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일리파스는 아직 작은 산마을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대신관 일당은 모조리 처단했지만, 그 뒤로도 독약을 먹은 스비야티가 몸을 회복하지 못한 탓이었다.
성력을 쓰면 아넬이 기력을 뺏기기 때문에 약으로만 치료했는데 그래서인지 치유가 무척 느려서 카라까지의 긴 여행을 감당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일리파스 님.”
탕제를 들고 들어간 의원이 나오자, 일리파스가 스비야티의 방을 기웃거렸다. 그를 발견한 소녀가 환한 웃음을 지어서 일리파스는 허락의 뜻인 걸 알고 침대로 다가갔다.
“몸은 좀 괜찮으냐?”
“네, 일리파스 님 덕분에요.”
스비야티가 배시시 웃었다.
어른들에게 몹시 상처를 입었던 소녀는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았었다.
하지만 일리파스와 그 일족들이 스비야티를 정성스럽게 돌봐 주면서, 그녀의 얼어붙은 감정도 조금씩 풀려서 이제는 그에게 많이 의지하게 됐다.
몸은 자랐지만 정신적으로는 사실상 다섯 살짜리 아이였다.
자기편이라고 생각하자 이제는 일리파스에 대한 경계는 없어졌다. 그 대신 다른 어른들에겐 더욱 철저하게 마음의 문을 닫아 버렸다.
어른들은 무서웠지만, 일리파스는 그를 구해준 영웅이었다.
스비야티는 이제 오직 그에게만 웃고, 그에게만 재잘거리며 떠들어 댔다.
“웃는 거 보니 많이 좋아졌나 보구나. 얼른 나아져서 카라로 가야 할 텐데, 좋아지고 있다니 다행이군.”
그의 말에 스비야티가 불이 꺼진 것처럼 갑자기 시무룩해졌다.
“저, 일리파스 님. 꼭 황궁에 가야 하나요?”
“싫으냐?”
“…….”
대답하지 않는 걸 보니 싫다는 뜻이다. 곤란하다.
“황실의 관리 밖에 있으면 신관들이 언제 또 노릴지 모른단 말이야. 내가 언제까지 네 곁에 있어 줄 수도 없고, 그러니 황궁에 들어가는 게 제일 안전해.”
“지켜 주신다고 했잖아요.”
“뭐?”
“저 구해 주실 때, 앞으로는 일리파스 님이 절 지켜 주신다고 했잖아요. 왜 이제 와서 말을 바꿔요?”
발딱 화를 내는 게 어이없다.
비록 황제에게 굴복하긴 했지만 그래도 카비르 황제의 황형(皇兄)인데, 이렇게 눈 부릅뜨고 또박또박 항의하는 걸 보니 귀여운 한편으로 신선하기도 했다.
“너 황제 앞에선 절대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라. 자레스 그 새… 아니, 황제 성격이 진짜 지랄 맞거든. 에포메니라고 해도 안 봐줄지도 몰라.”
“그렇게 무서운 사람한테 왜 보내려고 해요? 그냥 일리파스 님이 계속 스비를 지켜 주세요.”
“야, 나도 그러고 싶지만 일단 그것도 황제 놈의 허락을 받아야 돼. 그놈이 너를 만나 보지도 않고 그런 청을 허락해 줄 놈이 아니란 말이야.”
“진짜요? 그러면 황제가 허락만 해 주면 일리파스 님이 계속 곁에 있어 주시는 거죠?”
그제야 납득한 스비야티가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일리파스 님을 따라 황궁에 들어갈게요. 일리파스 님이 계신다면 어디든 따라갈 거예요.”
말하자면 스비야티는 지금 어미닭을 따르는 병아리 같은 상태였다.
한 번 그에게 각인이 되자, 일리파스밖에 보이지 않았고, 그가 없으면 또 누군가에게 해코지를 당할 것 같았다.
“허락해 주실 거죠?”
본래는 평민인 스비야티는 카비르의 황족인 일리파스에게 말도 붙일 수 없었다. 하지만 상처 입은 그녀가 불쌍했기에, 일리파스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까짓것, 영지는 뺏겼지만 부족의 땅으로 돌아가면 머물 곳은 많은데 뭐.’
이때만 해도 일리파스는 훗날 이 소녀가 그에게 맹목적인 짝사랑을 품게 될 줄은 몰랐다.
스비야티는 그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극성이었고, 신분의 차이는 물론이고 나이 차도 무시해버리는 맹랑한 여자로 자라나게 된다. 하지만 이건 먼 훗날의 이야기다.
***
5월의 중순. 군대가 아예 길을 비운 북부 지역을 돌파한 연합군이 마침내 뮤티셈에 들어섰다.
아직 카비르 중앙군이 뮤티셈에 도착하기 전이었다. 성안으로 들어가 농성을 시작한 뮤티셈 영주군을 향해 연합군이 대대적인 화공을 펼쳤다.
영원의 불을 단 불화살 수만 발이 성안으로 쏟아져 들어오자, 그에 맞서 뮤티셈 군 역시 불화살로 대응했다.
하지만 화력에서 뒤졌다. 뮤티셈 성 안에 대화재가 나면서 상당한 인명피해가 났다.
성문 역시 불이 붙었지만 뮤티셈 성주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성문 뒤에 미리 석축(石築)을 쌓아 둔 까닭에 영원의 불로는 당장 문을 돌파할 수 없게 됐다.
그 석축을 부수려 영원의 불을 단지째로 들고 공격하려 했지만, 방어 태세를 갖춘 성안 병사들이 연합군의 머리 위로 불붙은 단지들을 던졌기 때문에 공격은 여의치 않았다.
3일에 걸친 공방전 끝에 연합군은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제부터는 화력 싸움이다.”
군량 싸움이란 말은 하지 않았다. 군량이 겨우 일주일 치밖에 안 남았다는 건 군사들에겐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다음번 공격에 사활을 걸어서 어떻게든 뮤티셈을 불태우고 문을 열어야 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중앙군이 뮤티셈에 거의 다 다다른 즈음이었다.
전령에게서 지원 병력이 거의 도착했다는 전언을 들은 뮤티셈 영주는 죽음을 불사하고 성을 사수하기로 마음먹었다.
적어도 하루만 버티면 병력이 도착하고 그때부터는 해 볼 만한 싸움이 될 터였다.
하지만 그날 저녁 뜻밖의 황명이 다시 도착했다. 해상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하라스 강에서 내려 말을 타고 온 전령은 말에서 내리자마자 한 무릎을 꿇으며 황명을 전달했다.
“뮤티셈을 포기하고 길을 터 주라는 황명이십니다.”
“뭐라고?”
자레스가 미친 게 아닐까? 아니면 전령이 황명을 조작했든가.
호전적인 새 황제의 성격으론 있을 수 없는 명이었다. 하지만 전령이 밀랍으로 봉한 군령장에는 분명 어인이 찍혀 있었고, 전령이 전한 것과 같은 명령이 쓰여 있었다.
<전투를 포기하고 뮤티셈 성에서 물러나라. 길을 터 주겠다 하고 군량을 남기고 떠나면 유가 군이 그대들을 쫓지 않을 것이다.>
잠시 눈을 의심하던 뮤티셈 영주가 반문했다.
“폐하께선 왜 이런 명을 내리신 건가?”
“그것은 저도 이유를 알 수가…. 재상 회의에서 그리 결정 났다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카라까지 전혀 저항하지 말고 길을 터 주라 하셨습니다. 최후의 결전은 카라 근처에서 벌일 것이라고.”
