만, 그렇게 그를 고생시켰으니 아넬은 자레스에겐 더 관대해져야 하는 게 맞았다.
“스에반 님이 다섯 번째 부인을 맞았다면서요?”
“가장 얌전했던 놈이 여자는 제일 밝히고 있지.”
화제를 돌려봤지만 소용없었다. 여상하게 중얼거리면서도 자레스의 손이 아이의 등을 토닥이고 있는 아넬의 허리춤을 감쌌다.
“이러다 블로자 님이 들어오면 어쩌려고 그래요?”
거침없던 자레스의 손길이 잠시 멈칫한 걸 보면 그의 천적은 블로자가 맞긴 맞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자레스는 아넬에게서 아이를 뺏어 안으며 조금 더 그녀에게 밀착해 앉았다.
엄마를 뺏긴 아이가 더 칭얼거렸다. 그런데 울먹거릴 것 같았던 아이는 갑자기 조막만한 손을 들더니 아버지의 귀 뒤쪽을 만졌다.
“아웅.”
그곳은 5년 전 쯤, 자레스가 부상을 입었던 곳이었다.
타네시와의 전투에 나갔다가 말이 밟은 돌이 튀면서 귀 뒤쪽에 부딪쳤다. 자레스는 출혈을 참으며 계속해서 전투를 지휘했는데, 치료가 늦은 탓인지 그쪽에 입은 부상은 제대로 낫지 않고 그 뒤로도 통증이 남았다.
그런데 아이가 그 부분에 손을 대자 불현듯 욱신거리던 아픔이 사라졌다. 아넬이 한때 그에게 성력을 퍼부었을 때처럼 시원한 기운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팬 부분을 메꾸듯 상처를 지웠다.
“이런.”
이게 무슨 뜻인지를 알아챈 아넬과 자레스가 아연한 채 아이를 들여다봤다.
첫째 일리크 때보다 훨씬 강한 성력이었다.
아넬은 아이를 낳을수록 성력이 약해졌고, 아이들 역시 막내로 내려갈수록 성력이 낮았다. 그런데 딸은 예상을 벗어나 마치 아넬을 이은 것처럼 강력한 성력을 보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의미일까.
“…이 아이가 에포메니가 될까요?”
당대의 에포메니는 따로 있었다.
그런데 세상에 단 두 명밖에 없다는 칼리크의 후예는 점점 늘어나는 것만 같았다.
첫째 일리크를 낳았을 때, 아이가 성력을 보이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약해서 칼리크의 아이들이 더 늘어날 거란 예측은 하지 않았다.
아넬은 성력을 나눠준 것처럼 치유력이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에포메니가 힘을 쓸 때처럼 기력을 뺏기지는 않았다.
“내 몸은 괜찮아요.”
자레스가 불안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자 아넬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딸이 성력을 썼다 해도, 자레스가 입은 상처는 큰 부상이 아니라 아넬의 몸에도 별 영향이 없었고, 딸아이 역시 눈에 띄게 성장하진 않았다.
하지만 만약, 딸이 힘을 쓸 때마다 에포메니가 힘을 쓴 것과 같은 효과를 발휘한다면….
“설사 성력이 있다 해도 에포메니로 만들지는 않을 거야.”
자레스가 힘을 줘서 말했다.
“말귀를 알아들을 나이가 될 때까진 이 아이 앞에 아픈 사람은 절대 나타나지 않게 하겠어. 아이가 아프게 하지도 않을 거야.”
“불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자레스. 일리크 때도, 타니안과 아미르 때도 성력을 쓰지 않게 하면서 잘 키워냈잖아요.”
이럴 때는 자레스보다 아넬이 오히려 더 강하고 냉철했다.
힘을 이어받은 아이들이 성력을 쓰지 않으면 아이들도, 아넬도 별 변화가 없었다.
“칼리크의 힘은 한정돼 있어요. 힘을 이어받은 사람이 늘어나더라도 총량에는 변함이 없을 거예요.”
비록 아넬의 딸이 오빠들보다 훨씬 더 강한 힘을 가진 게 틀림없지만, 앞으로 그 힘이 더 강해질지 아니면 자랄수록 흐려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성력은 신이 준 은총이지만, 그게 아넬을 힘들게 한다면 자레스에겐 저주일 뿐이었고, 그건 자식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한 사람의 희생보다는, 그 희생을 만인이 나눠서 지는 게 나아.”
성녀의 힘에 기생하던 신관 조직은 붕괴됐고, 신전은 철저히 파괴됐다.
신관들이 에포메니를 찾는답시고 소녀의 팔다리를 자르고 독약을 먹인 증거를 보여주자, 카비르는 물론이고 아르드 전체에서 메타의 신관들에 대한 비난이 들끓었다.
그 뒤로 카비르는 물론이고 다른 나라에서도 신전 시험에 딸들을 내주지 않게 됐다.
그 뒤로 자연스럽게 에포메니 시험이 사라지면서, 이제는 신전의 힘은 예전과 비교도 되지 않게 약해졌는데, 아넬이 아이들에게 성력을 나눠준 덕분인지 스비야티 뒤로는 새 에포메니가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러고 보니 스비야티는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문득 생각이 나 아넬이 묻자 자레스가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주 잘 지내고 있어.”
그것도 지나치게 잘 지내고 있다. 한 해 전 ‘언니’를 만나고 싶다며 카라로 와서 미주알고주알 질문을 해대며 아넬을 괴롭히던 소녀를 떠올리자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아졌다.
스비야티는 한 번 나타났다 하면 아넬과 자레스의 시간을 너무 뺏었다. 부디 이번엔 그녀의 고민이 해결돼 다시는 두 사람 앞에 나타나지 않기만 바랄 뿐이었다.
***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있는 별장엔 황궁과 마찬가지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별장 앞의 퍼골라(Pergola. 편평한 지붕 위에 나무를 가로와 세로로 얹어 놓고 덩굴성 식물을 올려 만든 정자)에 앉은 일리파스와 스비야티 사이엔 그녀가 좋아하는 과즙 음료와 디저트가 놓여 있었다.
스비야티가 음료를 마시며 쉴 새 없이 떠드는 데 비해 일리파스는 그답지 않게 말이 없었다.
시종일관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바다 쪽만 바라보고 있는데, 그러다 스비야티가 잔을 딱 내려놓으며 그를 향해 물었다.
“어디 불편한 데 있어요?”
“아, 아니.”
사실은 ‘네 옷이 불편하다!’고 외치고 싶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여름용 카프탄 드레스는 가슴이 너무 깊게 파였다. 심지어 일부러 소매를 없애서 희고 가는 팔뚝이 고스란히 드러나 보였다.