“그러니까 왜? 충분히 물리칠 수 있는데 왜 카라 목전까지 길을 내주란 건가?”
카라는 지금 제국의 심장이었다. 카라에서 패배하면 수도가 점령되는 거다.
“나라를 조각내서 연합국에게 던져 줄 요량이 아니시면 왜 이런 명을 내리시냔 말이야!”
뮤티셈 영주는 당연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전령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폐하께서 작전이 있는 게 아닐까요? 카라에서 대결전을 펼쳐서 한 번에 연합군을 끝장내실 생각일지도 모르십니다.”
하지만 사실 그와 같은 황명을 내린 데는 이유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열흘 전, 북국 얼음의 섬에서 지진이 발생했다는 보고가 있었던 것이다.
그 지진은 정확히 연합군과 뮤티셈 군의 결전이 있었던 밤에 일어난 것이었다.
***
“지진이 일어났다고?”
“그러합니다, 전하. 현재 군선이 타네시 바다로 진입했는데 북쪽에서 심상치 않은 진동이 있고 강한 파도가 밀려왔다고 합니다.”
무하립이 보낸 캐러벨을 타고 날 듯이 달려온 전령은 그렇게 보고했다.
지진이 일어난 날은 유가 군과 뮤티셈 군의 첫 공방전이 있었던 날이었다. 아르드 전역에서 지진이 그리 드문 건 아니었지만, 북쪽은 지진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 지역이었다.
그런 곳에서 갑자기 심상치 않은 진동이라니, 그 시기가 묘하게 석연치 않았다.
“시기가 겹친 건 좀 묘합니다만, 그리 신경 쓸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재상들은 그렇게 여겼다.
어쩌면 그가 너무 신경을 쓴 탓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막 자레스가 뮤티셈에서의 결전을 명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돌연 시종장 샤이크가 들어왔다.
“폐하. 아실께서 급하게 전하실 말이 있다 하십니다.”
“아실이?”
샤이크가 더 목소리를 낮춰서 뭐라고 이르자 자레스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예정에 없는 일이었다.
아넬 스스로가 남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는 건 물론이고, 자레스 역시 그녀를 남자 앞에 내보이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그런데 그 아넬이 갑자기 회의에 참석하겠다고 청했다.
자레스는 대번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나중에 내가 내실로 가겠다고 전해라.”
“그게… 꼭 재상들이 있는 곳에서 말씀을 전하셔야 한다고 하시네요.”
샤이크도 당황스러운 듯했다. 아넬은 어지간해선 고집을 부리지 않는데, 이번만큼은 물러나지 않을 생각인 것 같았다.
자레스가 목소리를 낮춰 뭔가를 이르자 샤이크가 곧 나갔다. 하지만 잠시 뒤 돌아온 샤이크는 다시 아룄다.
“이미 콘페란스 앞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반드시 재상들과 폐하께 고하셔야겠다는데요. 연합군과의 전쟁에도 관련된 것이라서 꼭 말씀해야겠다 하십니다. 그… 메타 신과 관련된 일이라고.”
“메타라고?”
그 이름까지 나오면 예사로 넘길 일이 아니었다. 아넬은 칼리크의 성녀였고, 그렇다면 메타에 관해 뭔가 중요한 걸 알아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일단은 들어오시게 해.”
마땅치 않았지만 아넬을 회의실로 불러들였다.
재상 회의는 남자들만 참여했고, 여자는 들이는 법이 없다.
하지만 황제의 부름이었기에 재상들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는데, 나타난 아넬의 모습에 재상들은 물론이고 자레스도 경악하고 말았다.
아넬은 베일을 쓰고 있지 않았다.
눈부신 외모를 그대로 드러낸 체, 아넬이 걸어 들어와서 자레스의 곁에 섰다.
“대체 왜….”
회의에 불러들인 것만 해도 용단을 내린 건데 무슨 생각으로 얼굴을 드러낸 걸까. 자레스는 화가 난 나머지 오히려 말을 잇지 못했다.
재상들은 다른 의미에서 말을 잃었다. 아실이 아름답다는 소문은 이미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황제가 애가 닳아 날뛰는 게 몹시 이해가 갔다.
“이분이 아실이십니까?”
“지금은 그렇게 불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원래 제 이름은 아넬입니다. 이렌시아에서 온 성녀지요.”
“아넬!”
자레스가 벌떡 일어났고, 재상들은 일제히 턱을 빠뜨렸다.
자레스가 제지할 틈을 주지 않고, 아넬이 얼른 말을 이었다.
“칼리크가 부활하려 하고 있습니다.”
“뭐라고요?”
이번엔 재상들까지 일제히 일어났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칼리크가 부활하고 있다니요? 칼리크는 태고의 전투에서 소멸한 게 아니었습니까?”
대재상의 물음에 아넬이 호흡을 살짝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대대로 성녀들에게만 전해져 온 비밀입니다만, 사실 칼리크는 완전히 소멸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칼리크와 메타는 어둠과 빛, 등이 붙은 쌍둥이 같은 존재입니다. 한쪽이 완전히 소멸하면 나머지 한쪽 역시 존재할 수 없지요. 그래서 메타께서는 칼리크를 소멸시키는 대신 봉인하여 극북의 얼음 섬에 봉인하였습니다.”
1,500년 넘게 날조된 신화를 신봉하고 있는 재상들에게 하루아침에 메타와 칼리크가 뒤바뀌었다는 걸 설득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에 아넬은 사실을 각색하였고, 일반인이 납득할 수 있는 선에서 성녀의 위엄을 빌려 거짓말을 포장했다.
주어만 바뀌었을 뿐 엄연한 현실이었고, 아넬은 성녀로서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칼리크를 봉인한 얼음 섬에서 지진이 일어났다는 걸 알고 계시지요?”
“그건 전령을 통해 들었습니다만.”
별거 아닌 일이라 생각했지만 그 섬에 ‘악신 칼리크’가 봉인돼 있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재상들 사이에 긴장이 감돌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 재앙이 너무 많이 발생했다. 성녀가 죽고, 새 성녀가 갑자기 카비르에서 나타나더니 전염병이 돌았다.
이어서 황제가 바뀌면서 전쟁까지 일어났는데, 그 일련의 과정이 어쩐지 악신 칼리크의 부활의 조짐이 아닌가 의심되기 시작했다.
“메타께서 제게 새로운 계시를 내리셨습니다. 신께서는 그것이 칼리크가 깨어나려는 조짐이라 이르셨습니다.”
“뭐라고요?”
이미 납치됐다던 성녀가 왜 황제의 내실에서 지내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졌다.
고대의 악신이 깨어나는 거라면 이건 아르드 전체가 함께 맞서 싸워야 하는 일이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냉철한 시각을 가진 자도 있긴 했다.
젊은 재상이 일어나 손을 들고 외쳤다.
“잠깐만요. 저는 믿기 어렵습니다. 일단 아실께서 성녀라는 증거도 없지 않습니까. 성녀는 유가에게 납치됐다 들었습니다. 우리는 성녀님의 얼굴도 모르는데 난데없이 나타나 성녀라고 주장하면 저희가 믿어야 합니까?”
자레스가 무섭게 그쪽을 노려봤다.
재상의 의심은 충분히 합리적이었지만, 아넬을 의심하는 게 마치 자신을 모욕하는 것 같아서 자레스는 태워 죽일 것 같은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재상은 찔끔해서 몸을 움츠리긴 했지만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진 않았다. 그러자 아넬이 회의실 테이블 위에 입가심용으로 놓인 회향(茴香) 씨앗을 향해 조용히 손을 들었다.