얼굴에도, 몸에도 시선을 둘 데가 없어서 그녀와 만난 아침부터 일리파스는 계속해서 바다와 별장 건물을 쳐다보다 이윽고 퍼골라의 바닥에 잔 돌이 몇 개나 있나 세기 시작했다.
“아프지도 않은 사람이 왜 그렇게 기운이 없어요?”
“나 기운 많아.”
너무 팔팔해서 걱정이다. 특히 아래쪽이.
그는 이성을 거부한 채 제멋대로 날뛰는 제 본능에 저주를 퍼붓고 있는 중이었다.
스비야티는 올해로 열여덟이 됐다.
갈색머리는 허리까지 풍성하게 길어졌고, 또래보다 키가 크고 팔다리가 길쭉길쭉해져서 늘씬한 미녀가 됐다.
나이는 열여덟이지만 이미 성년이나 다름없는 몸이었다. 그런 상태로 제발 찾아오지 말라는 일리파스를 죽어라 따라다녔고, 일리파스는 또 막상 그녀가 찾아오면 못 이기고 스비야티를 만났다.
오늘처럼 명분이 있을 때는 더욱 그랬다.
“곧 제 생일인 건 아시죠?”
“그랬던가?”
“이미 알고 있는 거 다 알아요. 내가 열다섯이 되기 전까지는 항상 매년 챙겨줬잖아요.”
“…콜록!”
“나 원하는 선물이 있어요. 진짜로 갖고 싶은 거!”
이것까진 피할 수 없어서 일리파스가 어쩔 수 없이 반짝거리는 스비야티의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뭔데?”
“꼭 준다고 약속부터 해요.”
“너랑 약속 먼저 했다가 피 본 적이 너무 많아. 안 돼.”
“에이 이번엔 정말 별거 아니란 말이에요. 비싼 것도 아니고, 전하한테는 아주 손쉬운 선물이이에요.”
“그게 뭐길래 그래?”
“전하의 아이! 내 뱃속에 넣어주세요!”
“푸헉!”
막 포도 콤포스토(Komposto. 포도, 석류 등의 여름과일을 이용해 만드는 음료)를 입에 머금었던 일리파스가 음료수를 그대로 뿜었다. 흰 카프탄에 지울 수 없는 자줏빛 얼룩이 남았지만, 일리파스는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안 돼!”
“왜요? 어려운 것도 아니면서! 전하가 늘 하던 대로만 하면 돼요!”
“대체 몇 번을 얘기했냐? 넌 너무 어려! 겨우 열여덟 살이라고!”
“열여덟이면 결혼해도 되는 나이거든요? 게다가 몸은 적어도 스물다섯이라고요. 늦어도 너무 늦었죠!”
“늦은 건 나야! 제발 스비야티, 네 나이에 걸맞는 남자를 만나서 결혼해!”
그렇게 외친 일리파스가 자리를 박차고 별장 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스비야티의 고집 역시 대단했기 때문에, 그녀는 일리파스를 쫒아가 소맷자락을 잡고 늘어졌다.
“결혼해요, 결혼! 내가 하자고 하잖아!”
“안 돼!”
“내가 갖고 싶다는데 그것도 못 해줘? 꽃이나 목걸이는 잘만 사주면서!”
“그, 그거랑 아이랑 같냐?”
“혹시 내가 평민이라서 결혼 못 하겠다는 거예요?”
그 말에 일리파스가 멈칫 돌아섰다.
신전에서 에포메니 교육을 받지 않은 채 자유롭게 살아온 스비야티는 좋게 말해 지혜롭고, 나쁘게 말해 영악했다.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단순한 일리파스를 쥐고 흔드는 건 일도 아니었다.
단 5초 만에 구슬 같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자, 마음 약한 일리파스는 또 당황해서 거기에 잡혔다.
“그, 그건 아니다. 절대 아니야!”
“그럼 저랑 결혼 못할 이유가 없잖아요. 역시 스비가 천하기 때문이야.”
“아니라니까? 왜 자꾸 너 혼자 앞서 가냐?”
미치고 팔딱 뛰겠는 건 일리파스였다. 양심을 지키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하고 있건만, 스비야티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늘 철없는 소리만 지껄였다.
“후우, 스비야티. 너랑 나랑 열다섯 살 차이인 건 아냐?”
“그게 뭐 어때서요? 선황 폐하는 손녀뻘이랑 잘만 잤다던데, 열다섯 살 차이가 대수야?”
“스비야티! 너는 제발 그 말버릇부터 고쳐라. 다 큰 여자가 말투가 그게 뭐냐.”
“흥, 전 천한 평민이라 타고난 건 어쩔 수 없네요. 그래서, 말투를 고치면 저랑 결혼해주실 건가요?”
일리파스는 바짝 긴장했다.
그녀의 화법은 교묘해서 여기서 잘못 말을 꺼냈다간 또 스비야티에게 말려들게 된다. 일리파스는 아예 대답을 피한 채 별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돌아서는 그의 넓은 등을 보는 스비야티의 눈에서 진짜 눈물이 떨어졌다.
일리파스와 보낸 세월이 10년이었다.
그녀를 구해 준 영웅이자, 든든한 오라비이기도 했고, 나중엔 선망하는 이성이 돼버렸다. 그 오랜 시간 동안 그녀를 보살펴 줬으면서, 다른 남자를 눈에 담게 하지 못하게 했으면서 이렇게 도망치는 건 정말 비겁한 짓이다.
“결혼 안 해주면 오늘부터 밥 안 먹을 거야!”
오늘은 기필코 결판을 봐야 했다.
작심을 한 스비야티가 일리파스를 향해 외쳤다.
“뭐라고?”
일리파스가 드디어 돌아서자 그녀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
“혼인해 줄 때까지 밥 안 먹는다고요! 아니, 이제부터 숨 안 쉴 거야!”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왔다. 하지만 그냥 돌아서 가기엔 스비야티의 고집이 보통이 아닌 걸 알기에 일리파스는 자리를 떠나지 못한 채 어물어물 멈춰 섰다.
정말로 숨을 안 쉬기 시작했는지 그녀의 얼굴이 점점 빨개졌다. 붉은 색을 지나 파란색이 돼가는 걸 보자 다급해진 일리파스가 달려들어 그녀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야, 숨 쉬어! 숨 쉬라고!”
어지간하면 놀라서라도 호흡을 토해냈을 텐데, 단단히 작정한 스비야티는 다그침에도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일리파스의 손을 뿌리치고는 보라색으로 질려가기 시작했다. 진짜로 청을 안 들어주면 숨 막혀 죽을 모양이었다.
“독한 것!”
일리파스가 탄식했다.
물론 억지로 그녀를 흔들어 당장은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 기회를 넘겨도 스비야티는 언제 목을 매겠다고 협박을 할지 모른다.
그녀의 안위가 무기가 된다는 걸 알았으니, 이제 일리파스가 스비야티를 이길 방법은 없었다.
“내가 너무 오냐오냐 키웠지. 이렇게 말괄량이에 고집 센 여자로 자랄 줄은 몰랐다.”
“…….”
“그래, 하자! 혼인 하자고!”
“파아!”
그제야 스비야티가 숨을 내쉬었다. 보라색으로 변했던 안색이 원래대로 돌아오면서, 그녀의 얼굴에 벅찬 웃음이 떠올랐다.
“사랑해요!”
스비야티가 매달리면서 발을 치켜들었다. 그래도 일리파스가 워낙 커서 입술이 닿는 게 쉽지 않았지만, 이번엔 그가 먼저 다가왔다.
처음으로 겹친 입술이 오랫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스비야티에겐 첫키스라, 제가 덤벼놓고도 살짝 당황한 게 느껴졌지만, 일리파스는 단단하게 감은 팔을 풀어주지 않았다.
그녀의 허리를 잡아 뒤로 눕히다시피 한 채, 일리파스는 연신 스비야티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그가 얼마나 오래 참았는지 이 꼬맹이가 알긴 알까?
이 어린 소녀를 여자로 인식한 뒤로는 다른 여자는 안지도 못했다. 너무 자주 바뀐 게 문제였을 뿐, 일리파스는 한 번에 한 사람밖에 품지 못한다.
그런데 그 긴 세월을 스비야티만 마음에 품고 살았으니, 그 본능을 드러내면 이 맹랑한 여자도 겁이 나서 도망갈지도 모른다.
간신히 입술을 떼자 스비야티가 몽롱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일리파스가 처음으로 섞어 넣은 타액이 그녀를 미약처럼 중독시킨 것 같았다.
“무르기 없기다.”
오늘이 지나고 나면 후회할지 모른다. 그러기 전에 그에게도 이 맹세를 새겨넣어야 했다.
“으응.”
스비야티가 야릇한 미소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결혼을 약속받기 위해 10년을 고생했는데 무르다니, 그럴 리가.
“일리파스는 단순한 위인이야. 열여덟이 되면 그냥 몸으로 덮쳐. 그래도 고집을 부리면, 죽겠다고 협박을 해.”
자꾸만 아넬에게 찾아오는 스비야티를 떨궈내기 위해 지난해 자레스가 해줬던 충고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천진한 아넬에게 상담받던 것보다 훨씬 더 유익한 충고였다 생각하며 스비야티가 다시 한 번 일리파스에게 매달렸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맑은 바람이, 점점 서로에게 몰입해가는 두 사람을 향해 퍼골라에 얹어놓은 등나무 꽃향기를 실어 보냈다.
***
“배신자 유가가 칭제를 하였다 합니다.”
콘페란스에 참가한 외무 재상의 입에서 그런 보고가 나오자 바로 회의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타네시로 돌아간 유가는 국력이 약해진 틈을 나 타네시의 내부에 분란을 일으켰다.
아내와 가족 모두 버리고 타네시로 간 유가는 거기서 또 타네시의 왕녀와 결혼해 왕위 계승권을 얻었다.
그 뒤로 쭉 왕위를 놓고 타네시의 왕자와 다툼을 벌이다 끝내는 내란을 일으켰는데, 그 탓에 타네시는 세 쪽으로 갈라졌다.
그 중 타네시의 동쪽을 차지한 유가가 이번에 나라의 이름을 슬랑예라 정한 뒤, 자신이 슬랑예 제국의 황제임을 자처한 것이다.
“겨우 타네시의 동쪽 일부만 점령하고선 황제를 칭하다니, 개가 웃겠군. 그건 개집이지, 나라도 아니야.”
자레스가 코웃음을 치자, 재상들 사이에서도 폭소가 일어났다.
정작 유가가 일으킨 내란에서 가장 큰 득을 본 건 카비르였다. 내란을 틈 타 카비르가 타네시의 남서쪽을 차지하면서 제국의 국경은 더 확장됐다.
카비르가 타네시와의 연결로를 막는 바람에 고립된 볼타니아와 오르타는 결국 카비르의 속주(屬州. 어느 나라에 속해있는 주. 여기선 카비르 밖의 지배지역을 뜻한다.)가 되기를 자처했으니, 사실 상 유가 덕분에 두 나라를 다 차지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감히 카비르를 두고 칭제한 유가를 가만둬선 안 됩니다.”
“정벌을 해야지요. 이암 대장군이 아직 정정하니, 10만 대군을 편성해 타네시를 멸하셔야 합니다. 배신자의 말로가 어떤 건지, 본보기를 보여주시옵소서.”
재상들이 일제히 떠들었지만 자레스는 고개를 저었다.
궁지에 몰린 유가가 발악하면 결국 카비르 역시 결전을 각오해야 하는데, 자레스는 굳이 필요 없는 전투를 하고, 희생자를 내고 싶지 않았다.
누구보다 호전적일 것 같았던 그는 막상 황제가 된 뒤로는 직접적인 전투보단 우회책을 선택했다.
“전쟁은 피해야 하오. 카비르 군인의 피를 괜한 곳에 뿌릴 필요는 없소.”
“하오나, 폐하….”
“전쟁 대신 봉쇄령을 내리도록 하지. 슬랑예는 1대륙 북동쪽에 치우쳐 있어서 지금은 섬이나 마찬가지요. 3대륙은 카비르와 우호 관계를 맺고 있으니, 협조를 요청하면 슬랑예와의 무역을 중단할 거요.”
“서서히 말려 죽이는 작전입니까?”
“하지만 슬랑예도 나라인데 3대륙인들이 쉽게 무역을 포기할까요?”
“우리가 더 큰 시장이 돼주면 되오. 머지않아 다크신을 속주가 아니라 카비르로 병합시킬 예정이니, 3대륙은 카비르가 줄 이권을 두고 슬랑예와 손을 잡을 필요가 없소.”
“명안이십니다, 폐하. 3대륙은 교역을 거절하고 북쪽으로는 얼어붙은 바다밖에 없으니 슬랑예가 카비르를 피해 무역을 할 방법은 없겠군요.”
“그렇소. 그러다 보면 서서히 내부에서 불만이 터져 나오겠지. 애초에 외국인 황제를 좋아할 국민도 없으니, 자연스럽게 왕조는 교체될 거요.”
그게 자레스가 짐작하는 슬랑예의 미래이자, 유가의 말로였다.
고립된 슬랑예는 그러다 결국 카비르에 항복할 것이다. 그로서 타네시는 완전히 멸망하고 카비르는 더욱 커질 것이다.
황명이 내려지고 슬랑예에 대한 정책이 정해지자, 이번엔 내무 재상이 입을 열었다.