“허엇!”
그녀가 힘을 가하자 바로 말린 회향의 씨앗에서 싹이 튀어나왔다. 불꽃이 터지는 것처럼 여러 갈래로 갈라진 노란 꽃송이가 튀어나오자 다들 입을 다물었다.
성녀가 맞았다. 그리고 성녀인 아넬의 호소는 상당한 권위를 갖게 됐고 아무도 그녀의 말을 의심할 수 없게 만들었다.
“정말로 칼리크가 깨어나려 한단 말입니까?”
재상들이 두려움에 질려 아무 말도 못 하자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자레스가 툭 내뱉었다.
“그동안 있었던 사고들이 모두 우연이라고 생각하진 않겠지?”
사실은 대부분의 사건들이 자레스로 인한 것이다. 아넬을 얻기 위해 벌인 일들이었고, 어떤 일들은 그걸 방해하기 위해 일어난 일이다.
하지만 모든 일들은 그녀가 파멸을 피하기 위해 신전을 도망친 이후부터 시작됐고, 정확히는 메타가 힘을 잃은 뒤부터 생겨났다.
이 모든 것이 대전환의 전조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성녀께선 그를 미리 알고 계셨기 때문에 신전을 빠져나와 칼리크의 부활을 막으려 했소. 그러다 나와 만났고, 이 자리에 서게 됐소.”
수많은 사연들을 모두 건너뛰고,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들마저 설명을 거부한 채 결과만을 털어놨다.
원인과 결과는 모두 진실이 맞으니 그사이에 일어난 일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럼 유가 황자가 성녀를 납치했다는 것은….”
누군가 눈치 없이 그 말을 꺼냈다가 자레스가 쳐다보자 어물어물 입을 다물었다.
“지금 세계가 멸망할 수 있다는데 그게 중요한가?”
어차피 아실이 성녀라는 것은 언젠가 새어 나갈 일이다. 조금 빠르고 늦고의 차이일 뿐이기에 자레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문제는 아넬이 직접 나타나서 호소할 정도라면 메타가 곧 깨어나는 게 현실이 될 거라는 점이다.
“그럼 메… 아니, 칼리크가 깨어나는 걸 막기 위해 우리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화제를 전환하기 위해 자레스가 그리 묻자 좌중의 시선이 모두 아넬에게로 쏠렸다. 그러자 아넬이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전쟁을 멈추셔야 합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칼리크는 사람들의 죽음과 공포를 먹으며 힘을 키웁니다. 그동안 조용했던 칼리크가 하필 뮤티셈에서의 회전이 있고 나서 갑자기 깨어난 건 우연이 아닙니다. 긴 역사 속에서 봉인된 칼리크는 서서히 힘을 키웠고, 마침내 50여 년 만에 대규모의 전투가 있고 많은 사람이 죽으니 한층 더 힘이 강해진 것입니다. 그러니 칼리크가 완전히 깨어나는 걸 막기 위해선 반 연합군과의 전투를 멈추셔야 합니다.”
이번엔 모든 재상들이 기함했다. 오직 자레스만 침묵한 채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게 말이 됩니까? 카비르에 쳐들어온 외적과의 싸움을 포기하다니요, 나라를 통째로 유가에게 바치란 말입니까!”
“아니, 애초에 전쟁은 아르드 전체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왜 카비르만 전쟁을 멈춰야 한단 말입니까? 그 근거가 대체 뭐란 말이오?”
“재상들은 말을 삼가시오!”
재상들이 덤비듯 언성을 높이자 대번에 자레스의 분위기가 험상궂어졌다. 이럴 걸 알면서도 의논도 하지 않고 찾아온 아넬에게 화가 났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재상들이 그녀에게 수모를 줘도 되는 건 아니다.
자레스가 누구라도 함부로 입을 열면 목을 베겠다는 의도를 서리서리 담은 채 재상들을 일일이 노려보자 그들의 입이 비로소 조용해졌다.
“근거는… 메타의 계시뿐입니다. 저도 전쟁과 학살이 이 카비르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게 아니란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카비르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이 가장 큰 싸움인 건 확실하지 않은가요?”
카비르는 아르드 전체에서 가장 큰 제국이다. 대륙마다 크고 작은 나라가 있고 그들이 각기 전쟁을 벌이고 있지만, 카비르가 아르드에서 가장 큰 국토를 점령한 이후로 싸움의 규모는 줄었다.
카비르가 아르드를 장악하고 있는 동안 압도적인 국력으로 인해 불평등한 평화가 정착된 까닭에, 근 50년 만에 일어난 이 전쟁보다 큰 것은 없는 게 사실이었다.
“가장 먼저 제일 큰 싸움부터 멈춰야 합니다. 칼리크에게 먹이를 주지 말아야 해요. 인간의 생명이 많이 죽어 갈수록 칼리크는 강해질 뿐입니다. 지금은 악신의 힘이 강해지는 걸 막고, 다시 봉인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성녀님, 전투를 멈추면 연합군이 카비르를 짓밟고 더 많은 제국민이 죽을 뿐입니다.”
“게다가 인간이 감히 어떻게 신을 봉인한단 말입니까? 메타의 힘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인간이 신을 상대할 수 있습니까?”
그에 대한 대답은 그때까지 침묵하고 있던 자레스가 했다.
“시간이 답이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성녀의 말이 맞소. 우리는 일단 전쟁을 멈춰서 칼리크의 부활부터 막아야 하오. 칼리크의 힘이 커지는 걸 멈추게 한 뒤, 칼리크의 본거지를 무너뜨려야지.”
자레스가 결단을 내렸다.
아넬이 얼굴을 드러내는 걸 각오하면서 자신이 성녀라는 걸 밝힐 정도면 칼리크의 계시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니 전쟁을 멈춰야 한다는 아넬의 호소 역시 듣는 게 맞았다. 자레스는 엄중하게 명령을 내렸다.
“뮤티셈의 영주에게 후퇴 명령을 내리겠소.”
“폐하!”
“모든 중앙군은 진군을 멈추고 카라로 후퇴하시오. 카라로 오는 길을 비워 두도록. 마지막 전선은 카라의 앞마당인 하퀼 평원까지 늦추겠소.”
“아니 될 말씀입니다, 폐하! 카라까지 길을 내주시겠다니요! 제국을 통째로 적에게 건네주실 생각이십니까?”
“이건 투항이나 다름없습니다, 폐하! 겨우 한 사람의 말만 듣고 그런 결정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다들 그만!”
자레스가 팔걸이를 세게 내려치며 벌떡 일어났다.
“황명이다!”
이쯤에서 이미 자레스는 위협적인 반말로 바뀌어 있었다.
그동안은 국정의 협력자로서 재상들을 존중해 줬지만, 지금은 그들의 의견을 받아 줄 여유가 없었다.
황위 찬탈자.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형제들을 죽여 가며 황제가 된 거로 알려져 있는 자.
결코 온유하다 할 수 없는 새 황제의 시퍼런 칼날이 머리 위에서 번뜩이고 있었다. 재상들은 일제히 숨을 죽였다.
“우리는 굳이 전투를 해서 칼리크의 부활을 앞당길 필요가 없다. 길을 내주면 어차피 놈들은 다른 곳을 돌아보지 않고 곧장 카라로 진격할 테니, 만약 전투를 하게 된다면 하퀼에서 격돌하겠다. 식량을 불태우는 일도 그만두도록. 철저하게 충돌을 피하도록 하라.”