“샴 교의 세력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는데, 어찌해야 할런지요?”
“아, 나도 그 신흥 종교에 대해 들은 바가 있어요. 메타가 악신이고, 악신이라 여겨졌던 칼리크가 사실은 선신이라 주장한다지요?”
“그렇습니다. 우리 집 내실의 여자들도 느닷없이 그 종교에 물이 들어서는 아침마다 칼리크를 위해 기도한다고 난리를 피우더군요.”
“저도 들었습니다. 그 선신 칼리크 역시 메타와 함께 소멸했으며 이제 인간들의 시대가 시작됐으니, 인간들이 칼리크의 가르침을 따르며 선하게 살아야 악신 메타가 부활하지 않는다고 설교를 한다더군요.”
“폐하, 그런 허무맹랑한 주장을 하는 종교는 일찌감치 규제를 해야 합니다. 아무리 메타의 신관들이 대죄를 지었다 하나, 선과 악을 뒤집으려 애를 쓰다니요. 위험한 종교입니다.”
내무 재상이 안건을 올리자 다른 재상들 역시 여러 의견을 내놓았다.
대부분은 위험한 종교라는 내무 재상의 생각에 동의했지만, 자레스의 뜻은 달랐다.
메타의 신전 조직이 완전히 붕괴되면서 메타 자체도 점점 잊히고 있었다. 이쯤에서 슬슬 진실한 역사를 알려줘야 할 필요가 있었지만, 그걸 굳이 자레스가 떠맡을 필요는 없었다.
“근거를 알 수 없는 종교이니, 교주가 혹세무민하기 전에 처벌을 내려야 합니다.”
“…하지만 처벌할 근거도 없지 않소? 카비르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나라요.”
자레스가 황위에 즉위한 지 3년 째 되는 해에 그와 같은 칙령을 내렸다.
카비르는 사실 상 메타를 유일신처럼 믿는 나라였으나, 당장 다크신이나 아와드만 가도 다신교를 믿는 종교도 꽤 있었다.
대신들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정책이 아와드와 다크신을 포섭하기 위한 책략이라 봤지만, 자레스의 칙령은 사실 지금과 같은 상태를 유발하기 위함이었다.
“하오나 폐하!”
“카비르는 점점 더 강성해지고 여러 나라를 카비르 안에 복속시킬 것이오. 식민지마다 종교가 다를 텐데, 그들을 모두 강제로 개종시킬 생각인가? 괜히 종교 싸움을 일으켰다간 필요 없는 반발만 부를 뿐이오.”
자레스가 못을 박았다.
“칙령이 발표된 이후로 이미 샴 교 말고도 여러 종교가 난립하고 있다. 그런데 굳이 샴 교만 배척해야 할 근거가 있는가?”
굳이 말하면 카비르의 전통을 정면으로 부정한다는 문제가 있긴 했지만, 자레스는 한 번 결정한 사항에 대해선 여간해선 물러나지 않았다.
어지간하면 콘페란스의 여론을 반영했지만, 그가 안 된다고 정한 일에는 괜히 반항해봤자 피만 부를 뿐이었다.
자레스가 인상을 쓰며 반말을 하기 시작한 게 그 증거였다.
심지어 황제의 의견이 그른 것도 아니지 않은가. 재상들은 결국 고개를 끄덕여 찬성을 표했다.
“하긴 얼마 전엔 예니센 대장인 무하립 님 역시 샴 교에 귀의했다 들었습니다. 그 정도면 사이비는 아닌 게지요?”
“예니센들은 물론이고 신흥 귀족들 역시 많이들 믿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마디나에 첫 신전을 세울 계획으로 자금을 모으고 있다 하던데, 그 정도면 큰 교단으로 성장할 수도 있겠습니다.”
종교도 일종의 유행이었다.
자레스의 최측근인 무하립이 샴 교를 믿기 시작했고, 자레스가 그를 인정했으니 이제 머지않아 샴 교의 교세는 불 일 듯 일어나서 메타를 대신하게 될 것이다.
***
점심이 끝나고 시작된 회의는 오후 네 시가 돼서야 파했다.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휴게실로 가자,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퀴나에가 일어나며 허리를 숙였는데, 자레스는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다 문득 말했다.
“너는 어째 나이가 들지 않느냐?”
“저도 사람인데 그럴 리가 있겠어요? 제 나이가 벌써 서른셋입니다, 서른셋.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해요.”
“누가 봐도 스물도 안 먹은 미소년으로 보인다. 요괴 같은 놈.”
“헤, 정말 스무 살로 보이나요? 호호, 2대륙에서 구한 미안수가 도움이 되긴 하나 보네요. 아하핫.”
“일리파스한테 주면 환장하겠군. 요즘 젊어 보이고 싶어서 안달이 났으니.”
“그 시커먼 위인은 뭘 발라도 소용없어요. 그나저나 저는 왜 부르신 겁니까? 설마 제 피부 관리 요령을 알고 싶어서 부르신 건 아니죠?”
“딸아이의 명명식을 준비하거라.”
그제야 자레스가 본론을 꺼냈지만, 퀴나에는 눈만 뜨악하게 떴을 뿐 그러겠다는 답을 하지 않았다.
“명명식은 태어난 지 1년이 지나야 하는 건데요? 황녀님은 이제 겨우 7개월째입니다만?”
“성력을 이은 내 딸이 죽을 리가 없잖아. 굳이 1년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하긴 그러네요. 전통을 파괴하는 데는 늘 앞장서시는 폐하시니, 이번에도 귀족들이 수군대는 걸 막는 건 제 몫이겠죠? 왜 사고는 폐하가 치시고 수습은 제 차지일까요?”
“그러라고 너를 데리고 있는 거다. 그러라고 너를 궁정 재상으로 임명한 거고.”
예전엔 없던 특별 재상직을 따로 만든 건 퀴나에 같은 자를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황궁의 내정과 외정을 모두 관장하는 관리이자 황제의 비밀 특명을 수행할 수 있는 지밀 심복. 그게 퀴나에의 현재였다.
그때 황제의 또 다른 최측근인 무하립이 노크와 함께 들어왔다.
“폐하. 아프탈 공이 알현을 청하였습니다.”
아프탈은 무칼라스의 귀족명이었다.
자레스의 직속 호위대장에서 아와드 총독으로 임명된 무칼라스는 그와 함께 아프탈이라는 가문의 이름을 새로 하사 받았다.
아프탈은 카비르에선 ‘바보’라는 뜻도 있었는데, 카비르 어에 약한 무칼라스는 뜻도 모른 채 새 이름을 좋아해서 그 이름을 추천한 퀴나에를 폭소하게 만들었었다.
“바보 공이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퀴나에가 비실거리며 중얼거리자 무하립이 못들은 척 무시했다.
“들라하라고 할까요, 폐하?”
“나도 숨은 좀 돌려야겠으니 차 한 잔 마시고 들어오라고 전하게.”
“명 받들겠습니다, 폐하.”
그러고 무하립이 나가는 것을, 퀴나에가 빤히 쳐다봤다.
무하립은 그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자레스에게 용건만 전달했을 뿐, 퀴나에를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궁에서 자주 마주치는 사이이니, 굳이 인사를 하지 않아도 이상할 것 없었는데 오늘따라 섭섭했다.
뒤태까지 훤칠한 그의 등짝을 바라보며 퀴나에가 중얼거렸다.
“저 인간은 여자를 싫어하는 걸까요? 왜 저 나이가 되도록 결혼을 하지 않을까요?”
“…여자도 남자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더군. 그냥 신념을 지키는 것 말고는 인생에 낙을 모르는 자야. 네가 많이 노력해야겠구나, 퀴나에.”
“예, 많이 노력… 뭐, 뭐, 뭐라고요?”
무심코 대답하던 퀴나에가 펄쩍 뛰었고, 뺀질뺀질 대답을 잘하던 그 입이 수선스럽게 돌아갔다.
“아휴휴, 무슨 큰일 날 소리를 하세요? 카비르에서 동성애는 사형입니다!”
“언제 적 이야기를 하는 거야. 이미 10년 전에 폐지한 법률이다. 네 매력이 모자란 걸 핑계대지 마라, 하키르의 아들 퀴나에.”
알고는 있다. 하지만 모든 관용에는 부작용도 따르는 법이었다. 법을 폐지했다고 해서 음지에 숨어있던 소수자들이 양지로 기어 나오지는 않았고, 대신 남성 전용 창관만 유행하게 됐다.
여전히 카비르에서 동성애는 드러낼 수 없는 성향이었다.
퀴나에는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제가 지방에 영주 자리 하나라도 꿰차면 절 보는 눈이 좀 달라질까요?”
“무하립은 이미 어지간한 영주 몫을 하고 있다. 조만간 너에게도, 무하립에게도 영지가 내려질 거야. 크기는 비슷할 거고.”
“줄 거면 절 좀 더 주시죠. 제 땅이 좀 더 크면 무하립이 넘어와 줄지 알아요?”
퀴나에가 시무룩해져서 종알거리자 자레스가 독설을 날렸다.
“그가 겨우 재산과 권력에 넘어올 거라 생각하나? 만약 그런 거면 네가 아니라 나한테 반했어야지.”
“우리 폐하는 어쩜 그리 예쁜 말만 하시는지.”
“뭘 그리 망설이는 거냐, 퀴나에. 재력이나 권력을 과시하는 걸 그렇게 꼴 보기 싫어하더니 지금 이 꼴이 뭐야? 왜 이리 자신감이 없어진 거냐?”
“…….”
“13년이면 시간이 지나도 너무 지났다. 더 늦기 전에 잡아. 이러고 넋 놓고 있다 무하립이 샴 교의 신관이라도 되면 그땐 더 기회도 없어.”
갑자기 퀴나에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가 이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신관을 유혹하는 것도 재밌을 것 같긴 하네요.”
“신관은 결혼하면 안 된다고 신전법이라도 새로 만들어줄까?”
“아뇨! 그 전에 어떻게든 해볼래요!”
단호하게 내뱉은 퀴나에가 바로 몸을 돌리더니 무례하게도 황제에게 등을 보이며 문을 박차고 나갔다.
자레스가 닫힌 문 뒤로 낄낄거리며 웃음을 터뜨렸지만, 퀴나에는 못 들은 척 회랑 저 멀리로 사라져가는 무하립을 뒤쫓아 갔다.
“무하립!”
퀴나에가 부르자 그가 뒤를 돌아보며 멈춰섰다.
늘 느끼는 거지만 참으로 목석같은 얼굴이다.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기둥처럼 서서 그를 쳐다보는 모습에 퀴나에는 모처럼 불러일으킨 용기가 빠르게 꺼지는 걸 느꼈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한참을 기다려도 퀴나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무하립이 물었다.
“그게….”
“용건이 생각나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천천히 말씀하십시오.”
이 인간은, 어쩜 이럴 때까지 온유한지.
매사에 뾰족뾰족한 자신과는 너무 다르다.
그래서 결국 용기를 냈다. 머리끝까지 빨개졌다가, 발끝까지 도로 하얗게 변한 퀴나에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 그, 그… 혹시 셰르베트(Şerbet. 샤벳) 좋아해요?”
“…싫어하진 않습니다.”
빈말로라도 그냥 좋아한다고 해주지, 하여간 융통성이 없는 위인이다. 어쩌다 이런 남자를 좋아하게 됐는지.
“사실은 아직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아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카베에는 갈 겨를도 없고 해서 말입니다.”
“잘 됐다! 그럼 이번 휴일에 나랑 새로 생긴 셰르베트 집에 가볼래요?”
무하립이 진짜 기둥처럼 굳었다. 아무리 연애 한 번 안해 본 그라도, 이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았다.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정말 기이한 눈빛으로 퀴나에를 바라봤는데, 퀴나에는 무표정 속에 숨은 진심을 찾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다해가며 그를 살폈다.
대답을 기다리는 시간이 정말 영원 같았다.
하지만 좋든 싫든 그는 입을 열 것이다.
너무 진지해서 상대가 누구든 무시하지 못하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좋아하는 거니까.
퀴나에는 영겁의 시간 같은 그 잠시 동안을 견디며, 무하립의 대답을 기다렸다.
***
“퀴나에, 무하립 꼬시는 거 봤다.”
무칼라스는 알현실에 들어오자마자 그 말부터 했다.
저 인간은 과연 아둔한 위인이 맞는 걸까, 10년이 지난 지금도 카비르 어가 서툴다면서 반말을 찍찍 갈겨대는 걸 보면 그 반대인 것 같긴 한데.
“모르는 척하게.”
“퀴나에, 무하립이랑 결혼하나?”
“아와드는 어떨지 몰라도 카비르엔 아직 동성 간 혼인을 인정하는 법은 없네.”
“아와드! 카비르의 땅 많이 늘렸다! 무칼라스, 열심히 일했다!”
아와드 총독으로 부임한 무칼라스는 총독 직무를 수행하는 동안 식민지 인근의 귀메시 부족과 자탄니 부족을 복속시켰다.
특히 귀메시 부족은 아와드 동부에서 가장 큰 부족이었기에, 비록 황야에 가까운 땅이긴 해도 카비르의 식민지는 이전에 비해 두 배나 더 넓어졌다.
무칼라스가 자랑스러워 할 만 했다.