“폐하!”
“중앙군은 후퇴하여 하퀼 평원에 진영을 갖추도록. 그리고 예니센들 역시 총출동한다. 대전투를 준비하라!”
“황명, 받든다!”
극북으로 향한 무하립을 대신해 예니센을 지휘하고 있으며, 현재는 호위로서 회의장에 들어와 있던 무칼라스가 힘차게 대답했다.
어째서 막아 낼 수 있는 길을 다 저버리고 제국의 심장부 앞에서 위험한 도박판을 벌이려는지, 재상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성녀의 한마디 때문에 이런 짓을 벌인단 말인가? 황제가 미친 게 틀림없구나! 여자에 눈이 어두워 나라를 내주려 하다니!’
하지만 그 위로 자레스의 예언 같은 선언이 또 떨어졌다.
“칼리크가 힘을 키우는 걸 막으며 시간을 버는 동안, 극북을 치러 간다.”
“예?”
“이미 모든 준비를 갖췄다. 이는 짐이 오랜 시간 동안 성녀의 계시를 통해 알아낸 바, 극북에 잠들어 있는 칼리크의 본거지를 태우고 모두 녹여 버리면 칼리크는 부활하지 못한다.”
“그런 일이 어찌 가능합니까? 극북의 얼음 땅은 인간이 감히 들어가지 못하는 곳입니다.”
“사람이 가는 것이 아니다. 인간 대신 살아 있는 화산섬이 들어갈 것이다.”
이해하지 못하는 재상들에게 더 이상 설명하는 걸 포기한 자레스가 말을 이었다.
“하퀼 평원은 원래 진흙 지대지. 카비르에 비가 잘 오지 않게 되면서 땅이 굳어 평원이 됐지만, 지금도 땅을 파면 모래보다 훨씬 고운 흙이 나온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재상의 물음에 자레스가 씩 웃었다.
“하퀼 평원에서 카라로 올라오는 경사진 고지대 위에 중앙군을 포진시키겠다. 칼리크를 봉인하는 데 성공한다면, 유가의 군대는 하퀼 평원에서 지옥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
이상했다.
유가는 북부 평원을 지날 때와 다르게 일이 너무 잘 풀리는 바람에 오히려 카라를 향해 쉽게 진격하지 못했다.
뮤티셈에서 다시 한번 격전을 준비하고 있을 때 돌연 뮤티셈 영주가 백기 투항을 했다.
퇴로만 확보해 주면 성을 비워 주겠다는 조건이었다.
전투를 포기하고 성을 내주겠다는 제안에 오히려 유가는 그의 저의를 의심했는데, 척후를 보내 보니 뮤티셈을 향해 진군하고 있던 중앙군이 무슨 이유에선지 카라 쪽으로 후퇴하고 있다고 했다.
“이유가 뭐지? 혹시 함정이 아닌가?”
유가는 의심이 많아 쉽게 협정에 응하지 못했지만, 의심보다 남은 군량이 다 떨어져 간다는 현실이 급박했기에 할 수 없이 퇴로를 열어 주는 데 동의했다.
예상과 달리 뮤티셈 영주는 정말로 군량은 물론이고 무기까지 남겨 두고 성에서 물러났고, 유가 군은 무혈로 뮤티셈에 입성했다. 당분간 버틸 군량을 확보한 건 물론이었다.
유가 군이 식량을 비축하고 약간의 대포와 물자들을 구해 다시 진군을 시작한 건 그로부터 약 열흘 뒤였다.
그러는 동안 북부 지역에선 칼리크 교도들이 저장해 놓은 영원의 불의 연료가 빠른 속도로 모였고, 그를 실은 수송선이 아직 카비르의 해역 안에 있는 나클 섬의 오른쪽 후미에 그 연료를 쌓았다.
첫 번째 폭발이 일어났다.
첫 폭발에선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섬은 여전히 북동쪽을 향해 둥글게 돌아가고 있었는데, 꾸준히 폭발을 일으키자 그때부터 조금씩 북쪽을 향해 밀려가기 시작했다.
“됐다!”
한번 요령을 알자 그날그날 궤도를 수정하는 데 필요한 양을 계산해서 잘 조절해 가며 폭발을 일으킬 수 있게 됐다.
연료를 실은 군선이 더 도착했고, 타네시나 볼타니아 해군과의 전투가 벌어질 경우를 대비해 전투선도 뒤를 따랐다.
하지만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는 일은 없었다.
충돌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크게 우회해서 타네시 북부의 바다로 접어들었는데, 타네시 북쪽의 바다는 파도가 무척 거칠고 여름에도 혹독하게 추워서 배를 운용하기 힘들었다.
해류가 더욱 빨라진 데다가 영원의 불로 계속 궤도를 수정하고 속도를 높인 덕에 예상보다 빨라진 3주일 후에 마침내 나클 섬은 얼음 섬의 해안이 보이는 바다까지 근접했다.
카라에도 급보가 도착했다.
유가 군이 하퀼 평원에 거의 다다랐다는 소식이었다.
이제 하퀼 평원까지는 사흘 정도의 거리가 남아 있었는데, 아마도 나흘째 되는 날 아침이면 평원으로 진격할 거로 짐작됐다.
카비르 군은 언덕 지대에 진을 치고 있으니 곧 평원에서 대격돌이 벌어질 터였다.
그 선두에 자레스가 있었다.
모든 재상들이 황제가 직접 선공에 나서는 걸 만류했으나 자레스는 듣지 않았다.
“내가 전투에 패해 죽거든 황위는 유가에게 넘겨라. 그러면 적어도 카비르가 멸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출전을 앞두고 자레스는 입아귀를 비틀며 재상들에게 그런 말을 남겼다.
유가는 황위만 받는다면 간단하게 연합군을 배신할 위인이다. 재상들이 협상을 제안하면 바로 중앙군의 통제권을 넘겨받아 연합군을 몰살할 것이다.
황궁에 남은 아넬과 칼리크의 신도들은 회당에 모아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자레스는 아넬을 남부로 피신시키려 했지만, 이번엔 아넬이 듣지 않았다.
“내가 죽으면 성녀의 자리는 에포메니에게 넘기면 돼요. 그러면 적어도 성녀의 후예는 계속 이어질 거예요.”
자레스가 했던 말을 그대로 받아치니 그도 말리길 포기했다. 군영에 함께 있겠다고 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 생각하며 자레스는 군막에서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정확히는 비가 오기를 기다렸다. 엄청난 폭우가 시작되기를, 그것이 바로 메타가 소멸했다는 신호가 될 터였다.
***
극북의 추위는 맹혹했다.
캐럭 선이 아니라 거대한 갤리온 선을 타고 나클 섬을 따르고 있던 퀴나에는 사람이 아니라 옷 덩어리로 보일 정도로 겹겹이 털옷을 뒤집어쓴 채 나클 섬이 얼음 섬의 해안으로 접근하는 걸 지켜봤다.
그나마 갑판 위의 화로에 영원의 불을 피워 놔서 버틸 수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혹독하게 추웠다.
“이, 이제 길 안, 안 바꾸고 섬으로 직격하, 하는 거죠?”
입이 얼어서 말이 안 나왔다. 무하립은 그보다 훨씬 더 얇게 입었는데도 어떻게 그리 침착하고 늠름한지 모르겠다.