“그대의 공이 크네, 아와드 총독. 상으로 아와드 안에 아프탈의 영지를 더 늘려주도록 하지. 복속한 부족 중 자탄니의 땅 일부를 그대에게 내리겠네.”
“은혜가 감사한다, 폐하.”
“그래, 이미 자탄니와 귀메시가 항복한 건 짐도 알고 있는 사실이고, 일부러 그걸 알리려고 카비르까지 온 이유는 뭔가, 무칼라스?”
그의 물음에 무칼라스가 새카만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여섯 번째 부인 아들 낳았다.”
“저번에만 해도 다섯이더니 그새 또 아내를 맞았나?”
무칼라스는 늦은 나이까지 혼인을 안 하더니, 아와드에 총독으로 간 이후로는 한꺼번에 아와드 인 아내를 넷이나 맞았다.
이어서 다섯 번째를 들이더니 그 짧은 사이에 또 여섯 째 아내까지 들였나보다.
카비르는 황제인 자레스가 황후 외에 후궁을 보지 않으니 서서히 정식 부인 하나만 두는 추세로 바뀌고 있었는데, 아와드는 그 반대였다.
“그런데 아들 하나 아니다. 둘째, 셋째도 또 아들 낳았다. 넷째는 딸을 낳았다.”
“한꺼번에 자식이 넷이나 생겼다고?”
자레스의 물음에 무칼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아내를 공평하게 안았다는 뜻인데, 임신까지 동시에 시킬 줄이야. 대단하다, 무칼라스.
“부인들, 질투가 너무 심하다. 나 너무 머리 아프다.”
투기를 잠재우려 모두 안아줬는데, 그건 그것대로 또 다툼을 불렀다. 무칼라스의 아내들은 자기 자식을 더 총애해달라며 그를 몹시 괴롭혔던 모양이었다.
“나 집에 돌아가기 싫다. 여자들, 지긋지긋하다.”
“…알만 하군. 그래, 온 김에 한 두어 달 푹 쉬게. 카비르 안에도 아프탈의 영지가 있으니 한 번 둘러보는 것도 좋을 거야.”
“그 이름도 싫다! 나 아프탈 말고 다른 성 받고 싶다!”
“이제 와서 왜?”
“나, 바보 아니다! 아프탈, 바보다!”
무슨 뜻인지 알아먹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 바보 공이 드디어 아프탈의 뜻을 알아챘나 본데, 왜 아프탈의 뜻은 알면서 존대어는 못하는지 이상했다.
한동안 물끄러미 씩씩거리는 무칼라스를 쳐다보던 자레스가 갑자기 물었다.
“자네는 카비르 어를 안 하는 건가, 못 하는 건가?”
10년 넘는 세월동안 그도 궁금하던 차였다. 하지만 무칼라스는 대답은 하지 않은 채 어물어물 자레스의 시선을 피했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듣겠다.”
“…안 하는 거로군.”
“카비르 어 너무 어렵다! 아와드 가니까 더 잊어버렸다!”
이젠 그냥 우기기로 했나 보다. 우습지도 않았다.
“그 정도면 그냥 아프탈의 무칼라스로 살게.”
“그건 싫다!”
“그럼 황족 능멸죄로 목을 벨까?”
무칼라스의 두터운 입이 굳게 다물렸다. 노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딴 짓을 하는 게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
그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무칼라스, 볼 일이 생각났다.”
“카비르 어 교사를 만나러 가는 거면 좋겠군.”
“카비르 어 어렵다! 나는 못 배운다!”
“어련하겠나.”
입아귀를 비틀며 빈정대는 자레스를 뒤로 하고 무칼라스가 나가버렸다.
자레스는 슬슬 두통이 밀려오기 시작해 이마를 짚으며 팔걸이에 상체를 기댔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 나한테만 몰려와서 투덜대는군.”
충고나 중재는 그의 성미에 영 맞지 않았다. 그건 아넬이 전문인데, 그나마 그녀를 사랑하다보니 그도 점점 아넬과 닮아가는 것 같다.
생각난 김에 아넬이 보고 싶어져서, 자레스는 일어나 본궁으로 향했다.
***
그 시간, 아넬은 또다시 몰려온 세 아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오후 시간엔 각자의 공부가 끝나면 휴식 시간을 갖는데 아들들은 그 소중한 시간을 동생을 보는 데 썼다.
“이 아이는 언제쯤 일어나서 걸어요?”
“글쎄, 내년 초쯤이면 걷지 않을까?”
“말은 언제 할까요? 얼른 오빠라고 불러줬으면 좋겠어요.”
“그건 좀 기다려야겠네. 타니안은 오빠라고 불리는 게 좋은가 보구나.”
“형은 지겨워요!”
“나도, 나도! 나 여동생 좋아!”
둘째 타니안과 막내 아미르가 서로 남동생과 형은 지겹다고 아웅다웅하는 모습을, 첫째 일리크가 한심한 눈으로 지켜봤다.
열두 살이면 아넬이 보기엔 여전히 어린아이였지만, 일리크는 본인이 이미 어른이 됐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 모습도 귀여워서 아넬이 웃음을 흘리자, 세 아들이 갑자기 싸움을 멈추고는 황홀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어마마마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우세요.”
“맞아. 어마마마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아요. 아니, 천사보다 더 예쁠 거야.”
“칭찬이 너무 과하네. 진짜 천사님들이 들으면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인 걸! 아미르는 어마마마가 제일 좋아요!”
“설마 예뻐서 좋은 건 아니지? 나보다 아름다운 여자는 세상에 많아요.”
“아니요, 어마마마는… 예쁘기도 하지만 상냥하시고, 또 착하시고, 또… 또, 하여튼 다 좋아요!”
아넬은 여느 황족과 달랐다. 아이들을 황자로서 키우기 보단 평범한 가정의 아들들처럼 대했는데, 그래서일까 세 아이들은 유난히 아넬에게 매달렸다.
어쩌면 아버지인 자레스는 너무 엄격해서 멀게만 느껴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 맞다! 나 새 이름을 지어왔어요!”
“내가 먼저 말할 거야. 시세크! 엘마! 예실! 이 중에 골라주세요!”
“다 별로야. 어마마마, 뤼얄르란 이름은 어때요?”
“크흠. 어마마마, 저는 메이베란 이름을 지어왔습니다.”
그나마 점잖았던 일리크까지 끼어들면서 오늘도 황녀의 이름 짓기 전쟁이 벌어졌다.
“어머나, 다 너무 좋아서 어느 걸 골라야 할지 모르겠구나.”
정작 딸아이의 이름은 이미 자레스가 정해둔 게 있었기에, 아넬은 어떻게 거절해야할지 몰라 난감했다.