“해류의 방향이 얼음 섬 쪽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이대로면 절대 방향을 바꿀 리 없습니다.”
그때였다. 갑자기 멀리 보이는 얼음 섬의 빙벽이 굉음과 함께 무너졌다. 세찬 파도가 일어나면서 나클 섬을 뒤따르고 있던 배들 역시 사나운 물결에 휩싸였다.
“메타가 깨어나려 하고 있습니다.”
무하립이 심각한 얼굴로 해안을 바라보며 외쳤다.
“서두릅시다. 메타가 완전히 부활하기 전에 나클 섬을 충돌시켜야 해요!”
그의 명령에 조타수는 이를 악물며 키를 돌려 파도를 넘으려 애를 썼다. 다행히 몇 번의 위험한 너울성 파도를 비껴가면서 배는 난파를 면했다.
파도가 좀 잦아들자 선원들이 보트를 내려 나클 섬으로 접근했다. 연료를 가득 실은 10여 대의 보트가 나클 섬에 미리 박아 둔 말뚝에 밧줄을 걸고 섬에 배를 댔다.
개미 떼처럼 달라붙은 선원들이 섬 전체에 허리 높이로 연료를 쌓았다. 오랫동안 굳혀서 거의 젤리 상태가 된 연료가 차곡차곡 쌓였다.
연료가 흔들려서 섬 밖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이미 섬 전체를 빙 둘러서 석회와 화산재를 섞어 바닷물로 반죽해서 만든 방파제를 쌓아 둔 상태였다.
파도와 싸우며 악전고투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나클 섬 위에 가져온 연료를 모두 쌓았다. 섬에서 물러난 선원들이 배 위로 올라오자, 무하립이 마침내 명을 내렸다.
“쏴라!”
영원의 불을 화살촉에 붙인 궁병들이 나클 섬을 향해 일제히 화살을 쐈다. 수백 개의 화살이 날아가자 습기에도 불구하고 잔뜩 쌓아 둔 연료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화염이 순식간에 퍼지면서 섬 여기저기로 불길이 번져 갔다. 퀴나에가 후퇴를 명령했고, 그러자 하갑판의 수부들이 일제히 노를 저으며 방향을 선회했다.
하지만 후퇴도 쉽지 않았다. 혹독한 날씨에 선체가 뒤틀리기 시작했고, 노는 얼어붙어서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수부들이 비명을 질러 댔다.
“노가 얼어붙어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영원의 불을 붙여! 노가 타도 상관없다. 돛이 남아 있으면 빠져나갈 수 있어!”
무하립의 명에 따라 노에 불이 붙여졌다. 끼어 있던 빡빡한 얼음이 녹으면서 비로소 노를 움직일 수 있게 되자 수부들이 일사불란하게 한 방향으로 노를 젓기 시작했다.
배가 빠르게 선회하자, 무하립이 다시 한번 명을 내렸다.
“소타선(燒打船. 적의 배에 충돌해 불을 옮겨 붙이기 위해 가연물, 폭발물을 적재한 배)의 선원들도 전원 본선으로 옮겨 타라!”
뒤를 따르던 배들의 선원들이 보트를 내렸다. 마지막으로 키의 방향을 얼음 섬을 향해 직진하도록 붙들어 매 둔 뒤 선원들이 모두 본선으로 옮겨 탔다.
“궁병! 섬 위로 화살을 더 쏘도록!”
일제히 화살이 발사됐다. 본선을 섬의 오른쪽으로 돌아가게 한 뒤 다시 화살을 수백 대 연달아 쏘자, 아직 불이 붙지 않았던 섬의 오른쪽에서도 화염이 치솟기 시작했다.
불과 불이 뒤엉켰다. 작은 불꽃들이 불덩어리로 바뀌었고 연쇄적으로 폭발이 일어났다. 그러더니 이윽고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섬 전체가 불덩어리로 바뀌었다.
“됐다!”
그것은 일찍이 본 적 없는 기이한 광경이었다.
인간이 만들어 낸 것 중에 가장 큰 화염이 바다 위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예견한 것과 같이 나클 섬은 거대한 화산섬 그 자체가 됐고, 계속해서 일어나는 폭발에 추진력을 얻어 더 빠르게 얼음 섬을 향해 밀려갔다.
“소타선에 불을 질러라!”
연료를 가득 실은 배를 향해서도 화살이 쏘아졌다.
소타선의 갑판에도 연료통을 잔뜩 쌓아 놓은 데다가 배 여기저기에 연료를 끼얹어 놨기 때문에 가연성이 높은 연료에 곧 불이 붙었다.
소타선에도 불꽃이 치솟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조종해 놓은 키의 방향에 따라 수십 대의 배들이 파도를 거스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 사이로 본선은 빠르게 노를 저어 먼 바다 쪽으로 후퇴해 나갔다.
“폭발이 더 커지고 있습니다!”
선원이 외쳤다. 그의 말대로 마침내 표피층이 녹으면서 나클 섬 안에 꽉 찬 칼리크의 육신에 불이 옮겨붙게 되었다.
폭발이 더 커졌고 이제는 타네시의 해안에서도 보일 정도로 커다란 화염덩어리가 됐다.
무려 지름만 5Km에 달하는 불덩어리였고, 섬의 심층부까지 녹아내리기 시작한 지금은 살아 있는 지옥이었다. 마침내 그 생생한 화염지옥이 얼음 섬을 강타했다.
“부딪쳤다!”
해안이 붕괴되는 게 육안으로도 보였다. 무너진 빙벽이 나클 섬 위로 쏟아졌지만 섬의 불꽃은 전혀 작아지지 않았다.
그로 인해 몰아친 눈보라도, 높은 파도도 영원의 불을 꺼뜨리지 못했다. 심층부로 확대된 화염은 더 커졌고, 마치 부지깽이로 들쑤셔진 화덕의 불처럼 더 높이 타올랐다.
화염끼리 서로 섞이면서 불꽃의 폭풍이 생성됐고, 나클 섬의 불꽃은 마치 화염룡처럼 넘실대며 얼음의 땅을 녹이고 있었다.
엄청난 불길에 태양의 힘으로는 녹지 않았던 얼음 섬이 무너져 내리고 거대한 유빙으로 쪼개지며 바다로 떨어졌다.
섬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메타가 소멸되기 시작한 것이다.
퀴나에와 무하립은 그 장엄한 광경을 보면서 말 못 할 벅찬 감회에 사로잡혔다.
그 뒤로 영원의 불을 붙인 소타선들이 따랐다. 나클 섬의 궤도를 약간 빗겨 얼음 섬의 오른쪽을 직격하도록 조종해 놓은 배들이 예상한 방향에 맞춰 섬과 충돌했다.
모든 배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부딪히진 않았지만, 연료를 실은 배들 중 반 이상이 섬의 해안을 타격했다.
섬의 해안이 뭉개지면서 배들이 마치 쇄빙선처럼 얼음을 가르며 섬의 안쪽을 향해 조금씩 전진했다.
***
- 이게 무엇인가….
메타의 의식 속으로 스며들어 오는 감각이 있었다.
새하얀 얼음 속에 누운 그의 본체는 어둠보다 새까만 커다란 암흑이었다.
자신을 포장하기 위해 얼음을 무기로 스스로를 꽁꽁 감싸고 흰빛으로 칠했지만, 껍질이 벗겨져 나간 메타의 본체는 숨길 수 없는 어둠 그 자체였다.
그 어둠 속으로 작은 균열의 조짐이 가지를 뻗어 왔다.
그를 둘러싼 아늑한 얼음의 벽이 무너지고 있었다. 메타는 그 사실을 바로 알아챘다.
- 어찌 감히!
인간이 범할 수 없는 땅이었다. 창조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감히 아무도 그의 소굴 언저리에 얼씬한 적도 없었다.
자연은 수천 년 동안 축적돼 온 얼음의 벽을 녹이지 못했으니 이것은 인간의 소행임이 틀림없다.
메타는 시선을 들어 섬 주변을 훑었다.
깨어난 의식이 바다 위를 맴돌았고 이내 얼음 섬을 무너뜨리며 섬 깊은 곳으로 쳐들어오고 있는 불타는 섬에 닿았다.
메타는 그 살아 있는 지옥 속에서 오래된 적의 흔적을 찾아냈고 곧 공포에 휩싸였다.
- 꺼져라! 너는 이미 죽었다!
메타는 완전히 힘을 되찾지 못했다. 의식은 깨어나 있었지만, 본체는 아직도 거대한 얼음 섬 깊은 곳에 묻혀 움직일 수 없었다.
메타가 아무리 애를 써도 얼음 섬의 중심을 향해 뱀처럼 스며들어 오는 화산섬의 진격을 막을 수가 없었다.
- 나는… 아르드의 주인이다. 내가 이 세계의 지배자다. 꺼져라, 꺼져!
메타가 포효했다. 심연의 흰 어둠 속에서 울부짖다가 이내 마침내 깨어나기 시작한 한 조각 힘을 쥐어 짜낸 커다란 얼음의 창을 허공 속에 띄웠다.
- 사라져라!
얼음의 창이 나클 섬을 향해 내리꽂혔다.
하지만 그 순간 일어난 거대한 화염 폭발이 창을 삼켰다. 어지간한 산 하나를 부술 수 있을 정도로 크고 날카로운 창이 나클 섬에 꽂혔으나 섬은 갈라지지 않고 버텨 냈다.
얼음의 창은 순식간에 화염 속에 녹아 버렸고, 섬은 계속해서 얼음 섬을 가르며 전진했다.
섬이 조각나기 시작했다.
남서쪽에서 나클 섬이 얼음의 땅을 무너뜨리자, 동쪽에서는 소타선들이 해안에 부딪혀 왔다.
영원의 불은 파도에도, 쏟아지는 빙벽과 눈의 잔해 속에서도 꺼지지 않았다. 불타는 배는 마치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것처럼 얼음 섬의 중심을 향해 짓쳐들어왔다.
메타는 다시 힘을 모았다.
얼음의 창을 다시 일으켰지만, 그것만으로도 힘이 소모됐다. 본체가 확 줄어드는 걸 느낀 메타는, 순간 이도 저도 못하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얼음의 힘을 동원하지 못하면 나클 섬을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힘을 동원하면 본체의 소멸이 가까워진다.
- 안 돼…! 사라져, 사라져라! 나는 메타다! 소멸할 수 없는 존재다! 감히 인간 따위가 나를 부술 수 없다!
선제적으로 방어하는 걸 선택한 메타가 얼음의 창을 더 일으켜 섬을 향해 내리꽂았다.
섬의 귀퉁이가 창을 맞고 부서졌으나, 일부가 갈라져 나왔을 뿐 불은 꺼지지 않았다.
인간이 칼리크의 육신을 이용하는 걸 보고도 코웃음을 치며 무시한 것이 고스란히 재앙이 돼 돌아왔다.
메타는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제는 칼리크의 힘과 인간의 기술이 결합한 거대한 무기가 그를 향해 돌진하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무리해서 얼음의 힘을 일으킨 탓에 본체가 급격히 쪼그라드는 게 느껴졌다. 의식이 점점 멀어져 갔고, 다시 깨어나기 힘든 잠 속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 칼리크여!
마침내 태어날 때의 모습 그대로 아주 작은 어둠으로 졸아든 메타가 마지막으로 유구한 원수의 이름을 불렀다.
그와 함께 얼음 섬의 중심이 완전히 갈라져 두 쪽 나면서, 섬의 한복판으로 파고든 나클 섬이 주변의 땅을 녹이기 시작했다.
얼음 섬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메타의 땅은 대륙 정도는 아니지만, 어지간한 소국 크기는 됐다. 그만한 얼음덩어리가 녹아내린 여파는 컸다.
녹은 얼음들은 파도가 됐고 엄청난 양의 수증기가 됐다. 극북에서 형성된 수증기 무리는 뜨거워진 공기에 밀려 빠르게 남쪽으로 이동하였는데, 그 시기는 마침 유가의 군대가 하퀼 평원으로 진격을 시작할 무렵이었다.
“폐하. 적의 선봉이 진군을 시작했다!”
무칼라스의 외침에 자레스가 답했다.
“대포가 평원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기다려라! 포격 거리가 아직 남았다!”
대포의 사격 거리에 닿을 정도면 이쪽에도 피해가 막심할 텐데, 자레스는 공격을 명하지 않았다.
궁병의 공격도 허용하지 않고 대포를 실은 수레가 말에 이끌려 평원으로 진입할 때까지 기다렸다.
자레스는 하늘을 보고 있었다. 바야흐로 시커먼 먹장구름이 북쪽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그걸 보고서도 전투로 돌입한 유가의 짧은 식견에 그는 비웃음을 흘렸다.
‘놈은 하퀼 평원이 진흙 지형인 것도 모를 거다.’
평생을 황궁에서 정치 싸움이나 하고 지낸 유가는 실전을 몰랐다. 수 싸움에는 능할지 몰라도 카비르의 지형이나 지질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긴 알았다 해도 전투를 포기하진 않았을 것이다.
겨울이 아니면 비가 오는 일이 드문 이 카비르에서 여름으로 들어가는 이 무렵에 폭우가 쏟아질 거란 생각은 못 했을 테니, 유가는 구름이 몰려오는 걸 보면서도 주저 없이 병사들을 평원으로 내몬 것이다.
저 구름이 소나기로 그치지 않기를. 메타가 소멸했다는 신호가 바로 저 먹구름이기를.
자레스는 간절히 기도하며 눈을 부릅뜬 채 점점 시커멓게 변하는 하늘을 노려봤다.
“비가 온다!”
드디어 후두둑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내려치는 빗방울 속에서 하퀼 평원은 진격해 오는 연합군들로 가득 찼다.
그때 자레스가 명령을 내렸다.
“영원의 불을 쏴라!”
황명에 따라 하늘에서 불 비가 쏟아졌다. 대포보다 훨씬 더 사정거리가 긴 화살이 유가 군을 타격했고, 군대는 당황하여 잠시 물러났다.
“이쪽도 맞선다! 궁병이 엄호할 테니 보병과 기병들은 진격하도록!”
유가 군 역시 이미 상당한 양의 영원의 불을 확보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고지대인 카비르 군에게 닿기엔 아직 멀었다. 전열에서 쏜 일부가 카비르 군 사이에서 불타오르긴 했지만, 카비르 군의 피해보다 유가 군의 피해가 더 컸다.
진격해 들어가던 보병들이 숱하게 불꽃에 휩싸였고, 물로도 꺼지지 않는 불꽃이 들판에 번지면서 유가 군의 공격로를 막았다.
비가 더 심해졌다. 후두둑 떨어지던 빗방울이 채찍 같은 폭우로 바뀌면서, 서서히 땅이 질어지기 시작했다.
“화포, 화포로 진격해!”