자레스 역시 딸에 대해서는 양보할 생각이 없어서, 어린 아들들에게도 져주질 않았다.
사이에 낀 아넬만 곤란한 상황이었는데, 마침 블로자가 나타나 뵈러 온 사람이 있다는 걸 알렸다.
“아쉬갈 님께서 오셨습니다.”
자레스의 마지막 동생이자 아넬에겐 가장 아픈 손가락.
황제도 그렇지만 황후를 만나는 건 더 쉽지 않았지만, 아쉬갈은 늘 알현 신청도 없이 나타나도 아넬이 반갑게 맞이했다.
그가 아넬과 아이들이 있는 내실로 들어서자 세 아들이 반갑게 그를 맞았다.
“숙부님!”
“숙부님, 마침 잘 오셨어요. 저희가 지은 이름 중에 가장 좋은 걸 골라주세요!”
“황자들아, 숙부님께 그런 부담을 지우면 안 될 것 같은데요?”
관계는 숙부였지만 아쉬갈과 첫째 일리크는 나이 차가 얼마 나지도 않아서 형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쉬갈과 자주 만나기도 했기 때문에 그를 대하는 황자들의 태도는 스스럼이 없었다.
“음, 이름이라면 나도 생각해 둔 것이 있어서 너희들이랑 경쟁해야 할 것 같구나. 미안하다.”
아쉬갈이 웃으며 그리 말하자 아넬이 바로 물었다.
“황녀의 이름을 지어주시려고요?”
“네. 황후마마께서 싫어하시지 않으신다면….”
“그럴 리가 있겠어요. 시숙님께서 주신 이름이라면 기쁘게 받아야지요.”
아넬이 환하게 웃으며 묻자 아쉬갈의 얼굴이 붉어졌다. 숨은 가빠지고, 머리가 어질어질한 것 같았다. 아넬의 앞에만 서면 늘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그를 감추기 위해 되도록 만나지 않으려 했지만, 버티다 버티다 기갈이 나서 못 견딜 지경이 되면 결국은 이렇게 핑계를 대서라도 찾아오게 된다.
“파라샤, 란 이름을 생각했습니다. 황녀의 이름으로는 무척 소박합니다만.”
“파라샤…. 나비란 뜻이군요. 곱고 아름답네요.”
그 이름을 읊조린 아넬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정말 좋은 이름이에요. 감사해요, 아쉬갈 님.”
“받아 주시렵니까?”
“물론이지요. 아쉬갈 님이 지어주신 이름인데 소중히 간직했다 명명식에서 카비르 전체에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아쉬갈 님이 지어주셨다는 것도 알려야지요.”
“…….”
그렇게 말하며 상냥하게 웃는 아넬의 얼굴을 아쉬갈이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느새 아넬의 주의는 그를 떠나 자꾸 자기들을 봐달라 채근해대는 아들들에게로 향했다.
그게 섭섭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를 신경 쓰지 않는 틈을 타 마음껏 아넬을 바라볼 수 있어 좋았다.
이렇게 평생 곁에서 지켜보는 것만이라도 할 수 있다면….
“뭘 그리 쳐다 보느냐.”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아쉬갈이 흠칫 놀라 뒤를 쳐다봤다. 언제 들어왔는지 자레스가 거기에 서서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은 항상 자신을 심문하는 듯했다. 실제로도 찔리는 게 있었기 때문에, 아쉬갈은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아,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 그냥 아이들이 귀여워서….”
“조카들을 귀여워해주니 내가 다 고맙구나.”
“숙부로서 당연한 것이지요. 지금껏 저를 돌봐주신 폐하의 은혜를 봐서라도, 앞으로도 황자들에게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흐음.”
그에는 별 관심 없다는 듯 자레스가 시큰둥한 얼굴로 아쉬갈을 들여다봤다.
어째선지 몰라도 자레스가 그런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면 아쉬갈의 뱃속에선 시커먼 기운이 불쑥 치미는 것 같았다.
분노, 혐오, 또는 두려움.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이 한꺼번에 엉기면서 머릿속이 진흙탕이 되는 기분이었다.
아넬을 향한 감정과는 천지차이여서, 아쉬갈은 그런 이유로 되도록 자레스와 마주치는 건 피하려 애썼다.
하지만 아넬을 바라보는 한, 자레스를 만나는 것도 어쩔 수 없다. 황후의 곁에는 황제인 자레스가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붙었으니까.
“요즘은 악몽을 꾸는 일이 없느냐?”
“예전보단 줄었습니다, 폐하. 다 성녀님…. 아니 황후마마가 붙여주신 스승님 덕분입니다.”
“다크신에서 왔다는 그 현자 말이냐.”
“네, 그분이 가르쳐 주신대로 명상을 수행했더니 많이 좋아졌습니다.”
“다행이구나.”
잠시 말을 끊었던 자레스가 돌연 물었다.
“조만간 너도 혼인을 해야지?”
“네?”
아넬에 대한 그의 불미스러운 감정을 알아챈 걸까?
갑자기 두려워져서 아쉬갈이 자레스의 눈치를 살폈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의 냉랭한 얼굴에선 진심을 알아내는 게 어려웠다.
그를 싫어하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하는 것도 같았다.
좋아하지 않는 건 분명한데, 다른 형제들과 달리 직접 궁에 들여 보살펴줬고 황족으로서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도록 지원도 해줬다.
어쩐지 그게 동생에 대한 애정만은 아닌 것 같아서, 아쉬갈은 늘 그가 불편했다.
“전 아직 어립니다, 폐하.”
“스에반도 열다섯에 첫 아내를 맞았다. 혼인은 나중에 하더라도 슬슬 혼처를 알아봐야지.”
“아닙니다. 그러기엔 제가 아직 어리숙합니다. 마음만은 감사합니다, 폐하.”
아쉬갈이 좋게 거절했지만, 자레스는 이번만은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의표를 찌르며 아쉬갈을 기습했다.
“황후를 닮은 여자라면 너도 좋아하겠느냐?”
“네?”
흠칫 놀란 아쉬갈이 그를 쳐다보자, 자레스가 눈을 더욱 가늘게 뜨며 아쉬갈의 반응을 지켜봤다.
알아챘다. 들킨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황후에게 관심을 보이는 남자에게는 피도 눈물도 없는 자레스가 왜 알면서도 그를 봐주고 있는 걸까?
턱도 없어서? 그에게 전혀 위협감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또 시커먼 것이 일렁였다. 평소보다 더 커진 검은 기운이 뱃속을 넘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점령하면서 몸 전체가 차가워지는 기분이었다.
“…그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라면 저도 기쁠 따름이지요.”
간신히 자신을 진정시키며 대답하자, 자레스가 빈정거리는 투로 되물었다.
“황후를 닮아야만 받아들이겠다?”