영원의 불은 화력은 훌륭하지만, 대포처럼 넓은 범위에 타격을 주지 못한다. 하지만 믿었던 대포는 세찬 비로 인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어느새 진창으로 변한 땅이 수레바퀴를 붙잡았다.
짓이겨진 땅이 바퀴를 삼켰고, 화약은 젖어서 제대로 기동하지 않았다.
평원을 넘어 쇄도하려던 기병대는 말들이 진창에 빠지고 넘어지면서 비명과 함께 낙마해 목이 부러지거나 말에 깔려 압사당했다.
그 위로 카비르 군의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언덕 위에 고고히 선 카비르 군은 절대 아래로 내려오지 않은 채, 연합군을 눈 아래로 내려다보며 원거리 공격만 가했다.
폭우가 이제 시야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내리기 시작했다. 이런 빗속에선 전투가 불가능했기에 어쩔 수 없이 유가는 후퇴를 명령했다.
“전군, 후퇴하라!”
하지만 그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유가 군은 평원 밖으로 빠져나가려 했지만 평원 주변의 땅이 이미 진창이 된 상태였다. 폭우를 뚫고 겨우 반나절 거리 정도로 물러났지만, 그 뒤로 가해진 타격이 더욱 심했다.
폭우는 사흘간에 걸쳐서 내렸는데, 그러는 동안 평원은 아예 발목까지 잠길 정도로 침수됐다.
땅은 진창이 돼서 대포를 포기해야 했고, 군량은 물에 젖어 반은 녹고 썩어 버리고 말았다.
그 와중에 최악의 사태가 일어났다.
비를 피하기 위해 가까운 삼림 속에 군을 주둔시켰는데, 그 숲이 폭우를 이기지 못하고 지반이 붕괴되면서 수많은 군인들이 흙 속에 매몰된 것이다.
그 속에서도 비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끝없이 쏟아져 내렸다.
유가는 마치 재앙처럼 계속되는 비와 구멍 뚫린 하늘을 바라보다 결국은 자연의 힘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타네시로 돌아간다.”
카비르 군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연합군을 물리쳤다. 패잔병처럼 초라한 몰골로 후퇴하는 유가 군을 향해 언덕에 선 카비르 군과 무칼라스는 적나라한 욕설로 배웅했다.
“타네시로 돌아가서 말똥이나 먹어라!”
무칼라스가 아와드식 욕을 선창하자 카비르 군이 박장대소하면서 그의 욕을 따라 했다. 그들 역시 홍수로 피해를 봤지만 하퀼 평원의 진흙 밭에 처박힌 유가 군에 비하면 거의 없는 편이었다.
유가 군이 하퀼 평원을 빠져나갈 때 그들 역시 카라로 후퇴했는데, 지질이 다른 데다가 배수 시설이 잘 건설된 카라는 홍수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들은 웃으며 유가 군을 보낼 수 있었다.
자레스는 유가 군이 빠져나가는 걸 막지 말라 하였고, 유가 군은 계속되는 폭우에 쫓겨 결국 하라스 강 일대로 물러나고 말았다.
유가 군이 악전고투 끝에 한 달에 걸쳐 하라스 강으로 돌아간 뒤에야 폭우가 그쳤다.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한 엄청난 장마였는데, 그로 인해 10만에 달했던 군사는 돌아갈 때는 겨우 반만 남아 있었다.
대패였다. 그것도 카비르에 제대로 공격조차 못 해 보고 물러났다.
유가에게는 씻을 수 없는 수치였으며, 이 과오는 타네시로 돌아가서도 그의 발목을 잡을 것이었다.
유가는 몰랐으나 타네시 역시 그를 탓하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메타가 소멸하면서 일어난 해일로 인해 북쪽에 해안을 면한 타네시가 엄청난 타격을 입으면서, 이는 국력이 약해지는 계기가 됐다.
유가는 훗날 타네시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내분을 일으켰는데, 타네시는 유가라는 한 마리 뱀으로 인해 나라가 사분오열로 갈라지게 된다.
***
마침내 연합군이 북부 산악 지대로 물러갔다는 소식이 들릴 무렵, 무하립과 퀴나에 일행이 돌아왔다. 드니즈 해로 들어서 황궁의 선착장에 닿은 본선의 뒤에는 집채만큼 커다란 유빙 덩어리가 밧줄에 꽁꽁 묶인 채 끌려오고 있었다.
“돌아왔습니다, 폐하.”
무하립이 선착장에 내려 기다리고 있던 아넬과 자레스 앞에 무릎을 꿇었다. 퀴나에 역시 사뿐하게 허리를 숙이자 아넬과 자레스가 두 사람의 공을 치하했다.
“그대들이 아니었으면 세계가 다시 한번 소멸할 뻔했다.”
“모두 폐하의 선견지명 덕분입니다.”
“아니, 말은 바로 해야죠! 고서를 구해 온 것도 나고! 나클 섬을 알아낸 것도 나고! 공으로 치자면 사람 부려 먹기만 한 폐하보다는 제 공이 더 큽니다!”
“퀴나에 님의 말이 맞아요.”
아넬이 웃으며 대답하자 자레스의 입매가 살짝 실그러졌지만, 그는 더 이상 괘념치 않기로 했다.
메타의 소멸을 안 뒤로 아넬은 더없이 평안해졌고 동시에 관대해졌기에, 자레스 역시 그녀와 점점 비슷해졌다.
여유란 좋은 것이다. 더 이상 두려울 게 없는 사람은 조급할 필요도 없고 자비도 한 스푼씩은 더 생긴다. 게다가 퀴나에가 자레스 앞에서 까부는 건 원래 흔한 일이기도 했고.
“이것이 메타인가요?”
선착장으로 끌어 올려진 유빙 덩어리로 다가간 아넬이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반투명한 유빙 안에는 시커먼 연기 같은 게 서려 있었다. 크기는 사람 정도였지만, 이미 활동을 멈췄기에 마치 바위처럼 단단하게 굳어 얼음 안에 맺혀 있었다.
“다가가지 마, 아넬.”
“아니요.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 같아요. 이건…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어떻게 하려고? 얼음째로 땅에 파묻기라도 하려고?”
“얼음도 땅도 메타를 막지는 못해요. 전쟁과 살육이 다시 시작되면 언젠가는 메타가 다시 부활하겠지요. 그러기 전에 오래전 메타가 칼리크에게 그랬던 것처럼 사람의 몸 안에 가둬야 해요.”
그 말과 함께 아넬이 자레스를 돌아봤다.
“하지만 악신을 스스로 감당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자레스, 나는 성녀들이 그랬던 것처럼 메타의 힘을 담았다는 이유로 평생을 감시당하고 갇혀 살게 하고 싶지 않아요.”
자레스는 별 상관없었다. 그에겐 아넬만 중요했고, 극소수의 인간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체스판의 말이다. 그에 대해 별로 죄의식도 없었다.
하지만 아넬이 원한다면 들어줘야 했다. 그에게 죄책감을 유발하는 유일한 여자였기에, 자레스는 순전히 그 이유로 선황이 갇힌 마디나 인근 별궁의 문을 열었다.
***
별궁은 마치 무덤처럼 조용했다.
실제로 무덤이나 마찬가지였다. 라키사를 비롯해 많은 총첩들과 궁인들이 여기서 죽어 나갔으며, 병을 이겨 내고 살아남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황제는 겨우 숨만 붙어 있을 뿐, 살아 있는 시체나 마찬가지였다.
이 무덤 같은 궁의 문이 모처럼 열리고 그리로 새 황제 일행이 나타났다.
별궁의 별실에 혼자 갇혀 있던, 라키사의 아들 아쉬갈이 유모의 손에 끌려 자레스 앞에 왔다.
아쉬갈은 이제 겨우 두 살 반이었다. 젖을 뗄 무렵에 어미를 잃었고, 그 뒤로는 이 세상의 전부가 별궁인 줄로만 알고 살아온 아이였다.
아넬이 측은한 눈으로 아이를 들여다보다 이내 아쉬갈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누우?”
“아넬이라고 해요, 아쉬갈 님.”
아쉬갈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이 좁은 세계 안에서는 처음 보는 예쁜 누나였다.
아름다운 걸 좋아하는 건 인간의 본능 같은 거라서, 아쉬갈이 금으로 만든 것처럼 화려한 아넬의 금발을 손으로 잡으려 발끝을 치켜들었다.
“아쉬갈 님, 지금부터 아쉬갈 님의 몸에… 뭔가를 넣을 거예요.”
“무우?”
아이가 알아들을 리 없었지만 아넬은 열심히 설명했다.
죄책감이 없을 리 없다. 아이의 동의를 얻고 하는 일도 아니었고, 뭣보다 몸에 넣은 이질적인 존재로 인해 아이가 어떻게 변해 갈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넬은 인간의 힘을 믿었다.
성녀들이 선신인 칼리크의 후예라서 선하고 자비롭게 살았던 거는 아니라 생각했다. 그녀들은 그렇게 교육을 받았기에, 교육된 이성을 천성으로 삼았을 뿐이다.
그러니 아쉬갈도 잘 가르치면 악신의 영향을 받지 않고 그냥 아쉬갈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미 성장한 어른 대신 어린 아쉬갈을 택했다.
‘이 선택이 부디 현명한 것이기를.’
이제는 많이 녹아 사람의 크기로 줄어든 얼음덩어리가 수레에 실려 별궁의 안마당으로 들어왔다. 그리로 아쉬갈을 데리고 간 아넬이 그 앞에 아이를 세웠다.
아넬이 얼음덩어리에 손을 대자 그 안에 꼼짝 않고 굳어 있던 검은 형체가 서서히 이지러졌다. 그러더니 그것이 얼음의 표피를 뚫고 밖으로 흘러나왔다.
밖으로 나온 새카만 형체는 마치 그림자처럼 보였지만 결코 그림자는 아니었다.
그것은 다시 생명을 얻은 것처럼 이리저리 일렁이고 요동쳤는데, 아넬이 손바닥으로 그것을 잡아당기자 형체가 자석에 끌린 것처럼 쭉 끌려왔다.
아넬이 무릎을 꿇더니 시종인 사브가 가지고 온 은쟁반에서 조각 사탕을 집어 아쉬갈의 눈앞에 들이댔다.
사탕. 맛있는 것!
별궁에 온 이래로 귀하거나 맛있는 것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해 왔지만, 가끔 유모가 용케 사탕이나 꿀 바른 달콤한 과자 같은 걸 구해 와 아쉬갈에게 먹여 줬었다.
그건 죄 없는 아쉬갈에 대한 자레스의 손톱만 한 관용이었지만, 어쨌든 그 덕에 아쉬갈은 사탕의 맛을 알았기에 저절로 입을 벌렸다.
“앙.”
“착하기도 하지.”
아쉬갈의 벌린 입에 아넬이 사탕을 넣어줬다. 그리고 그 순간 아쉬갈의 벌린 입으로 시커먼 형체가 함께 흘러 들어갔다.
“아앙.”
아쉬갈이 작은 입을 닫고 동글동글 사탕을 혀로 굴렸다. 메타의 몸은 아쉬갈 안으로 완전히 들어갔지만 딱히 아쉬갈의 몸에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맛있어요?”
몇 개 모르는 단어 중 가장 잘 알아듣는 게 그것이었기에 아쉬갈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이제 황궁으로 가요.”
아넬이 아쉬갈에게 손짓하자 사브가 아이를 품에 안아 들었다.
이제부터 아쉬갈은 황궁에서 지내며 황족으로서 제대로 교육받게 될 것이다.
아넬에게서 자비를 배우고, 많은 스승들에게서 이성과 지성을, 자제심과 관용을 학습받게 될 것이다.
그렇게 메타의 후예가 아니라 평범한 인간으로서 자라나게 될 것이다.
“때가 되면 아쉬갈 님도 궁을 나가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될 거예요. 아쉬갈 님, 그때 가서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거든 모쪼록 잘해 주세요. 아이를 낳으면 좋은 아버지가 돼 주세요.”
“아아앙.”
조곤조곤 속삭이는 아넬의 목소리를 따라 아쉬갈이 옹알이를 했다. 자레스가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동안, 별궁을 지키는 호위대장이 다가와 그에게 속삭였다.
“폐하. 잠시 내실에 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왜지?”
“…선황께서 방금 전 돌아가셨습니다.”
그동안 질기게 생명을 이어 가던 선황이 마치 때를 맞춘 것처럼 붕어했다. 자레스의 귀에는 마치 한 세계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굳이 내가 가서 확인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아넬과 아쉬갈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자레스가 차갑게 내뱉었다.
“궁정 관리를 보낼 테니 격식에 맞춰 장례를 지내라. 2주간의 국상 기간을 선포하고, 선황이 미리 공사해 놓은 황묘에 묻도록 하겠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호위대장이 물러가자 자레스가 아넬을 따라 안마당으로 나왔다. 아쉬갈은 이미 유모와 사브와 함께 다른 마차에 올라탔고, 아넬만 남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레스가 나타나자 활짝 웃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는데, 자레스는 그 손을 잡아 손등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굳이 지금 선황이 죽었다는 걸 알려서 그녀의 기분을 가라앉게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자레스는 아넬의 허리를 당겨 안으며 조용히 물었다.
“아쉬갈을 자유롭게 살게 했다가 악의 씨를 널리 퍼뜨리면 어떻게 하지?”
아넬이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메타의 아이들보다 더 빨리 이 세계를 채우면 돼요.”
“아이를 많이 만들자는 이야기로 들리는군.”
아넬의 흰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안 그래도 요즘 자레스는 그 말을 열심히 실천에 옮기는 중이었다. 너무 지나쳐서 힘들 정도로.
“노력할게요.”
아넬이 가냘프게 속삭이자 자레스가 짓궂게 씩 웃었다.
“노력은 내가 해야지. 나의 아실.”
그 말과 함께 자레스가 그녀를 끌어안고 입술을 집어삼켰다.
이제 이 고귀한 여인은 성녀나 아실이 아니라 황후가 될 것이다.
카비르의 역사에 없던 첫 번째 황후. 황자들끼리 죽고 죽이는 전통은 사라지고 황후의 몸에서 난 아이들 중에 가장 적합한 자가 후계자가 될 것이다.
카비르는 더 큰 제국으로 거듭나고, 그로 인해 아르드엔 악의 신의 먹이가 될 전쟁과 살육이 줄어들게 될 것이다.
자레스와 아넬, 그리고 그들이 뿌린 씨앗들이 그렇게 만들어 갈 것이다.
더 밝은 미래를 꿈꾸며,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이 천천히 마차를 향해 걸어갔다.
신은 사라졌다. 메타도 칼리크도 모두 인간들의 몸속으로 스며들어 갔고, 이제 인간들만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 시대의 문을 열고, 아넬과 자레스가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