“그, 그런 건 아닙니다!”
목소리가 높아지자 비로소 아이들의 어리광을 받아주느라 자레스가 온 걸 알아차리지 못했던 아넬이 두 사람 쪽을 돌아봤다.
두 사람의 표정을 보니, 누가 누구를 강박하고 있는지 바로 알 것 같았다.
자레스의 지독한 소유욕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지만, 아쉬갈에 한해서는 조금 더 그 감정이 복잡해진다.
적당한 때에 그녀가 끼어들지 않으면, 둘 다 위험해졌다.
“아쉬갈 님, 이번 기회에 여행을 해보지 않으시겠어요?”
“여행이라고요?”
“네, 아쉬갈 님께서는 이 카라를 거의 벗어나본 적이 없으시니, 이번 기회에 카비르 바깥을 여행해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아쉬갈은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자레스가 어서 허락하라는 것처럼 옆에서 노려보고 있었지만, 어쩐지 쫓겨나는 듯한 기분이 들어 그러겠다 말할 수가 없었다.
“제가 황후마마 곁에 있는 게 불편하십니까? 폐하가 신경 쓰여서 그러신 건가요?”
갑자기 그런 물음이 튀어나왔다.
그런 말을 한 아쉬갈도 깜짝 놀라 입을 다무는 순간 곁에서 자레스의 웃음이 튀어나왔다.
“푸핫!”
자레스의 비소는 날카롭고 썼다.
정말 가당찮다는 눈으로 아쉬갈을 쳐다본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네가 불편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쉬갈.”
“…….”
“황후의 눈에 너 같은 애송이가 들어올 것 같으냐? 나를 그리 우습게보지 말아라.”
“자레스!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아넬이 말렸지만, 아쉬갈은 자레스의 독설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는 왜소한데다 실권도 없는 어린 황족일 뿐이었다.
자레스가 황제가 아니었어도, 외모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그를 능가할 수는 없다. 새삼 그 사실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아쉬갈 님, 시숙님을 쫓아내려는 게 아니에요. 아쉬갈 님의 스승이신 디안 님의 고향을 돌아보면 아쉬갈 님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가요.”
“옛 다크신 땅에는 희귀한 유적과 보물들이 많아요. 카비르와 다른 깊이가 있으니, 다크신을 돌아보면 아쉬갈 님도 많이 성숙해질 겁니다. 나간 김에 다른 대륙을 여행하셔도 좋고요.”
“황후의 말이 맞다.”
자레스가 바로 역성을 들었다.
아쉬갈은 그에게 동생이라기보다는 메타의 싹을 품고 있는 위험요소로만 보였기 때문에, 눈엣가시 같은 그를 멀리 보낼 수 있다면 자레스로서도 나쁠 게 없었다.
“아쉬갈 님. 저는 아쉬갈 님을 믿어요.”
아넬이 그의 마음을 안다는 것처럼 아쉬갈의 손을 잡았다. 대번에 자레스의 눈이 가늘어졌지만, 아넬은 오늘만큼은 그의 질투를 무시하기로 했다.
“아쉬갈 님 안에 있는 부정적인 감정을 분노로 승화시키지 마세요. 아쉬갈 님은 지혜롭고 현명하시니, 언젠가는 제 마음을 완전히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을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아넬 역시 그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아쉬갈은 그 순간 알아챘다.
하지만 권유를 가장한 거절에도 아쉬갈은 스르르 마음이 녹았다.
어차피 보답 받을 수 없는 감정이 아니던가. 게다가 아넬은 그를 피하지 않았다. 어색해하며 거절하지도 않았고, 기분 나쁜 듯이 취급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를 걱정해주는 아넬이 고마워서 아쉬갈은 정말로 몸을 채운 시커먼 기운이 빛에 녹아 사라지는 듯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대답할 수 있었다.
아쉬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아넬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황후마마. 여행… 잘 다녀오겠습니다.”
“궁정 재상에게 명해서 여행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불편한 점이 하나도 없도록 신경 쓸 테니 마음 놓고 여행을 즐겨주세요.”
“네, 네…. 많이 배우고 돌아오겠습니다. 그리고 돌아올 때는 더 마음이 넓은 사람 돼서 나타나겠습니다.”
그 말을 남긴 아쉬갈이 곧 내실을 빠져나갔다.
아쉬갈이 사라지고, 황자들마저 블로자에게 끌려 나간 뒤, 자레스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아직 수상한 기색은 없나?”
“아쉬갈 님을 믿는다고 했잖아요. 자레스, 사람은 믿어주는 대로 자라나는 거예요.”
“흠. 여행하다가 아무 여자나 안았다가 씨를 퍼뜨리면 안 될 텐데.”
“그렇게 되면 그것도 운명이겠지요. 설사 그렇게 된다 해도 메타의 힘 역시 우리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세대를 지나면서 점점 흐려질 거예요.”
“황녀처럼 갑자기 진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황녀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또 힘이 약해질지도 몰라요. 아쉬갈 님의 자식도 그럴지도 모르고요. 자레스, 확실한 건 아무 것도 없어요. 우리는 믿음을 갖고 기다려야 해요.”
“그렇군.”
그 말과 함께 갑자기 자레스가 씨익 웃었다.
“역시 아쉬갈보다 내가 먼저 아이를 만들면 되는 거지. 더 많이, 더 빨리.”
이야기가 어떻게 그렇게 틀어지지?
낌새를 알아챈 아넬이 외마디 고함을 질렀다.
“자레스!”
“너무 오래 참았어.”
“아, 아직 7개월밖에 안 지났어요!”
“그 전까지 합치면 무려 1년 반이야. 내 인생에 가장 많이 참아줬어.”
“하지만 지금은 대낮…, 아!”
자레스에게 팔목을 낚아채인 아넬이 그대로 내실과 연결된 침실로 끌려들어갔다.
늘 그렇듯 이럴 때는 눈치가 아주 빠른 시녀들이 재빨리 들어와 황녀를 안고 나갔고, 내실과 침실엔 이제 두 사람만 남았다.
실내 공기를 환기시키려 열어놓은 창문으로 또 바닷바람이 밀려들어왔다.
바람은 황궁을 한 바퀴 휩쓸고, 방향을 바꿔 내해를 줄달음쳐 대양으로 나갔다.
이제는 사라진 남과 북의 섬이 있던 바다를 훑다, 아라와트를 휩쓸고 그렇게 아르드를 살피다 이윽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세상은 평화로웠다.
언젠가 그 평화가 깨질 때가 오겠지만, 어쨌든 평화와 전쟁 모두 인간의 손으로 이뤄질 것이다.
시대는 새로운 세계를 향해 서서히 굴러가고 있었다.
<그에게 안기면 세계가 멸망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